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붉은 옥수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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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신
작품등록일 :
2024.08.27 13:28
최근연재일 :
2024.09.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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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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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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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의 수첩 4

DUMMY

조금씩 현실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뒤를 돌아보았다. 토머스의 무덤은 안전했다.


쪼르르 내 뒤를 따르던 골리앗이 발등으로 기어오르려 했다.


급히 골리앗을 안아 들었다.


조금 전 벌어진 일로 인해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인간의 무덤을 본 것으로도 모자라 뭐라 딱히 명명할 수 없는 이세계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좀비를 지켜보며 새 주인에 대한 걱정이 커졌을 것이다.


조금 속도를 늦춘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 다른 좀비들은 보이지 않았다.


품에 안은 꼬맹이를 더더욱 꽉 끌어안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우린 정말 잘 싸웠어.”


골리앗이 이때다 싶은 건지 깡! 하고 짖어 댔다.


곧장 걸음을 옮겨 어젯밤 몸을 숨긴 빌라 4층으로 되돌아 왔다.


그 사이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현관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무척 반가웠다.


내가 살던 현실 세계로 되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아주 잠깐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뚝뚝.


몸에서 빗물이 흘러냈다.


욕실 문을 열었다. 물이 나올 턱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샤워기를 틀었다.


역시나...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벽에 붙은 스위치를 켜보았다.


마찬가지로 아무 변화가 없었다.


굉장히 불편하고 끔찍한 이곳을 창조한 자가 있다면. 만일 그렇다면 그 녀석의 머릿속을 탈탈 털어보고 싶었다. 그 속에 뭐가 들어차 있는지 말이다.


“춥지?”


꼬맹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바르르 몸을 떨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이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혈관을 타고 도는 뜨거운 핏물마저 차갑게 변하고 있는 듯했다.


벽에 걸린 수건으로 꼬맹이의 몸을 닦아냈다.


-깡!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참혹한 상황이었지만 성격은 밝은 녀석이라 생각했다.


“다됐어.”


일을 끝마친 나는 재빨리 옷을 벗었다.


무겁고 축축하고 축 늘어진 거머리처럼 내 몸에 딱 달라붙어 있던 옷을 벗고 나서 마른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옷장 안엔 속옷과 셔츠, 바지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티셔츠와 셔츠, 트레이닝복과 청바지 같은 것들.


여기가 인간이 사는 곳인지, 아니면 빌어먹을 취미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곳인지 이제 그따위 궁금증은 갖지 않기로 했다.


쓸데없이 에너지만 낭비할 뿐이다. 그런 의문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나 있을지 그조차도 알 길이 없었다.


우선은 뼛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물리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대충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재빨리 옷을 껴입은 나는 방 한쪽에 있던 이불을 가져와 꼬맹이를 덮어 주었다.


녀석은 움직이지 않은 채 얌전히 누워 있었다. 꽤 추운 모양이었다.


불쌍해라.


침대 위 담요를 몸에 두르고 나서 골리앗 옆으로 이동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토머스의 무덤가에 있던 노란 꽃을 떠올렸다. 꽃이 핀 것으로 보아 겨울은 아닌 듯한데, 이곳에서의 빗물은 매우 차갑고, 뼈까지 얼어붙게 할 만큼 잔혹하고 무자비했다.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걸 다 경험해 본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가만히 누워 있던 골리앗이 이불을 박차고 내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꼬맹이를 안았다.


콩콩. 작은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했다.


척박한 환경을 가진 이곳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멀리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러기 전에 여길 탈출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일부터 당장 이세계 탈출 작전을 벌이면 되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몸이 따스해졌다.


-에이취!


갑작스레 골리앗이 재채기를 했다. 애완견이 듣도 보도 못한 이런 개떡 같은 환경에 노출이 되었으니 몸에 무리가 갈 만도 했다.


그보단 좀비 출현에 대한 충격이 더 큰 것 같았다.


익숙해 져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생각하며 골리앗을 안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녀석은 버둥거리거나 짖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토머스의 무덤에 꽂아 놓은 노란 꽃이 점점 커지더니 팟! 하고 부풀어 올랐다.


