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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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9.0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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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53,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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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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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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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류아

DUMMY

먼저 다른 장로들에게 전해 둬야할 말이 있다며 레야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밖에서 잠깐 고성이 오가는 것 같았지만 금세 돌아온 레야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다 어딜 간 건가요?”


방을 나오자 다른 장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의아하게 여겼는지 스키잔이 물었다.


“걱정할 필요 없답니다. 별개로 처리해야 할 다른 안건이 있어서요. 그보다 안내인의 소개를 해드려도 될까요.”


레야의 뒤에서 여동생 뻘은 되어 보이는 엘프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이 섬의 누구보다 숲의 지리를 잘 아는 아이입니다. 찾고자하시는 곳까지 문제없이 길을 안내해 줄 테지요.”

“전이로 바로 이동할 수는 없는 건가?”

“설명을 깜박했네요. 그곳은 상급 전이 마법도 막혀있는 곳이랍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길에 제일 익숙한 안내인을 준비했습니다.”


레야는 몸을 살짝 비키며 자신 뒤에 서있던 소녀를 드러냈다.


“자, 류아. 마왕님께 인사 드려야지.”

“안녕하세요. 류아, 라고 합니다...”


류아라는 하이엘프 소녀는 역시 긴장했는지 살짝 말을 더듬었다. 긴장할 수밖에 없겠지. 이제 그런 반응에도 익숙해진 나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야, 안내인을 따로 준비했다는 건 너는 따라오지 않겠다는 건가?”

“예, 방금 말씀드린 다른 안건으로 살짝 골치 아픈 일이 되어서요.”


위그드라실의 잔재는 하이엘프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신성한 거라고 끈질기게 강조한 것치고는 무른 대응이었다. 최소한의 감시는 붙일 줄 알았지만 그게 여자아이 하나라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나를 신용하고 있다는 태도를 취한 것엔 감사를 표하지.”

“정말 솔직하면서도 상냥하신 분이시네요. 별로 걱정은 하고 있지 않답니다, 가서 보시면 바로 아실 거예요.”


레야는 웃으면서 절을 한번 하더니 류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안내해드려, 류아. 나는 슬로겐 달래주고 있을 테니까.”

“아, 알았어!”


의욕만은 넘치는 대답을 들은 레야는 우리를 남겨두고 중앙회관에서 나갔다. 마왕과 그 수하들의 안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조금 거북해 보이는 류아는 헛기침을 했다.


“그, 들으신 대로 여러분의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예정에 있진 않았지만 레야 언니에게 설명은 대략 다 들었으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외부 사람을 만나는 게 처음이라...”

“길 안내만 제대로 해주면 상관없다. 그런데,”


나는 류아가 꽤 두꺼운 외투를 들고 있는 걸 보았다.


“여긴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은 것 같다만, 너희 종족은 추위를 잘 타는 건가? 섬 주위 바다를 얼린 마법은 가브리엘이 아까 해제했을 텐데.”


이미 섬에 들어온 이상 방위마법을 계속 무력화시켜둘 필요는 없었으니 섬을 둘러싼 얼음은 사라진 채였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걸 당연하게 여겼는지 류아는 웃었다. 아무래도 긴장을 조금 푼 것 같았다.


“저희가 지금부터 갈 곳은 칼란츠. 섬에서도 제일 추운 곳이랍니다. 보온 마법을 쓴다 해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예요. 아 참, 여벌의 옷이 있는데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류아는 뒤에 맨 천 꾸러미를 두드려보였다.


“그럼 가볼까요, 마왕님.”


그렇게 큰 면적의 섬이 아닌데도 급격한 온도 차이가 나는 지역이 있다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회관을 나오자 구경하는 것처럼 몰려있던 하이엘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역시 마왕님을 직접 뵙는 게 신기한 모양이라...”


부끄러운 듯 류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무심하게 둘러보다 구경꾼 무리에 남은 소년 하나가 이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류아도 그걸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는 사이인가?”

“네. 소꿉친구 같은 거예요. 80년은 알고 지냈으니까요.”


나이를 느리게 먹는 하이엘프 인만큼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소녀가 나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는 걸 알고 나자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라이는 참 걱정도 많다니까.”


작게 중얼거린 류아는 걸음을 재촉했다. 보는 듯 안보는 듯 우리를 힐끔힐끔 보는 인파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앞서 들은 설명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칼란츠까지 가려면 숲길을 걸어야했다.


흘러가는 것처럼 이동하는 스키잔이나 본래 산행에 익숙한 카니앗, 그리고 가브리엘은 당연한 것처럼 몸을 공중에 띄우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릴 적 뛰어놀던 경험 덕분에 나도 웬만한 산길은 문제없었으니까.


어딜 봐도 다 똑같은 숲이었지만 류아는 마치 자기 앞마당인 것처럼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간혹 가다 나무에 박혀있는 광석을 만져 빛나게 하는 건 만일의 경우 길을 잃지 않기 위한 표식이자 마수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엘프의 숲다운 장치라고나 할까.


“이런 섬에도 마물이 있다니... 엘프의 성역인데도.”


카니앗이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하자,


“마나가 밀집된 곳일수록 마물이 발생하기 쉬우니까요. 저도 크게 보면 기원은 별 차이 없고요.”


스키잔은 대수롭지 않다는듯 설명해주었다.


한편, 나는 거친 산길이 주변에 널려있는데도 나름 길처럼 트인 곳으로만 안내하는 류아에 감탄하고 있었다. 한두 번 다녀본 솜씨가 아니다.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건 거북한지 우리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게 전부였지만, 오랜 침묵 끝에 드디어 지쳤는지 질문이 날아들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한가지 여쭤도 될까요?”

“사양할 필요 없다.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봐도 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라면 답해주지.”


