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항상 쿨한 남주인공의 귀여운 모습은 매력포인트
망했다.
아까 햇빛 아래에서는 회색에 가까운 색으로 보였지만,
건물 안에서는 거의 검은색으로 보인다.
이 정도 색도 아마 여기서는 거의 없는 색일 텐데···.
“마녀···?”
“저주받은 색이다.”
“검은색보다는 회색에 가깝지 않아?”
“저런 회색 머리가 어딨어.”
“검은 머리···.”
긴가민가한 것 같긴 하지만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다.
이럴 때 당황해하면 더 이상해 보이는 법.
나는 손을 들어 테베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아샤.”
“괜찮아요.
당황해하면 이상해 보이니까 그냥 앉아 계세요.”
나는 태연하게 손부채 질을 하고 아예 로브 자체를 벗어버렸다.
로브 아래에 있는 고급재질의 옷을 보고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딘가의 귀족 영애인가?”
“하지만 저 머리카락 색은···.”
“염색 아냐?”
“하긴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마법이 있다고도 하지···.”
“하지만 검은색으로는 바꿀 수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진한 회색 정도인 거 아냐?”
휴.
봤냐는 듯 씩 웃으며 테베를 바라보자,
테베는 잠시 주변의 반응을 살피다가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더워서 나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테베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누가 언제 덤비거나 시비를 걸지 모른다.
그런 생각인 듯했다.
“음식 나왔습니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여종업원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음식을 척척 내려놓았다.
그리고 생글 웃으며
“맛있게 드세요.”
라고 이야기하고 가버렸다.
가까이에서 날 본 여종업원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람들도 아닌가 보다 하며 내게서 관심을 돌렸다.
“와.
맛있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빨간 국물!
딱 보기에도 매워 보이지만 그게 또 좋다.
맵찔이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그렇지 아예 못 먹는 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신나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나무로 만든 숟가락은 생각보다 마감처리가 완벽했다.
세상에.
애니나 소설에서나 본 건데.
내가 이걸 써보다니···.
근데 빨간 국물 이 숟가락으로 뜨면 물드는 거 아닌가?
나는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먹었다.
“···!”
매워!
오, 매워!
엄청 매워!
우와!
어느 정도의 맵기냐면 국물 있는 불닭 라면에 하바네로소스 넣어 먹는 기분이다.
아니 그런 걸 먹어본 적은 없지만.
뭐랄까.
그 정도로 맵다는 소리다.
“쓰읍···.”
우와.
미치겠다.
나는 온 입안이 불타오르는 기분을 견디며 물에 손을 뻗었다.
“괜찮습니까, 아사?”
테베가 겨우 굳은 얼굴을 풀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내가 급박해 보인 거겠지.
아니, 실제로 급하다.
물, 물!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입안을 순간적으로 진정시켜 줬다.
하지만 매운맛은 강했다.
더 큰 불길이 확 끓어올라 입안에서 타오른다.
“···.”
테베가 내가 먹었던 스프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얼굴을 다시 한번 보더니 슬쩍 숟가락에 묻혀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말리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매운맛을 견디는 것으로도 힘겨웠다.
미안, 테베.
“···윽.”
새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색이 붉던 입술이 더 새빨갛게 부어오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직감했다.
아.
나도 별로 다르지 않은 꼴이겠구나.
“푸흡···.”
매운맛을 견디며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테베.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테베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진다.
하긴 처음으로 매운 걸 맛봤으니 마음의 준비도 못 했겠지.
아무리 그래도 저 얼굴로 저 반응은 너무 반칙이다.
“괘, 괜찮아요?”
웃음을 삼키며 묻자 테베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마 테베 나름의 토라졌다는 표현 아닐까.
“흠흠.
이건 엄청 맵네요.
다른 것도 다 이 정도로 매운 거예요?”
식탁 위의 음식은 총 다섯 가지.
하나는 아까 말한 로이 소스가 뿌려진 옐랍 고기, 같다.
묘하게 달달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하나는 해산물이 들어간 약간 붉은색 도는 볶음밥 같은 음식.