요란한 소리, 그 사이로 수많은 좀비가 쏟아져 나왔다.


“으...”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떴다.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꿈이었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


겨우 좀비 한 놈 죽였다고 이런 꿈을 꾸다니.


만일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었더라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동안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골리앗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가끔 몸을 떨다가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처럼 못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천천히 골리앗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르륵, 다시 눈을 감았다.


네가 있어 다행이다, 요 녀석아.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 보다.


눈을 떴을 때 골리앗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쯤 몸을 일으키며 꼬맹이의 이름을 불렀다.


“골리앗?”


재빨리 바닥을 가로지르는 자그마한 발소리가 들렸다.


작은 사자처럼 보이는 골리앗이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삐죽삐죽 사방으로 뻗친 털 덕분에 골리앗의 모습은 더더욱 말썽꾸러기처럼 느껴졌다.


보면 볼수록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손으로 꼬맹이의 머리와 등을 마구 쓰다듬었다.


골리앗은 한동안 재롱과 애교를 떨며 침대 위를 마구 뛰어다녔다.


마치 재밌는 놀이에 빠진 아이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신 골리앗의 털을 매만지거나 배를 간질이며 낄낄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녀석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마냥 귀엽기만 하던 골리앗의 눈빛이 돌변해 있었다.


배고파. 밥 줘. 안주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놀이는 끝났다.


어쩌면 난 골리앗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는 시간을 최대한 미루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말이다.


조금 더 누워 있고 싶다는 욕구를 물리치며 얼른 방문을 나섰다.


밤새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온몸이 무겁고 축 늘어졌다. 무자비하게 내리꽂히는 차가운 비를 맞아 그런 것 같았다.


그런 나와는 달리 골리앗은 몸에 힘이 넘쳐 보였다. 삐죽삐죽 솟아오르고 여기저기 잔뜩 엉킨 털 때문인지, 난폭한 야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차라리 야수가 되어라. 그래서 빌어먹을 좀비들을 싹 다 없애 버리렴.


곧장 거실로 향했다.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램프의 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 빛을 뿜어내는 마술 램프와도 이젠 작별해야 할 시간이었다.


토머스가 원한대로 그를 땅속에 묻었고, 먹을 것과 물도 챙겼으니 이젠 가야 한다.


떠나기 전에 우선 뭔가를 좀 먹어 둬야만 했다.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은 여전히 우중충, 찌뿌둥, 칙칙한 하늘빛이었다.


이곳에선 맑고 파란 하늘은 볼 수가 없었다. 폭풍우 아니면 탁하고 흐린 잿빛 하늘이 전부였다. 아니면 재앙의 징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음울한 붉은 빛이거나.


우르르 몰려다니던 좀비들은 없었다. 몽땅 어딘가를 향해 가버린 걸까?


바닥에 앉아 배낭 속에서 육포를 꺼내 들었다.


조용히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골리앗이 빨리 먹을 걸 달라고 조르며 난리를 피웠다.


-깡깡! 꿍!


-쉿!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골리앗은 먹이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깟 좀비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더 큰 소리로 맹렬하게 짖을 태세였다.


“기다려.”


재빨리 육포 조각 두 개를 던져 주었다.


골리앗이 냉큼 그것을 물고 저만치 가더니 자리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육포 한 개를 꺼내 입안에 넣고 씹었다.


고기 조각이 이빨에 잘게 부서졌다.


지금껏 참고 있던 배고픔이 몰려들었고, 내 손은 또 다른 육포 조각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 사이.


순식간에 먹이를 다 먹어 치운 골리앗이 쪼르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더 달라고 짖기 전에 서둘러 하나를 더 주었다.


그 뒤로도 나와 골리앗은 육포를 더 먹어 치웠고, 3분의 1쯤 남았을 때 가까스로 그것을 배낭 안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만. 한꺼번에 다 먹으면 여기서 굶어 죽을 수도 있어.”


입맛을 다시며 분노가 서린 눈길로 날 쳐다보는 꼬맹이를 향해 엄숙하게 말을 내뱉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밖은 이제 완전히 날이 밝아 있었다.


