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정석, 이국에서 꼭 찾게 되는 매운 맛!
“저거요.”
오늘의 나는 단호하다.
절대 이번에는 휘둘리지 않겠다.
널어놓은 십 여벌의 드레스 중 나는 딱 하나를 짚었다.
“아샤님, 어제 푸른 계열 드레스였기 때문에 오늘은···.”
“아니요. 저거요.”
푸른 계열이라고 해도 어제는 투명한 얼음 같은 푸른색이었다면,
지금 내가 가리키고 있는 드레스는 바다색보다 더 짙은 푸른색이다.
결론은 다르다는 거다!
“아샤님.”
“저거요!”
데바인이 부를 때마다 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딱 하나만 계속 가리켰다.
지난번에는 어쩌다 보니 휩쓸려서 다 샀지만, 이번의 나는 다르다!
어차피 사야 한다면 하나만 살 테다!
필요 없는 건 필요 없다!
나는 그렇게 굳게 마음먹고 데바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데바인은 난감하다는 듯 드레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상인과 눈짓을 교환한 데바인이 다시 한번 나를 보며 입을 연다.
“저거요!”
하지만 내 결심은 확고하다.
지난번의 자주색 드레스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카이델과 커플 옷처럼 돼버렸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난감한 사태도 피할 겸 푸른색 드레스를 딱 집어 골랐다.
이번에 혹시 카이델이 푸른색 계열의 망토를 하고 나오면···.
그건 우연이 아닌 억지력이 작용했다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구두는 이거요!”
나는 누가 봐도 드레스와 깔 맞춤, 원단 맞춤인 구두를 가리켰다.
데바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상인에게 눈짓했다.
나는 흡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됐어.
국고를 탕진하는 마녀 이미지는 벗을 수 있겠지.
응.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상인에게로 다가갔다.
푸른 눈동자가 나의 거침없는 진격에 당황한다.
오오.
항상 능글맞은 표정만 짓는 줄 알았는데···.
혹시 이 남자도 남주인공 후보인 건 아니겠지?
···으음.
곰곰이 생각해보면 왕궁에 물건을 대는 상인인데.
그 정도면 대상인 중 하나일 거고.
남주인공 조건은 갖춘 것 같긴 한데.
나는 잠시 상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푸른 눈동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언제나의 능글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음.
아닌가.
내가 너무 예민한가.
하긴.
요즘은 가끔 데바인조차 남주인공 후보로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니···.
내가 너무 급해서 그런가 보다.
나는 상인을 지나쳐 그의 뒤에 있는 쟁반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각종 장신구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윽.
눈부셔.
“그리고 장신구는 이거!”
휴.
진짜 끝났다.
상인은 자신이 내보이지도 않은 장신구의 위치를 찾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그 생각을 못 했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이제 끝났죠?”
“···아샤님. 하나 더 골라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에? 왜요?!”
“내일 입으실 드레스도 필요하시니까요.”
으아.
맞다.
내일도 참가해야 되지.
저번에는 가져온 걸 다 사버렸으니까 별말이 없었구나.
으음.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 드레스 앞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나마 나아 보이는 드레스를 하나 골랐다.
“저기 초록색 드레스요.”
머메이드 드레스라고 하던가?
몸에 달라붙었다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인어공주의 꼬리처럼 퍼져나가는 드레스다.
다른 것처럼 보석이 막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뭐, 섬세한 자수가 가득 새겨져 있어서 비싸 보이긴 하지만.
보석이 붙은 것보단 덜 비싸지 않을까···?
“구두는 저거.
장신구는···.”
···.
아, 장신구가 제일 어렵다.
내 눈엔 다 번쩍거리고 다 무거워 보일 뿐···.
나는 그중에서 제일 덜 무거워 보이는 장신구로 골라 들었다.
“이거요.”
데바인이 놀랐다는 얼굴로 날 본다.
저번에는 날 가지고 인형 놀이를 했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겠지.
하지만 두 번은 하기 싫다.
귀찮다.