내 반응에 힘을 얻었는지 류아는 잽싸게 물었다.


“마왕님께서는 무척 강한 힘을 가지셨다고 들었는데... 그게 정확히 뭔가요?”


카니앗과 스키잔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안내인 역할의 하이엘프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올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겠지. 일단 예의를 갖추고는 있지만 이 아이, 사실 굉장히 외향적인 성격은 아닐까.


“어둠 속성 마법에 조금 재능이 있는 것뿐이다. 별 것 없어.”


일단 내 고유스킬에 대한 것은 빼놓고 말해주었다. 아직 하이엘프가 확실한 아군으로 들어온 게 아니니 이쪽이 가진 패를 전부 보여주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진실을 전부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건지 류아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런가요...”


역시 더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게 역으로 거북해진 나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까 장로의 말에 따르면 네가 숲을 제일 잘 안다고 하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마왕이 자신에게 개인적 질문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류아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섬은 너무 좁으니까요. 단지 그뿐일 이야기예요.”


좁다는 것에 꽤나 강조가 들어가 있었다. 하긴 몇 십 년을 살았으면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조금 더 걷자니 류아가 알아서 말을 이어갔다.


“회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야 언니라면 분명 잘 해냈겠죠. 그렇지 않나요?”


하이엘프의 조력에 대한 거라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선으로 긍정하자 류아는 들떠 말했다.


“저, 기회가 된다면 마왕군에 들어가려고요.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 걸 제 눈으로 보고 싶어요.”


그 말로 류아가 어떤 마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이엘프가 살아가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진 섬이었지만 이곳에 속박당하는 건 싫다는 것이겠지.


그 복잡한 고민은 마음의 깊은 구석에 자리 잡아 천천히 몸을 갉아먹는다.


그래. 나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도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경험자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자유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갖춰진 세계는 아름다운 새장과 다를 게 없다. 아무리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가 간섭하지 못하는 세계는 회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정은 인족에게 승리를 거두려는 대의 때문인가? 아니면 단지 섬 밖을 나가보고 싶을 뿐인 건가.”

“그건...”


류아가 말을 흐린다.


정곡을 찔린 것이겠지. 하지만 마왕 앞에서 마왕군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인정해버리면 엄청난 결례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입에 발린 소리를 쉽게 하는 성격도 아니겠지.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류아는 선뜻 답하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아니, 주저했을 터인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후자가 더 클 거예요.”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인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는 마왕님에 대한 걸 소문으로밖에 듣지 못한 걸요.”


류아는 그리 말하며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제가 들은 소문이 사실이라면요. 증명해주시길 기대할게요.”

“... 마왕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건 용납하지 않아.”


선을 넘었다고 판단했는지 카니앗이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됐다, 카니앗.”


하지만 너무 솔직한 하이엘프 소녀의 처우보다도 먼저 걱정해야 될 게 생겨있었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 흰 꽃을 하나 꺾었다.


얼음이 똑,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첫눈처럼 새하얀 꽃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 같은 얼음조각이다.


“식물이 언 게 아니군.”


나는 그리 평가했다.


꽤 걸었다고 한들 숲의 온도도 아까에 비해 이상할 만큼 낮아져 있었다. 류아의 태도를 문제 삼은 카니앗의 몸에도 어느새 보온 마법이 걸려있었으니까.


“이런 건 단지 춥다고 해서 발생하는 게 아니야. 마법으로 인해 생겨났겠지. 그러면 우리의 목적지는 이 앞이겠군, 류아?”


고개를 끄덕이고 앞을 가리키는 류아. 그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숲을 빠져나가는 작은 틈새가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내가 발을 내딛자, 우거진 숲이 아닌 희푸른 설원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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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노트북이 고장나서 잠시 휴재합니다 +3 19.06.18 830 12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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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대(對)인간병기 +1 19.06.01 809 17 11쪽
44 전쟁의 피스 +1 19.05.30 818 17 11쪽
43 밤하늘 +1 19.05.26 879 21 10쪽
42 신화의 괴물 +2 19.05.25 916 20 11쪽
41 선전포고 +3 19.05.22 957 24 10쪽
40 헬하운드와 펜리르 +1 19.05.19 976 19 11쪽
39 카니앗 이그ㆍ시 피아 +2 19.05.17 944 23 8쪽
38 다크엘프 +2 19.05.16 1,024 22 10쪽
37 시찰 +1 19.05.12 1,016 23 9쪽
36 목적과 이유 +2 19.05.11 1,075 24 9쪽
35 전쟁의 준비 +4 19.05.09 1,142 24 9쪽
34 네이아르 백작 +2 19.05.06 1,168 29 10쪽
33 죄의 운반 +2 19.05.05 1,209 29 9쪽
32 유일한 생존자 +7 19.04.25 1,234 32 10쪽
31 앞으로의 연재 공지 및 1권 후기 +3 19.03.25 1,476 21 1쪽
30 모두 죽었다 +4 19.03.25 1,450 35 8쪽
29 피의 연회가 열렸다 +3 19.03.24 1,427 38 10쪽
28 명령을 내리다 +4 19.03.23 1,405 35 8쪽
27 연회는 시작되려고 했다 +2 19.03.23 1,462 37 9쪽
26 선배의 텃세는 통하지 않는다 +2 19.03.22 1,418 34 8쪽
25 한밤중의 불청객이 찾아오다 +6 19.03.20 1,540 36 9쪽
24 이제 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19.03.20 1,478 36 8쪽
23 금의환향하다 +3 19.03.19 1,545 38 8쪽
22 모두 붉게 물들었다 +4 19.03.18 1,539 37 8쪽
21 던전의 주인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 19.03.17 1,547 37 8쪽
20 한때 사람이었던 것을 만나다 +3 19.03.16 1,578 38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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