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정석, 그 끝은 언제나···.
첫 단어를 게르마늄으로 시작한 나는 연신이의 부리 공격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망할 것.
늄으로 시작하는 단어도 있는데.
요즘 같은 시대 한 방 단어가 어딨다고.
지가 무식한 거면서.
끝말잇기를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이어나가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났을 땐···.
“폐하를 지켜라!”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왕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를 저들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
“친위대나 왕성 수호대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잖아!
폐하는 어디 계시냐!”
음.
당신들이 애타게 찾는 폐하, 제 앞에 있는데요.
나는 차마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멍하니 카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는가.”
“폐하···?”
붉은 눈동자가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모르는 척 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어차피 카이델이라면 내 거짓을 끌어낼 수 있지만···.
내가 내 수명을 깎아낼 필요는 없다.
최소한 내가 거짓말을 관철하는 동안에는 날 죽이진 않을 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폐하.”
“그대가 내게 알려주었으면 좋겠군.
이게 무슨 일인가?”
테리가 여기 올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때까진 버텨야 하는데···.
“그걸 왜 제게···?”
“그대라면 이게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네만.”
뭐.
그렇겠지.
지금쯤 반란군의 수장이 누군지 알려졌을 것이다.
왕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로 적이 들어왔다고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정체도 들켰겠지.
그리고 카이델이 나를 데리고 탈출하지 않고 여기에 가만히 있다는 건···.
여기 있으면 반란군의 수장인 테리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
즉, 내가 테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거겠지.
“저는 조금 전에 일어난 터라···.
세상에!
지금 성에 불이 붙은 건가요?”
“화약고와 식량창고가 당했더군.
데르미엔 군이 성 내부의 구조나 화약고 같은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는 척하긴.
하긴, 나도 마찬가진가.
“데르미엔 군···?
타국의 군대인가요?
지금 타국의 군대가 쳐들어온 건가요?”
나는 최대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이델을 보았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수많은 병사가 서로를 죽고 죽이고 있었다.
막상 전투 장면을 눈앞에 두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생리적인 것이라 참아내질 못했다.
하지만, 뭐···.
자연스러운 거니, 괜찮으려나.
“그대가 연기를 하지 않을 때도 있군.”
“에?”
“처음부터 뭔가 어색하다고는 생각했네.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그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색했지.
하지만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네.”
역시.
위화감이 있지만, 그냥 넘긴 건가.
사랑의 힘은 위대하네, 참.
그 의심 깊은 카이델이 이상한 점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보다 폐하, 어서 도망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디로 가란 말인가?
탈출로도 정면도 모두 데르미엔 군으로 가득한데.”
카이델은 쓰게 웃었다.
으음.
테리는 왜 오지 않는 거지?
카이델을 찾고 있는 건가?
“그래도 여기에 계시면 안 돼요, 폐하.”
나는 몸을 돌려 카이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재미없는 연극이라도 보는 것 같은 눈이다.
하지만 그 재미없는 연극을 얼마나 길게 해내냐에 따라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카이델은 기본적으로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엔딩 롤 안에서를 제외하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
나라를 뒤엎은 반역자와 손을 잡은 거라면···.
나 역시 반역자다.
“그대는 참으로 무서운 여자로군.
라이안 사제도 그대가 타락시킨 건가?”
“무슨 말씀을···.”
“그대가 전설의 마녀였다니.”
하, 하하.
뭘까, 이 전개.
착각물?
내가 테리한테 그런 말을 해서 이런 전개가 된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전개가 되는 건가.
“마녀라니요, 폐하.
교회에서도 제가 마녀가 아니라고···.”
“그 이야기조차 이제 믿지 못하겠군.”
집착으로 불타던 눈동자와는 또 다르다.
차분하게···.
마치 연탄 같다.
은은하게 타오르는.
음.
남주인공한테 연탄은 좀 아닌가?
“그럼 어찌해야 저를 믿어 주실 건가요?”
“내가 왜 그대를 믿어야 하는가?”
우와.
무섭다.
엉터리 연기의 끝이 다가온다는 거겠지.
아.
이럴 때 오히려 여주인공이 핀치에 몰리면 남주인공이 짠하고 나타나지 않나?
“···.”
아니, 아니다.
그랬다가 처음의 그 말도 안 되는 아사 엔딩 같은 게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작가가 미친놈인데 정석대로 갈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응.
“조용해졌군.”
카이델의 손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우와.
이 자세.
맨날 남주인공이 여주인공한테 쓸데없이 하는 자세다.
마치 키스할 것처럼 굴지만 절대 키스는 하지 않는 자세.
그러니 지금 나도 괜찮을 거야.
응.
···괜찮겠지?
“삐-!”
“···.”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연신이가 튀어나와 카이델의 손을 쪼았다.
뭐야, 지금 나 위험했던 거야?
카이델은 아프지도 않은지 신음성 하나 내지 않았다.
그저 살기 어린 눈으로 연신이를 바라볼 뿐.
“그대의 새는···.”
“폐하···?”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설마,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응하지 못했다.
“···아, 아···?”
은빛 선이 번뜩였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
그런데,
왠지 모르게 알 것 같았다.
지금 카이델이 무엇을 한 것인지.
“연신아···?”
내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피.
피.
피.
피다.
작은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아아.
저건 안 된다.
너무, 많아.
지금까지의 공략, 엔딩 모두에서 이런 경우는 없었다.