단순 피팅이라 등 뒤에 바느질까진 해보지 않지만
그래도 저 무거운 걸 입었다 벗었다 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솔직히 과장 좀 보태서 내 몸무게 정도 아닐까.
게다가 보석이 붙은 건 진짜 무겁다.
진짜 그건 내 몸무게만큼 나갈지도 모른다.
나는 소파에 다시 주저앉았다.
마치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아샤.”
카이델.
나는 카이델을 보며 엷게 미소지어 보였다.
너무 반기는 느낌이 나지 않게 조심해야지.
혹시라도 카이델이 나한테 확신을 얻어서 고백이라도 하면 귀찮다.
그러고 보니 고백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중에 연신이한테 한 번 물어볼까.
“폐하, 여기엔 무슨 일로···.”
카이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또 삐졌냐.
뭐, 뻔하지.
또 여기 무슨 일로 왔냐는 말에···.
“내가 오면 안 되는가?”
아.
역시.
어쩜 저리 단순할까.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폐하.”
“오늘은 이 다음에 계속 바쁠 것 같아 그대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
아.
저번에 내가 한 말 때문인가.
폐하의 옆이 아니면 아무래도 불안해서···, 였나.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항상 저를 이렇게 챙겨주시니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러자 카이델이 흠, 하고 신음성을 내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인은 내가 고른 드레스를 세팅한 뒤 나머지는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었다.
“테로아 경.
그건 왜 정리하는 건가?”
카이델이 고개를 갸웃하자 상인이 멈칫 멈춰섰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웃으며 카이델 쪽으로 돌아섰다.
“폐하.
아가씨께서 고르신 상품을 제외하고 정리하는 중입니다.”
윽.
저렇게 이야기하면 카이델은 틀림없이···.
“아샤.”
“네, 폐하.”
거봐라.
역시나.
부르잖아.
“그대가 지내는 동안 옷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저건 내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주게.”
···.
아니요.
싫은데요.
부담스러워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안 그래도 요즘 내가 데면데면해서 안달 나 있을 텐데
여기서 더 도발하는 건 좀 그럴 것 같고···.
그렇다고 저걸 다 받자니 국고를 탕진하는 마녀 소리 들을 것 같고.
어쩐다.
“폐하.”
일단 불러놓고 생각하자.
나는 카이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좋게 거절할 수 있지.
으으으으음.
“말하라.”
불러놓고 멍 때리는 나를 보며 카이델이 말했다.
으음.
어떻게 말한다.
어쩌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습니다.”
···.
헉.
나는 순간 상인의 눈치를 봤다.
“···그···, 그런 게 아니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하지만 묘한 포스가 느껴진다.
무섭다.
“그···.
저는 드레스에 익숙하질 않아서 좀 더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요.”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공략 상대도 아닌데 밉보여서 뭐가 나쁘겠어.
하하하하하.
설마 왕의 손님인 나한테 욕을 하겠어 뭐 하겠어!
뒤에서야 뭐라 하든지 말든지.
“장신구도 좀··· 가벼운 게 좋을 거 같고···.
신발도 다 너무 높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 말에 상인이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의 취향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해 최근 유행인 디자인을 가져왔습니다만···.
제게 3일만 더 시간을 주시면
반드시 아가씨의 취향에 맞는 의복과 장신구를 선보이겠습니다.”
억.
그렇게 열의에 불타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요.
나는 슬쩍 카이델을 봤다.
카이델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뒤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테베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정무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근데 대체 시계는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
카이델은 테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인···.
테로아였던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상단에는 항상 신세를 지게 되는군.
이번 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니 괘념치 말게.
다음에 그대가 방문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네.”
흠.
테베 덕분에 끝난 것 같다.
다음에 가져오면 미안하지만 거절하자.
아니면 좀 싸 보이는 거 하나만 고르던가.
나한테 이래저래 돈 쓰는 건 미안하니까.
“아샤.
오늘 저녁을 함께 들지 않겠는가?”
“아···.
폐하.
혹시 허락해주시면 오늘은 잠시 성 밖에 나갔다가 오고 싶은데요.”
