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로맨스의 정석, 노려지는 여주인공.
“···.”
카이델의 표정이 심각하다.
다만 왜인지를 모르겠다.
오늘 아침은 늦잠을 잤다.
평소라면 아침을 먹을 시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밥도 못 먹고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했다.
귀찮아서 샤워는 패스하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폐하···?”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데, 카이델이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일어나지 못하고 물끄러미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카이델의 눈이 괴로워 보인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뭐가 있었던 것일까.
원작에서는 무도회가 끝난 뒤에 은화와 카이델은 거의 항상 붙어있었다.
은화가 3일간의 무도회를 거치면서 다양한 남자주인공 후보들을 알게 되고,
카이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집착과 질투에 미쳐 은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 지금과는 전혀 전개가 달랐다.
지금의 카이델은 자잘한 질투를 보이기는 하지만 내게 집착하지는 않는다.
매일매일 제대로 정사를 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카이델의 상황을 읽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이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카이델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랑 관련 있는 일인가?
그렇다는 건 어쩌면···.
“폐하,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가요?”
카이델의 눈동자가 커진다.
저 반응을 봐선 역시나 내가 관련된 문제인 것 같다.
원작소설에 비춰봤을 때 몇 가지 예상이 가긴 한다.
첫째는 왕국 내에 플라티나 공주와 카이델의 혼인을 지지하는 자들.
카이델은 본래 여자에게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던 남자다.
심지어 저 플라티나 공주를 앞에 두고도 심드렁할 만큼.
그런 카이델이 이상할 정도로 흥미를 보이는 나는 그들에게 있어 눈엣가시일 것이다.
은화의 경우, 카이델의 집착 폭발로 무도회 둘째 날부터 암살자를 맞이해야 했다.
그게 싫어서 처음부터 다른 남자와 엮이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해왔다.
하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도회가 끝난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와는 거의 매일 만나지만, 플라티나 공주와는 3회도 채 만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냐면,
당연히 내가 플라티나 공주와 만나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독자가 있어서 지금 이 상황을 봤다면 대충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델은 플라티나 공주를 만나기 위해 나를 데려간 것이 아니다.
나를 따라 플라티나 공주를 만나러 간 거지.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것을 높은 분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들이 움직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둘째는 외세와 손을 잡은 반란군.
끈질기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원작을 거의 흘려봤다.
그래서 이야기의 흐름은 대충 기억하지만 상세한 지명 같은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즉, 외세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외세가 어느 나라인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플라티나 공주의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뿐이다.
원작에서는 카이델이 완전히 폭군이 된 이후부터 반란군이 움직였다.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내가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얼추 생각해봤을 때 검은 머리 마녀에게 완전히 홀려버린 왕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모든 것을 정상화하겠다는 게 이유였지 않을까 싶다.
사실 지금 반란군이 움직일 이유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
혹시 모른다.
나 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머리 여자를 궁에 들인데다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나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정사를 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국력을 키우기 위해 제일 나은 선택인 플라티나 공주 대신 나에게 신경 쓰는 것,
그로 인해 플라티나 공주의 나라와의 감정이 험악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들 때문에 반란군이 조직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셋째는 이단 심문관.
차기 대주교라고 일컬어지는 라이안의 공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화의 검은 머리카락과 카이델의 변모로 인해 이단 심문관이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원작에서 본 카이델은 거의 왕궁에 붙어있는 날이 없는 남자였다.
넓은 지역을 다스려야 하는 왕의 숙명.
그는 끊임없이 각 지방을 순찰하며 왕권을 공고히 다지고,
귀족들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서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왕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약 12일째 왕성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매일 나에게 와서 1~2시간씩 시간을 보내면서.
그것이 이단 심문관들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려왔을 가능성도 있다.
내가 본 회차까지의 전개를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정도.
그리고 조금 전의 질문에 카이델이 보인 반응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은 첫 번째와 세 번째일까.
“아샤.”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째서인지 그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대는···, 그대는 어째서 나를 다 아는 듯한 얼굴을 하는 거지?”
카이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그렇겠지.
한 번도 자신을 드러낸 적이 없던 카이델이다.
그런 카이델이 왕으로서의 자신이 아닌,
남자로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첫 상대가 첫사랑의 상대이다.
원작에서는 그것이 은화였고, 지금은 나다.
나는 지금 카이델의 기분을 알고 있다.
평생을 감정을 숨기며 살다가,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읽으며 한발 앞서갈 때의 기분.
두려울 것이다.
무서울 것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
“나는 그대를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대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대는···, 그대는 혹시···.”
내 마음을 다 아는 건 아닌가.
왜일까.
카이델이 삼켜버린 마지막 한마디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카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이델은 가라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말해주어야 할까.
“···폐하.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는 제가 잘못되게 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죠?”
카이델의 붉은 눈동자가 루비처럼 반짝인다.
내가 봤던 그 불길한 붉은 빛이 아니라, 정말로 보석 같은 붉은 빛으로.
