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의 정석, 발 밟기는 패시브 스킬이지!
정원은 생각보다도 더 예뻤다.
어떤 정원사가 가꾼 것인지 향기조차도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서로의 향을 방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마음에 드나 보군.”
“네!”
카이델의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정원 정중앙에는 정자가 마련되어 있어 앉아 쉴 수 있게 되어있었다.
나는 카이델의 뒤를 따라 정자로 향했다.
“차나 커피를 마셔본 적 있나?”
으음.
내가 살던 세계랑 같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정한 작가가 지구의 사람인데.
“아마도요···?”
그래도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원작에서는 음식의 맛이나 음료의 맛은 거의 기술··· 됐던가?
그런 건 거의 패스해버려서 잘 모르겠다.
카이델은 엷게 웃더니 정자에 달린 긴 끈 같은 걸 당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정자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 부르셨습니까, 폐하. ]
헉.
대박.
이게 뭐야?
마법이라는 건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카이델이 약간 웃음을 터뜨렸다.
“다과를 준비하라.”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카이델도 나도 알고 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과가 날라져 올 것을.
“그대는 옷에도 장신구에도 흥미가 없는데 꽃에는 흥미가 있나 보군.”
“꽃은 예쁘니까요.”
나도 예쁜 건 좋아한다.
옷도 장신구도 예쁜 걸 보고 있으면 기분은 좋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걸치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내가 못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쁜 것도 아니다.
길거리에서 번호 한 번 따여본 적 없는 그냥 그런 보통 여대생.
그런 내가 때 빼고 광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대도···.”
카이델이 뭔가를 말하려다 움찔, 몸을 움츠렸다.
하하.
바보도 아니고 뒷이야기가 뭔지는 안다.
문제는 그건 내가 예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속성의 힘일 뿐이지.
그 속성의 힘을 걷어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여대생이다.
“그대는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는가?”
카이델은 화제를 바꿨다.
그 얼굴이 빨갛지 않았다면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하얀 꽃은 뭐든 다 좋아합니다.”
나는 정자 바로 옆에 있는 하얀 꽃의 군락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양의 특이한 꽃이다.
마치 장미처럼 소용돌이치는 듯한 모양인데 꽃잎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 묘한 모양의 꽃은 마치 화장지로 만든 것처럼 보드라웠다.
게다가 은은한 향이 난다.
마치 재스민처럼.
하얀 꽃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나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결백한 느낌이 드니까.
“폐하는 어느 꽃을 가장 좋아하십니까?”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이델이 또 생각에 잠겼다.
뭔가 물어볼 때마다 일일이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대답하지를 못하나.
아니면 카이델 자신도 스스로가 뭘 좋아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나처럼.
“그렇군···.
나는 붉은 꽃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특히 저 화향화를 좋아하지.”
카이델의 시선이 멀어진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꽃이 보였다.
주홍과 주황과 적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
확실히 아름답지만 묘하게 불길한 색이다.
“마치 불꽃 같은 색이지.
전장에 서 있다 보면 종종 저 꽃이 떠오른다.”
카이델은 언제부터 전장에 나갔던 걸까.
물어봐도 되나?
으음.
“나는 17살 때부터 전장에 나갔다.
그 전에도 나는 나가고 싶어했지만 선왕께서 만류하셨지.
그리고 전장에 나가서야 알았다.
왜 선왕께서 그리 나를 말리셨던 것인지.”
카이델의 눈에 어둠이 깔린다.
사람을 죽였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사람이 죽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일까.
어느 쪽이건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나는 슬쩍 카이델의 옆에 앉았다.
카이델의 눈은 화향화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닥토닥.
카이델의 팔을 살짝 토닥여 주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보면 왕의 옥체에 손댔다고 댕강댕강 잘리고,
판타지에서도 왕의 몸에 함부로 손댔다고 댕강댕강 잘리긴 하더라만···.
뭐 설마 반한 여자를 죽이기야 하겠어.
“···.”
카이델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를 돌아본다.
루비 같던 눈동자는 지금은 마치 지옥 불을 담은 유리 공 같다.
이것이 카이델의 광기의 근원이겠지.