거기에 뭔가 덩어리진 양념으로 버무려져 있는 고기요리와 파랑 닮은 채소.
그리고 아까 먹었던 스프.
으.
다시 보니 스프 색이 거의 용암처럼 붉어 보인다.
“아뇨···.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테베가 살짝 입술을 가리고 웅얼거렸다.
아마 부은 입술을 감추고 싶은 거겠지.
약간 연신이 부리 같아서 귀여웠는데···.
하지만 초록색 눈동자 가득 고여있는 물기를 보고 차마 말로 내지는 못했다.
만약 말했으면 정말 눈물을 흘렸을지도···.
그러고 보니 연신이는 어디 갔지?
“···.”
연신이는 언제부터인진 모르지만, 자신이 시킨 요리를 뜯어 먹고 있었다.
그 조그만 부리로 몸뚱이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고기를 뜯어서 씹어 삼킨다.
근데 애초에 새가 고기를 먹어도 되나?
부리로 고기를 제대로 씹어 삼킬 수가 있나···?
“앗, 야!
왜 그거 먹어!
다른 거 먹으면 되잖아!”
슬쩍 포크를 들어 연신이가 먹던 고기조각을 뺏어 들었다.
물론 다른 고기조각도 많지만···.
왠지 연신이가 먹던 게 맛있어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음.”
로이 소스는 아마 우리나라의 간장 소스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풍미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옐랍이 뭔지는 모르지만, 돼지고기랑 비슷한 맛이 난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매운맛에 시달리던 입안이 가라앉았다.
그 기세로 나는 이번엔 빨간 양념의 고기에 도전했다.
“···.”
오.
이건 뭔진 모르지만 맛있다.
탄력 있는 고기에 매콤 새콤한 양념이 잘 어우러진다.
치킨의 양념과 비슷한 맛이긴 한데 단맛이 없고 매콤한 맛이 좀 더 강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씹고 있자니 테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테베가 조심스럽게 포크를 뻗었다.
“···.”
테베의 표정이 오묘했다.
매워하는 건 아닌데, 뭐지?
“맛있어요?”
“···.”
테베가 대답을 망설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리기를 여러 차례.
그리고 잠시 뒤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입안이 얼얼해서···.”
아하.
아무 맛도 안 나는구나.
저 기분 알지···.
나는 물을 따라 테베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습니다.”
“따라 준 성의가 있는데 안 마실 거에요?”
테베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을 마셨다.
뭐,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입을 씻어내는 역할은 해주겠지···.
이번에는 밥에 도전해볼까.
나는 숟가락으로 한가득 밥을 퍼서 입안에 넣었다.
으음.
하나도 안 맵다.
고기요리는 뭔가 살짝이라도 매운맛이 났었는데 이건 아예 안 난다.
아마 이게 제일 덜 매운 음식이었나보다.
즉, 나는 가장 매운 요리부터 덜 매운 요리, 거의 맵지 않은 요리 순으로 먹은 모양이다.
하필 먹어도 그 순서대로 먹냐···.
“근데 로이스터.”
“네.”
“왜 이렇게 많이 시킨 거예요···?”
로이스터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
아니 두 명인데 요리 다섯 개면 너무 많지 않나?
뭐, 양으로 치면 세 사람 먹을 양 정도 되는 거 같기는 한데···.
문제는 내가 한 사람 양을 제대로 못 먹는다는 걸까.
예상대로 볶음밥 세 숟가락, 고기 다섯 점을 더 먹자 배가 불러온다.
나는 테베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만 드십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낮에 있었던 일이 다시 생각났다.
가느다란 몸이지만 확실히 남자는 남자였다
테베는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음식들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매운 스프를 한 번에 들이킨 후 콜록거렸다.
빨리 마시면 안 매울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남자의 자존심인지 뭔지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졌는데도 맵다는 소리 한번 없이 버티는
모습은 솔직히 귀여웠다.
“무슨 좋은 일 있으셨나요?”
드레스의 뒤를 여며 바느질하던 시녀가 웃으며 물어왔다.
