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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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내기
작품등록일 :
2016.03.15 00:05
최근연재일 :
2016.04.10 07:3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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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3,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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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5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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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감금-8

DUMMY

그즈음 그는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통풍은 잘 되는 모양이나 거센 바람도 불지 않으니, 그저 간단한 경단 쪼가리를 놓는 것만으로도 구분이 되었다. 하루는 그가 자고 일어난 뒤를 기준으로 삼았다. 경단이 다섯 개 모이면 다시 하나로 교체하고, 또 열 개가 모이면 하나로 교체해서. 최소한 몇 날이 흘렀는지라도 알아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는 포기해야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쯤 걸림돌이 되기 시작한 것은, 천화에 대한 원망이 조금씩 줄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악녀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고문도, 무엇보다 그녀가 그토록 그를 그런 곳에 오래 가두어 놓는 것도. 그녀의 악행은 세상이 증명하고 있었고 그의 가문은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의 가문에 대해 그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저, 세간의 소문으로 예천가의 문주가 추악하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개입했다는 사건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런 류의 소문에 매우 어두웠던 그였다.

그래도 자신처럼 그녀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문주라고는 하지만. 악녀라고는 하지만 그의 가문이 멸문했을 때, 그녀가 정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까? 그녀를 보필하는 자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녀를 직접 만나고부터.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고문당하면서도 그것이 의문스럽기는 했다. 직접적인 확신은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가한 짓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게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원망을 가질 수 있는 일이지만, 그가 그곳에 갇힌 후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그것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의 감이 틀렸다면.

어쩌면 정말로 그녀가 자신의 원수가 아니라면. 모든 것이 그의 오해라면.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그녀의 술수일 확률도 높았다. 과정이 어떻든 그녀에게 넘어가 신세를 망친 남자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자.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 때, 발소리가 들렸다.

‘또 시작인가.’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데 발소리가 심상찮았다. 걷는 소리가 아니라 숫제 달리는 소리였다. 소리는 아주 금방 그가 갇힌 곳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철창 밖을 보니 그녀가 씩씩대며 괴이한 광주리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그녀는 대답 대신 철창 문을 열었다. 그는 은근히 그 문이 자주 열린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있는 한 저 철창이 아예 없더라도 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그녀는 문을 바로 잠가버리고 성큼 그의 앞까지 오더니 그녀가 주었던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찰랑대는 소리가 났다.

“하나도 마시지 않았구나.”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영문을 모르고 대답했다.

“마시지 않겠다 하지 않았소.”

“그래도 예의상 조금 먹을 수는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예의도 있소?”

그녀는 다시 대답대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광주리를 뒤집어 안에 든 것을 몽땅 쏟아냈다.

그는 화들짝 놀랐다. 안에 든 것은 모두 술이었다. 그것도 종류가 다 달랐다. 수십 병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럼 명령이다. 마셔라.”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명령도 있소?”

“내 명이라 하지 않았느냐!”

꼭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은 어조였다.

“마시기 싫소. 강제로 먹인다면 먹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녀는 그를 째려보고 그녀가 요전에 주었던 술병을 들었다. 그리고 주둥이를 따더니 병째 들이켰다.

“커어.”

그는 전설 속의 생물을 보는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됐느냐. 너도 마셔라.”

“소저가 마시는 거야 자유지만.......아니 안 마신다 하지 않았소.”

“그럼 구경이나 해.”

돈 주고 신기한 광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주둥이를 따고 들이키는 술은 분명 엄청나게 독해보였다. 흘긋 맡는 냄새로도 느껴졌다. 그녀가 병나발을 부는 술이 한 병, 두 병, 세 병, 네 병이었다. 언제까지 들어가나 궁금하던 차에 그녀가 다섯 병째로 마시던 술을 그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설마 내가 먹던 것도 의심되느냐?”

“.......솔직히 더럽소.”

“뭐?”

그녀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의 꼴이 더 더럽겠다 싶었다.

그는 조금 주저하다 그녀의 손에서 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들이켰다.

불이 목구멍에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크으.”

“죽이지? 너무 독한가?”

독하긴 해도 그 전에 마셨던 술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다. 그는 예상 밖의 주량으로도 유명했다. 너무 오랜만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끄떡없소.”

“용을 쓰는구나. 그럼 이것도 마셔보아라. 네가 맨 정신으로 입을 나불거릴 수 있는 지 두고 볼 것이야.”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건네는 천화도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듯 바라보고는 병을 들이켰다.

이번 것은 더 쓰되, 더 달았다. 그가 병을 비우자 천화가 박수를 쳤다.

“예쁘게 잘 마시는구나.”

정말 순수하게 웃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천화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요?”

“내 너와 놀고 싶었다.”

그녀가 기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다시 무뎌지는 것을 다잡기 힘들었다.

“그걸 믿으라는 거요?”

“또. 또. 똑같은 소리구나.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말해주겠다. 네 녀석을 술에 절어버리게 하려고 왔다. 술에 중독되어서 술 없이는 못 살게 만들어주마.”

“어린애 같은 간계는 그만두시오. 갈수록 영문을 모르겠소.”

“마셔라.”

그녀는 그에게 다른 병을 건네고 바닥에 흩어진 병을 또 따서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다 무슨 일이 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취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병을 두 손으로 잡은 채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오만 생각이 다 났다.

“좋구나.”

“그만하시오. 많이 취했소.”

“취하긴 누가 취했다고 그러느냐. 내 주량은 잘 안다. 아직 멀었다.”

말은 애써 멀쩡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으나, 몸이 비틀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너는 안 마실 테냐.”

그녀가 병을 또 비웠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두시오.”

“벌써 말이냐.”

“나도 먹지 않겠소.”

그녀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계속 대치했다.

갑자기 그녀가 양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무슨 일이오.”

꽁.

이마가 얼얼했다. 가벼운 박치기였다. 아픔보다도 정신적인 혼란이 더 컸다.

“따끔한 맛을 보았느냐. 재미없는 녀석.”

그녀는 쫓기는 듯 방을 나서더니 철문을 쾅 하고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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