“폐하, 저는 전쟁을 겪어본 적 없어서 감히 그 심정을 헤아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폐하가 지켜낸 백성들을 생각하세요.
이 나라는 폐하가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을 담아
그렇게 이야기했다.
카이델의 눈이 나를 꿰뚫는다.
보여선 안 될 것까지 보일 것 같아 눈을 피하려 했지만,
그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가까워지는 걸 보면서도 나는 피하지 못했다.
“···.”
파삭, 하는 인기척에 정신이 들었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시녀 하나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다과를 가져 왔습니다.”
나는 카이델에게서 떨어졌다.
카이델의 손이 조금 전까지 내가 짚고 있던 팔로 향한다.
그리고 뭘 생각하는 것인지 생각에 잠긴 눈으로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시녀는 이동식 트레이를 돌돌 굴리며 다가왔다.
왜 저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갑자기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와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에서 가장 화사한 장소에 걸맞은 화사한 다과였다.
3단으로 이루어진 접시에는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과자와 빵이 즐비했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차의 향기가 탁자 위를 수놓았다.
내가 다과를 멍하니 바라보자 카이델이 먼저 찻잔을 들었다.
나도 덩달아 찻잔을 들어 향기를 음미했다.
차는 잘 모르지만 은은한 향이 콧속을 간질인다.
가끔 먹었던 싸구려 홍차나 녹차랑은 차원이 다르다.
꽃의 향기와 섞여서인지 달콤함과 고소함이 적절하게 섞인 듯한 향.
음.
맛있다.
사실 맛은 좀 써서 내 입에는 안 맞지만,
그래도 방금까지 콧속을 메우고 있던 향이 입안에도 가득 퍼진다.
그 향 때문에 맛있다고 느껴졌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대가 그토록 편안하게 웃는 것은 처음 보는군.”
카이델이 조금 가시 돋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세상에.
이 남자야.
지금 차한테도 질투하는 거니···.
“폐하와 함께 마시는 차라 더 각별한 것 같네요.
원래 쓴 것은 잘 못 먹는데 달콤해서 맛있습니다.”
웩.
내가 말하고도 좀 그렇다.
그래도 카이델에게는 직빵이었는지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 뭐하나.
귀가 빨간데.
나는 씩 웃고는 차를 마셨다.
살랑이는 바람과 향긋한 공기.
맛있는 차와 과자.
그리고 옆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어쩌면 많은 여성이 꿈꾸는 상황 속에 내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나의 현실로.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
“윽.”
카이델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벌써 열다섯 번째.
내가 카이델의 발등을 밟은 횟수다.
처음에는 거의 반응도 보이지 않던 카이델의 얼굴에 점점 땀이 서리기 시작한다.
···.
어쩐다.
“저기, 폐하?
힘드시면 좀 쉬었다가···.”
카이델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플 텐데.
일의 발단은 무도회의 화제가 나오면서였다.
“무도회에서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그대는 한 번도 무도회에 가 본 적이 없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살던 세상의 무도회라면 클럽 정도일 테지만,
그런 델 귀찮게 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갈 거라면 차라리 집에서 소설 하나 더 보고 말지.
“설마 저도 춤을 춰야 하나요?”
···어···.
카이델의 침묵에서 느껴진다.
나랑 춤추고 싶었구나.
근데 난 아예 몸치라 절대 무리다.
게다가 내일인데.
“···저, 춤은 아예 출 줄 모릅니다.”
혹시나 해서 못을 박았다.
카이델이 침묵한다.
“진짜로 하나도 못 춰요.”
진지한 내 눈빛에 카이델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이해한 건가!
“그럼 내가 가르쳐 주도록 하지.”
···.
네?
이런 연유로 지금 맹연습 중이지만, 문제는 역시 나다.
나로 말하자면 체육 시간에 배우는 체조도 제대로 못 춰서 선생님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가 짧은 시간 동안 카이델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춤을 출 수 있게 될 리가···.
처음에는 반쯤 자포자기였다.
어차피 몇 번 하다가 말겠지.
하지만 현재 열여섯 번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이상 계속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카이델 때문에 춤을 못 추게 될 것 같은데···.