요 며칠 내가 드레스를 입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옷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라
이제는 나를 꽤 편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난리였지만.
왕인 카이델의 명령이니 싫다고 거부하지도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를 봤었지, 아마.
혹여나 나한테 닿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 손을 삐끗하는 바람에 찔릴 뻔한 것도 여러 번.
사실 그중에서 한 번은 진짜로 찔리기도 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내 등에서 배어 나오는 피에 그녀는 바로 무릎을 꿇고 내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얼른 피를 닦아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엎드려 있을 시간이 있으면 드레스에 피가 배이기 전에 후딱 닦아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결국 드레스에는 살짝 피 얼룩이 졌다.
천만 다행히도 머리카락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부분이라 누구도 눈치 못 챘지만.
저번에는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뭐하러 굳이 친해지나, 하는 마음에 그냥 내버려 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친해져 두자는 생각에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랬더니 확실히 조금 더 편하게 대해주게 되었다.
“엄청 귀여운 걸 봤거든요.”
얼굴을 가리려 시도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테베가 너무 귀여워서 내 로브를 빌려줬었다.
하지만 검은 로브로도 그 새빨간 얼굴은 가려지지 않았다.
“아샤 님께서 그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바느질이 끝났는지 시녀가 실을 동여맸다.
그리고 가위로 실을 톡, 잘라냈다.
“다 됐습니다.”
“고마워요, 이나.”
시녀는 생글 웃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앞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데바인을 기다렸다.
으음.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전문가의 손길은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변신시켜놓지.
그렇게 짙은 화장이 아닌데도 사람의 인상이 달라진다.
평소에 화장이라곤 비비크림이랑 틴트 정도만 바르던 나라 더 다르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짙은 바다색 드레스는 입어보니 생각보다 몸에 딱 달라붙었다.
상의 쪽은 몸에 달라붙고 하의 쪽은 확 퍼져나가는 스타일.
그 때문에 코르셋이 좀 불편할 정도로 조여져 있었다.
이런 거 굳이 안 해도 되는데···.
까놓고 말해서 뱃살 좀 나오면 어떤가.
누가 내 배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뱃살 없어 보이는 것보다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게 더 좋은데···.
시녀에게 내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 코르셋을 꽉 조였다.
아무거나 집은 장신구도 생각보다 치렁치렁하지 않고 괜찮았다.
귀를 뚫은 게 아니라 귀찌를 한 거라서 귓불이 좀 꽉 조이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귀를 뚫는 것보단 나으니까···.
친구들은 요즘 세상에 귀 안 뚫은 여자는 나뿐일 거라고 놀렸었다.
뭐 그 정도로 요즘은 귀걸이 안 한 사람이 드물긴 하지.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도 아기들도 많이 하고 다니니까.
하지만 나는 귀를 뚫지 않았다.
이유는 따로 없었다.
귀걸이를 살 돈도 없었고 굳이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일까.
“아샤 님.”
노크 소리가 들린 후 잠시 뒤 데바인이 들어왔다.
그는 나를 살짝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그럼, 가시지요.”
데바인이 내게 허리를 숙였다.
으음.
이틀째의 무도회라.
저번에는 건배 한 번 잘못 해서 누가 왔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지···.
근데 사실 지금 내 마음속에서는 남주인공을 거의 테베로 찍어놓고 있다.
나랑 자주 엮이는 위치에 있는 것도 그렇고,
테베의 성격이나 행동에 귀여운 면이 있는 것도 그렇다.
원래 남주인공이란 평소에 여자주인공을 지켜주다가도 엉뚱한 면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법.
테베는 어떻게 보면 남주인공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게다가 다른 조건을 따져봐도 그렇고.
“으음···.”
그냥 오늘은 테베랑 계속 같이 있을까?
저번처럼 계속 테라스에 있으면 테베가 오지 않을까?
카이델 성격상 누가 꼬일지 모르는데 날 혼자 둘리는 없고,
그렇다고 카이델이 오기에는 인사해야 할 귀족이 많을 테고.
응.
그렇게 하자.
나는 데바인이 열어주는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때의 나는, 오늘의 무도회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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