카이델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으음.
나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내가 도망가면 어딜 간다고···.
“이유를 말하라.”
“아, 다른 건 아니고···.
여기 와서 항상 성안에서만 있었으니까요.
밖이 궁금해서요.”
사실대로 말하면 성의 음식에 질렸다.
화사하고 맛있긴 한데···.
매일 먹기는 좀 질린다.
까놓고 말하면 김치 먹고 싶다.
다른 거 하나도 없이 김치에 밥만 있어도 잘 먹었는데.
성안의 음식은 매콤하거나 새콤한 게 거의 없고 대부분 기름지고 느끼하고 달다.
처음에는 맛있었는데 지금은 좀···.
게다가 지난번에 거의 2주를 넘게 성안의 음식을 먹다가,
하루 쉬고 또 성안의 음식을 먹는 중이다.
입이 짧은 내가 이만큼 먹은 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한 축에 속한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으악.
나는 도움을 구하는 얼굴로 테베를 봤다.
테베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
쥬안므 공작령에서 긴급한 안건이라며 올라온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
카이델이 불신과 의심에 찬 눈으로 날 본다.
아니, 도망 안 간다니까요···.
돈도 없는 내가 도망가면 어딜 간다고.
“혹시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아샤님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나이스, 테베.
카이델이 의심에 찬 눈을 돌려 테베를 바라본다.
그 녹색 눈동자에는 이면이 없다.
그저 맑고 투명할 뿐.
그 올곧은 눈동자에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라면 맡길 수 있겠지.
그러도록 하게.
로젤 경에게 말해 둘 테니 그에게 들렀다 가게.”
로젤 경···.
그게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하긴 내가 뭐 익숙한 이름이 어디 있나···.
카이델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했는데.
···.
그러고 보니 카이델 이름은 뭐더라.
또 까먹었네.
“폐하의 뜻대로 모두 이루소서.”
테베가 예를 갖추자 카이델이 방을 나갔다.
그리고 방에는 나와 상인, 테베와 데바인이 남았다.
“아샤님.
뭔가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데바인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요.
벌써 4일째 성안에만 있었으니까 좀···.
점심 먹고 조금 지나면 들어올게요.”
나는 테베를 돌아보았다.
테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로이스터.
혹시 시간 괜찮나요?”
테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와.”
전에 카이델과 시가지에 나온 적은 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때는 다들 카이델에게 무릎을 꿇는 바람에
뭔가 민망해서 급하게 걷느라 뭘 봤던 건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반면 오늘의 나는 느긋하다.
검은 머리카락도 제대로 로브로 가렸고.
혹시나 로브가 벗겨질 때를 대비해 성안의 마법사가 마법도 걸어주었다.
완전히 색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검은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운 색이 되긴 했다.
“삐-!”
옆에서는 연신이가 오랜만에 신이 나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든 연신이를 깨워서
“우리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갈까?”
라고 하자 요즘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쿨쿨 자기만 하던 연신이가 벌떡 일어났다.
마차 안에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막상 나오니 기분 좋은 듯 포로로 날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잔뜩 신이 난 나와 연신이 뒤에서 테베가 주변을 경계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샤.
조심하세요.
여기는 모험가들의 거리라 위험합니다.”
왜 내가 모험가 거리에 있냐.
마차에서 물어보니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맵고 신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궁에서 나오는 음식이 고급 식재료를 쓰긴 하지만,
일반 국민이 먹는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일반 상점가를 가더라도 결국 성에서 먹던 음식과 비슷한 것밖에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색다른 음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제가 살던 세계에서 매운 걸 즐겨 먹었다 보니 매운 게 먹고 싶은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테베가 모험가의 거리를 말해주었다.
그래서 도착한 것이 여기.
테베도 이곳에 오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기본적으로 왕의 수호기사.
이런 곳에 올 일은 당연히 없다.
그래서인지 테베도 주변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다
“식당은 어딨어요, 로이스터?”
내 질문에 테베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덩달아 나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문제점을 깨달았다.
세상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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