나는 카이델을 살짝 껴안았다.
“···!”
카이델의 몸이 흠칫, 떨렸다.
벌써 몇 번이나 닿고 있는데도 닿을 때마다 떨린다.
카이델에게 마음이 없는 나조차도 떨리는데, 카이델은 오죽할까.
나는 카이델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주며 입을 열었다.
“폐하.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될 겁니다.”
뭐, 여주인공인 이상 내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다.
물론 여차해서 실수하면 배드 엔딩롤이 뜰지도 모르지만.
이전에 떴던 배드 엔딩을 생각해 봐도 나는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응.
“내 뜻대로···.”
카이델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였다.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난다.
비릿한 피 냄새가.
*********
“무서워라···.”
성안이 소란스럽다.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평소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시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알고 있다.
카이델이다.
카이델은 아침에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미안하군.”
갑자기 찾아온 것에 대한 사죄일까.
아니면 거친 행동에 대한 사죄일까.
알 수 없는 사죄였다.
그 뒤에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카이델이 이단 심문관의 수장을 성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둘의 만남은 극비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델이 주변의 기사들을 불렀을 때 보인 광경 속
이단 심문관의 수장은 더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얼핏 본 시녀 하나가 여기저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진짜 마녀인 거 아니야?”
이단 심문관 쪽이었나.
나는 살짝 열었던 문을 닫았다.
“···.”
평소라면 소란스럽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연신이 조용하다.
슬쩍 보자 얌전히 티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괜찮아?”
연신이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엷게 웃어 보이곤 연신이의 반대편에 앉았다.
솔직하게 괜찮지 않다.
나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
아무리 소설이라는 걸 아는 상태라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게다가 이단 심문관의 수장이라.
이걸로 카이델은 내가 마녀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된다.
그걸 카이델이 모를 리 없다.
그렇다는 건···.
“살육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네.”
어떤 일에 불안한 요소가 있을 때 가장 좋은 방법.
나는 딱 하나를 알고 있다.
그것은, 그 요소를 아예 뿌리 뽑아버리는 것이다.
철저하게.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나로 인해 살육이 시작된다.
“···그러게.”
연신이 총총 뛰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나는 조용히 연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깃털의 감촉이 아주 조금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평소라면 도망갔을 연신도 얌전히 머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만히 두면 이단 심문관은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내가 암살당할 이유가 하나 줄어든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옳은 것일까.
내가 엔딩을 보면 배드 엔딩이건 진 엔딩이건 상관없이 모든 것이 초기화될 것이다.
그럼, 그걸 알고 있는 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할까?
효율을 위해서라면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사람들이 죽는 건 싫어.”
나는 카이델의 마음을 ‘느껴’버렸다.
설령 작가가 설정한 대로의 마음이라고 해도,
카이델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소설에서가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현실에서.
그렇기에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지금 내 눈앞에서 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연신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검은 유리 같은 눈동자.
연신이 입을 열었다.
“엔딩을 봐버리면 돼.”
그렇다.
엔딩을 보면 된다.
그러면 이 살육은 멈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엔딩을 봐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 카이델은 내게 고백을 해 줄 것인가.
“시간은 충분히 보냈을 터···.”
12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최근 일주일의 경우엔 매일 두 시간 가까이 나와 시간을 보냈다.
어떤 때는 카멜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정원의 정자에서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고,
어떤 때는 함께 왕도를 돌아 다녀보기도 했다.
둘 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돌돌 감싸고 밖으로 나갔을 땐,
주변인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후.”
함께 보낸 시간은 적지 않다.
문제는···.
“임팩트가 없어. 뭔가 고백을 끌어낼 만한 사건 같은 게.”
충격을 주려면 내가 떠난다고 하는 게 최고려나.
하지만 이미 저번에 한 번 써먹은 수법이라···.
으음.
다른 남자한테 흥미 보이는 척을 해봐?
하지만 그랬다간 그 남자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여러 사람이 죽는 것보단 나은가?
하지만···.
“흐흥. 쉽지 않지?”
윽.
연신이의 웃음이 내 명치를 후려친다.
···후.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무 쉽게 봤다.
한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을.
내가 봐왔던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인공들은 항상 마음이 갈대였다.
이 남자 저 남자 상관 않고 괜찮아 보이는 남자에게 흔들렸다.
그래서 진 남주인공의 오해를 사고 사건이 발생한다.
나는 그런 과정이 귀찮아서 다 건너뛰었다.
오로지 카이델에게만 호감을 보였고, 다른 남자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오해의 ㅇ자도 나오지 못하게.
그렇게 하면 금방 고백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탓에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없다.
카이델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고백을 끌어낼 수 있는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다.
아마 카이델은 이대로 있어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 흐름은 곤란하다.
“···후, 어쩐다···.”
나는 생각에 빠졌다.
그런 나를 연신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손을 써야만 한다.
최대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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