그래 봤자, 창백하고 희뿌연 빛이긴 하지만. 좀비들은 저 빛조차도 싫어하는 것 같았다.


“가자.”


배낭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이 좋으면 오늘 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곳에서 발 뻗고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얻은 내 집에서 말이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골리앗을 안아 배낭 속에 집어넣으려다 그만두었다.


좀비들의 발에 밟힌다면 그대로 등뼈가 박살 나 버릴 것처럼 자그마한 녀석이었지만, 골리앗이 힘을 기르려면,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혹여라도 내가 사라졌을 경우 홀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강하게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어느 때 좀비들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때를 위한 대비책이었다.


골리앗은 씩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매우 용감하게도 앞장까지 서면서.


1층에 도착한 뒤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유리문 밖에 뭐가 있는지 살폈다.


이 짓도 이젠 지겹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어차피 내게 벌어질 일이라면 여기서 이렇게 주춤거리고 있건, 밖으로 나가 앞으로 돌진을 하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거라 생각했다.


골리앗이 살랑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잔뜩 설렌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우린 지금 큰 위험에 놓여 있어. 그러니까 쉿! 조용. 알겠지?”


갑작스레 골리앗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내 말을 100% 다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래 까짓거. 좀비건 뭐건 간에 부숴 버리면 되는 거다.


몸에 지닌 무기라곤 토머스가 남긴 나이프가 전부였지만. 내겐 골리앗도 있고, 단단한 주먹도 있고, 튼튼한 다리도 있고.


또 뭐가 있더라? 지치지 않는 용기? 밟아도 밟아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기 놀이가 매우 지루하다는 듯 꼬맹이가 길게 하품을 했다. 진지하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천의 얼굴을 가진 녀석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자.”


우린 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빌어먹을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걸음을 옮겼다.


***


누군가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있는 절대적인 권력자인 그는 죽음의 사신보다 어둡고 파충류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긴 어둠과 함께 시작된 그는 이세계의 태양이 떠오르고, 피처럼 붉은 달이 사방을 비추는 밤이 될 때까지. 모든 생명, 숲과 바람과 발밑을 구르는 자그마한 먼지와 허공 위로 치솟는 보이지 않는 빛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늘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저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죽여야 하는지 살려야 하는지. 아니면 조금 더 가지고 놀아도 되는지. 궁리라도 하는 것처럼.


피 묻은 황금 의자에 앉아 한 손엔 지팡이를 든 채, 언제 그것으로 바닥을 내리쳐 사방 모든 것들을 파멸에 이르게 할 건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기라도 하듯.


...조용히 웃음 짓고 있었다.


더없이 사악하고 차갑고 음흉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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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데빌의 정체 2 24.09.15 8 1 13쪽
20 데빌의 정체 24.09.14 8 1 13쪽
19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 24.09.13 10 1 14쪽
18 또 다른 이세계 방문자 24.09.12 8 1 13쪽
17 깜짝 파티 24.09.11 9 1 13쪽
16 회전목마 아이들 2 24.09.10 8 1 12쪽
15 회전목마 아이들 24.09.09 11 1 13쪽
14 이세계 편의점 24.09.08 10 1 13쪽
» 토머스의 수첩 4 24.09.07 11 1 12쪽
12 토머스의 수첩 3 24.09.06 9 1 14쪽
11 토머스의 수첩 2 24.09.05 12 1 13쪽
10 토머스의 수첩 24.09.04 12 1 12쪽
9 은신처 2 24.09.03 11 1 12쪽
8 은신처 24.09.02 12 1 13쪽
7 웰컴 투 헬 2 +1 24.09.01 17 1 12쪽
6 웰컴 투 헬 +1 24.08.31 19 2 14쪽
5 그것들 2 +1 24.08.30 18 3 13쪽
4 그것들 24.08.29 25 3 13쪽
3 엘리베이터를 타고 2 +1 24.08.28 35 3 12쪽
2 엘리베이터를 타고 24.08.27 42 3 14쪽
1 쇠망치를 들고 뭘 하겠단 걸까 24.08.27 6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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