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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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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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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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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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이세계 편의점

DUMMY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엔 제대로 작동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길을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정말 그럴까? 그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4층 빌라로부터 점점 멀어지던 나는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섰다.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가봤자 첫날과 같은 결말이 날 것이다.


벽에 붙은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고, 미친 듯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미친 듯이 중얼거리면서. 결국엔 발로 그 망할 놈의 고철을 걷어차 버릴 것이 분명했다.


괜한 시간 낭비일 것이라 확신했다.


골리앗의 시선이 느껴졌다.


-깡!


뭘 그리 망설이고 있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아주 중요한 순간이야. 셋 중 하나를 골라 봐.”


고개를 들고 세 갈래 길을 응시했다.


토머스의 시체를 묻은 오른쪽으로는 크고 작은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반대편으론 멀리 숲이 엿보였다.


그리고 정면에 펼쳐진 길은 다른 곳보다 더 널찍했고, 큼지막한 건물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결정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난 지금 삶과 죽음 사이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이럴 땐 동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내겐 없다.


그렇다면 다른 걸 이용하는 수밖에.


배낭 속에 있던 토머스의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위로 던졌다.


창백한 햇살을 받은 칼날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툭.


나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뾰족한 칼끝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다.”


내 말에 골리앗이 고개를 움직였다. 허리를 굽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나를 향해 손짓한 건 가운데 길이었다.


좀 더 널찍한 곳, 그곳은 주택들이 많아 보였고, 무엇보다 나를 더 흥미롭게 한 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높은 건물이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렇게 높은 건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붉은 벽돌 빌라 4층에 머물러 있는 동안 누군가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며 쌓아 올리기라도 한 것일까?


주위가 어둡고 칙칙해서 못 본 것일 거라 판단했다.


대략 10층 정도의 건물. 값비싸 보이는 화려한 빌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저곳엔 누가 살고 있을까.


어쩌면 사람들이 바삐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의 피부는 완전히 벗겨지고 썩어버려 고약한 냄새가 건물 안에 그득했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상대를 향해 그르릉거리며 덤벼드는 고약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맙소사! 미친 생각이다.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 안에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상상을 하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고개를 저었다.


좀비들은 저런 건물이 아니라 지저분한 바닥, 또는 썩은 곰팡이 향이 가득한 어둡고 비좁은 곳에서 지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에 존재하는 거였지만.


끊임없이 치밀어 오르는 불길한 상상을 뒤로하며 몸을 움직였다.


골리앗이 나를 따랐다.


묵묵히 걸음을 옮긴 지 1시간쯤 후.


길가에 늘어선 주택들. 양쪽에 서 있는 것들이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다.


간혹 초록색이나 하얀 페인트칠을 한 대문이 열려 있거나 2층 창문 사이로 늘어진 커튼이 흔들리는 것 같긴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뭔가 불확실하고 이상한 곳이니까 심적으로도 불안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린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위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위협이 되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지도 않았고.


골리앗은 다리가 아픈지 가끔 내게 몸을 비벼댔다. 꿍! 소리를 내며 툴툴대기도 했다.


“골리앗 병사? 우린 임무 수행 중이야.”


조금 쌀쌀맞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품에 안고 가고 싶었지만.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내 신념엔 변함이 없었다.


-깡깡!


꼬맹이가 거칠게 항의했다. 다리가 아프다고 낑낑거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골리앗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품에 안았다.


-헥헥.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혀로 내 얼굴을 핥았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지만, 꾹 참았다.


생존 본능. 잠들어 있던 좀비가 그 소리를 듣고 공격할지도 모른다.


떼거리로 덤벼들어도 이젠 겁먹거나 도망치지 않고 상대해 줄 것이다.


아주 멋지게 말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비슷비슷한 주택과는 다른 건물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그걸 바라본 내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서 있는 1층짜리 아담한 크기의 편의점.


글자가 박힌 간판 따윈 없었다. 현실 세계의 그것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내부가 투명 유리를 통해 드러났다.


유리 위엔 큼지막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방인들을 위한 배려. 마음껏 가져가시길.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나와 골리앗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그 누군가의 선물일까?


그냥 아무거나 먹고 마시라는 거잖아.


물끄러미 종이 위를 응시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선 채로 안을 유심히 살폈다. 그늘진 어두운 곳에 설치된 덫이나 함정 따위를 찾으려 했다.


-깡!


골리앗이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너 참 성격 급하다.”


안은 조용했고, 뒤따라 오는 이들도 없었다.


또 한 번 유리문 위를 흘끔거렸다. 대놓고 맘껏 가져가라고 하는 데 굳이 망설일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지체할 마음도 없었고. 그러기엔 배가 너무 고프고 목이 말랐다.


유리를 밀자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과자와 사탕, 빵, 초콜릿, 음료수, 물 따위가 진열되어있는 편의점 내부가 눈앞에 드러났다.


골리앗이 축축한 코를 벌름거리며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어댔다.


-헥헥.


천국이 따로 없다는 표정이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계산대 아래, 누군가 숨어있을 만한 공간을 확인했다. 냉장고 오른쪽에 있는 작은 창고 비슷한 곳도 둘러 보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캔맥주가 눈에 띄었다.


마음 같아선 냉장고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지만, 그런 미친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좀비들의 세상에 이런 것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일부러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면 조금 더 그럴듯하게 꾸몄어야 했다.