나는 카이델의 발등을 바라보았다.
으음.
내가 무술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사람의 발등을 단련할 수 있을까?
어렵겠지···?
그럼 아무리 가죽 신으로 둘러 싸여있어도 저 아래에는 지금쯤 시퍼런 멍이···.
“···!”
아차.
카이델의 발을 바라보느라 또 박자를 놓쳤다.
아까 내가 말한 게 신경 쓰였는지 이번에는 신음성조차 내지 않는다.
그렇게 강한 척할 때가 아니잖아, 이 남자야!
통상 열여섯 번째 실패.
그리고 저 발은···.
으으···.
“폐하.
제가 힘들어서 안 되겠습니다.
좀 쉬어요.”
그제야 카이델은 내 손을 놓았다.
으아, 손이 땀투성이···.
손발이 찬 내가 땀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으니 이건 다 카이델의 땀이겠지.
더럽다기보다는 안쓰럽다.
그렇게까지 나랑 춤을 추고 싶은 건가??
카이델은 발이 꽤 아팠는지 곧바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저럴 거면서 센 척은···.
“폐하···.
춤은 다음 무도회에서 같이 추면 안 될까요?”
카이델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얼굴의 표정에서 느껴진다.
어떻게든 나와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싶다는 의지가.
“···.”
데바인이 조용히 다가와 카이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아마 나 때문에 준비해뒀던 것 같지만 나보다 카이델이 더 필요해 보였겠지.
나는 데바인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쩍 눈짓으로 카이델의 발을 가리키자 데바인이 어설프게 웃었다.
하긴.
데바인인들 말릴 수 있겠나···.
“아, 혹시 데바인은 춤출 줄 아나요?”
시종장의 직책이란 일반 시종과는 다르다.
로맨스 판타지 중에서는 시종장이 궁중 예법을 여주인공에게 가르쳐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이상했다간 진짜로 카이델의 발등이 내일은 퉁퉁 부어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태는 피하고 싶다.
“출 수는 있습니다만···.
폐하만큼 좋은 강사는 될 수 없겠죠.
폐하께서는 문무 모두 이 나라의 최고에 서 계신 분이니까요.”
···.
데바인···.
제발요···.
나는 눈빛으로 말했다.
데바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이제 정사를 보러 가실 시간이시니,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가르쳐 드려 보겠습니다.”
···.
아니, 이 남자야.
춤 배운다잖아.
근데 왜 표정이 그런데···.
내가 춤을 배울 수 있다는 것과,
남에게 내가 춤을 배워야 한다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던 카이델은 이내 결정했다.
“···부탁하지, 데바인.”
내가 춤을 배우는 쪽을.
···.
차라리 반대를 선택해주지.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카이델은 미련이 남는 듯 계속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손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으아, 덥네요, 따위를 이야기하면서.
오래 지나지 않아 카이델은 포기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시간을 오래 지체했군.
그대에게 맡기겠네, 데바인.
그리고 저녁에는···.”
“아샤님을 모시고 만찬장으로 가겠습니다, 폐하.”
카이델은 문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나를 돌아봤다.
윽.
그렇게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최대한 예쁜 웃음을 지으며 카이델에게 눈인사를 했다.
카이델이 나간 후에 소파 위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리고 데바인의 헛기침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차, 데바인은 안 갔지.
“데바인도 나가봐도 돼요.”
···.
어?
저기, 데바인.
대체 왜 외투를 벗는 거죠···?
“아샤님.”
뭔가 잘못되어간다.
나는 소파에 바르게 앉아 데바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데바인은 청천벽력같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는 폐하처럼 무르지 않습니다.”
···.
설마 진짜 나 춤 가르치려고요···?
아니, 데바인도 봤잖아요, 방금까지!
나 몸치인 거 봤잖아!
“···!”
“저는.”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데바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얼굴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폐하께 약속했습니다.
아샤님께 춤을 알려드리겠다고.”
···.
그 부드러워 보이던 데바인이 갑자기 악마로 보인다.
그렇게 나는 종일 춤 연습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데바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
그는 악···ㅁ···,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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