썩은 시체들에게 편의점은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 하나 살고 있지 않은 공간에 집이 너무 많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따위도 이곳과 전혀 맞지 않았다.


폐를 썩게 만드는 미세먼지 가득한 날처럼 흐릿한 하늘과 뼈를 시리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빗물이라니.


그럴 거면 차라리 일 년 내내 추운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식인 늑대들의 출몰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조리 바닥을 돌아다니는 골리앗을 뒤로한 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 들었다. 차가웠다.


불 켜진 환한 냉장고. 전기가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이젠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비들 세상에 음료수가 가득한 냉장고라니.


아무렴 어떤가.


갈증이 느껴졌고, 난 곧바로 생수 뚜껑을 열고 물을 마셨다.


순식간에 물 한 통을 다 비우고 나서 잠시 기다렸다.


부작용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여긴 이세계였고, 듣고 보도 못 한 일들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생수 안에 좀비 바이러스가 들어있다거나. 아니면 곧장 숨이 멎어 버리는 치명적인 독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내 눈은 어느새 크림이 듬뿍 담긴 동그랗고 납작한 빵을 향해 있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골리앗이 운동화를 물어뜯으려 했다. 얼른 먹을 걸 달라는 신호였다.


불쌍하게도 꼬맹이의 힘으로는 이 안에 있는 먹을거리들을 맘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모두 골리앗의 키보다 높게 진열돼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려. 독이 들어 있지 않나 지금 시험해 보는 중이야.”


내 말에 골리앗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냐는 말을 내뱉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참아보겠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얼마 후.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좀 전부터 노려보고 있던 크림빵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봉지를 뜯었다. 꺼내든 빵을 반으로 잘라 골리앗에게 주려다 잠시 멈칫거렸다.


꼬맹이에겐 개사료가 필요했다. 혹은 개껌 같은 거.


“기다려. 더 맛있는 걸 골라보자.”


이것저것 잔뜩 쌓여 있는 진열대 위를 빠르게 살폈다. 혹시나 골리앗의 먹이가 있는지 찾았다.


아쉽게도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깡깡!


골리앗이 격렬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맛있는 간식 시간. 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나는 골리앗을 위해 통조림 캔을 집어 들었다. 생선 통조림이었다. 크림 빵보단 그것이 꼬맹이의 건강을 위해선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다.


플라스틱 접시 위에 맛좋은 생선 통조림을 쏟아주자 기다렸다는 듯 코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잠시 골리앗을 보고 있던 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원한 음료수와 달콤한 초콜릿까지 입속으로 마구 집어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밖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와 골리앗 단둘만이 존재하는 듯 거리는 조용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만 알아낸다면, 일단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골리앗과 함께 여길 좀 더 탐사해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좀비들 외에 다른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르고, 이곳에서 멀리,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다 보면 영화에서나 볼법한 신세계가 존재할지도 모르니까.


순식간에 통조림을 먹어치운 골리앗이 더 달라고 낑낑거렸다.


우린 한동안 맛있는 간식에 빠져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먹고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배가 부를 때쯤, 토머스의 배낭을 채우기 시작했다.


부피가 덜 나가면서도 열량이 많은 것들로 골라 담았다.


초콜릿을 입힌 비스켓과 사탕, 육포도 넉넉히 넣었고, 물도 빼놓지 않았다.


그 덕에 홀쭉했던 배낭이 순식간에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지퍼가 뜯겨나갈 정도였지만, 꾸역꾸역 먹을 걸 챙겨 넣었다.


이곳에서 편의점을 발견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중간에 또 다른 식료품 가게라든가 편의점 따위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일 경우도 미리 생각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뭐든 지금 많이 챙겨둬야만 했다.


배부른 코끼리만 한 배낭을 등에 짊어지며 서둘러 그곳을 나가려다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유리문 밖에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이방인을 위한 장소. 나와 골리앗을 위한 음울한 이세계 위로 펼쳐진 편의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와 골리앗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존재. 좀비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마법사 같은 힘을 가진 자.


이 세계를 창조하고 뭐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이기적인 악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굴까?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어 내고 멋대로 휘젓고 있는 걸까?


그것이 좀비일 확률은 제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어기적거리며 어디론가 이동하는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일 뿐이었다.


갑작스레 죽은 토머스가 생각났고, 얼마 전 좀비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운 나쁘게 나만 이곳으로 굴러떨어진 게 아니란 뜻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이곳에서 초콜릿을 먹고 물을 마실 거라는 생각이 들자 이대로 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급히 배낭 안에서 펜을 꺼내 들었다. 진열대 위에 있던 메모지를 찾아 그 안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나와 골리앗의 모습이었다. 대충 쓱쓱 펜을 움직였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아볼 수준은 되었다.


메모지를 어디에 놔둘까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계산대 아래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가 엿보였다. 내 시선을 잡아끈 건 의자가 아닌 그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나는 몸을 수그리고 의자 위에 놓여 있는 ‘그것’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 구불거리며 이어져 있는 가느다란 선, 군데군데 찍힌 붉은 점과 화살표. 그리고 이동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반쯤 접혀 있는 그것이 지도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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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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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불의 힘 루드락샤 24.09.17 5 1 14쪽
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10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9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9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9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2 1 13쪽
» 이세계 편의점 24.09.08 11 1 13쪽
13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1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10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2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8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9 3 13쪽
4 그것들 24.08.29 26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3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6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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