카이델의 분노는 나한테 향했지, 연신이에게 향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손등을 쪼아서?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안, 안 돼···.”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샤···, 님···. 아샤···, 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멍하니 눈을 떴다.
“···테로아···님?”
테리, 다.
테리···.
그럼, 연신이는?
연신이는 어딨···지?
시선이 바닥을 향한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흥건한 피 외에는.
아아.
아아아아.
하얀 몸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안, 안 돼···! 안 돼···!”
몸이 떨린다.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째서.
왜.
“아샤님!”
테리는 나를 꽉 껴안았다.
내 앞에는 카이델이 엎드려 있었다.
아아.
어째서···.
어째서······.
“폐하는···, 폐하는··· 죽은 건가요?”
“···네.”
죽었다.
카이델이.
내 바로 앞에서.
연신이를, 죽이고.
“아, 아아아···.”
나는 이제 어쩌면 좋지?
연신이가 죽으면···.
나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야 하지?
그 아이의 곁으로?
어째서?
어째서?
“아샤님, 제발···.”
바르르 떠는 내 몸을 테리의 몸이 억누른다.
그래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어째서.
“이제 되돌릴 수 없어요, 아샤님.”
테리의 목소리가 떨린다.
되돌릴 수 없다.
뭘 착각하는 걸까, 이 남자는.
나는,
그런 것 때문에······.
“···.”
아무래도 좋다.
돌아갈 수 없다면.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대를 위해 내 사촌을 죽였습니다.
이 손으로.”
“나를 위해?”
웃기지 마.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면서.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멈추지 않았을 거면서.
아니, 웃기는 건 나다.
알고 있잖아?
이 모든 건 정해진 스토리라는 걸.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위해 나는 정당한 이 나라의 왕을 죽였습니다.
이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아아.
그래.
엔딩을 보자.
저래 봬도 연신이는 신이다.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 분명.
지금은 잠시··· 잠시 힘을 모으고 있는 것뿐이겠지.
“나를 위해···.”
나를 꽉 껴안은 채 깍지 낀 테리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크고 차가운 손이다.
나는 그 손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말을 해 줘요.
아직 내게 줄 것이 남았잖아요?”
나는 웃었다.
그 웃음이 테리에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모르겠다.
그런 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아샤님···.
이 나라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제게 주세요.”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당황하는 테리.
조각나는 세상.
그 속에서는 나는 웃었다.
*********
캄캄한 세상.
그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바닥에 앉았다.
연신이가 없다.
어째서?
없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나?
계속?
혼자?
“혼자···.”
그것도 나쁘지 않다.
순간 내 의식이 그렇게 도망가려 한다.
하지만···.
“이사···야···.”
이사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아니,
아니다.
이건, 누구?
얼굴이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가지 않아도···.
내 안에서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
내 나이가 그대로라도 내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잊어버린 것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그 한 사람을.
“이사야···.”
안 돼.
안 돼···.
이사야···.
“연신아!”
연신이.
연신이를 찾아야 한다.
연신이를 찾아야 되돌아갈 수 있다.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주변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어딜 가도 어둠뿐.
심지어 끝도 보이지 않는다.
벽도 없고, 오직 바닥만 있는 세상.
아아.
싫다.
“연신아!
연신아, 어딨어!”
미친 듯이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연신이가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발이 아프다.
시간은 지나가지 않는데.
나만 시간이 지나고 있다.
이대로 지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지도 못하고,
이 어둠 속에서?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싫어···.”
아아.
지금 알았다.
나는,
혼자 있는 게 무서운 건가.
혼자 있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그랬었다.
혼자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 순간.
어째서인지 내 마음은 혼란스럽다.
왜냐면···.
나는 알아버렸으니까.
“싫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알아버린 것.
사랑.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알아버린 나는 두려운 것이다.
혼자 남는 것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사···.”
흐려진 이사의 얼굴.
그 위로 수많은 남자의 얼굴이 얽힌다.
싫다.
싫다.
이사의 얼굴이 지워진다.
아아.
“···.”
문득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커다란 스크린이 보였다.
어째서지?
아까 거기서 꽤 멀리 걸어왔는데···?
나는 홀린 듯 스크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테로아가 화아사를 위해 팔렌 왕국을 멸망시킨 날.
연신이가 없는데 화면이 켜졌다.
화면 속의 나는 마치 악녀 같다.
차갑고 교태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데르미엔 군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어요.
-“약속대로 팔렌 왕국은 테로아 전하, 아니 폐하의 것입니다.”
테로아는 슬픈 눈으로 연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테로아는 씁쓸한 기분을 채우려 술을 계속 마셨어요.
데르미엔 군의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하고 있었다.
토사구팽.
쓸모없어진 사냥개는 잡아먹히는 것이 숙명.
하지만 테로아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설마 왕국을 함락시킨 날, 바로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고는.
그러니 날 둔 채 만취했겠지.
-쓰러진 테로아의 곁에 데르미엔의 기사가 다가왔어요.
-그는 테로아의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렸어요.
픽, 피가 튄다.
아아.
역시.
-테로아의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화아사는 웃었어요.
-“반란을 일으킨 자의 말로란 이런 것이겠죠.”
화면 안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얼굴이다.
뭐, 실제로도 그렇지만.
-테로아와 화아사는 그렇게 데르미엔 군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어요.
-팔렌 왕국은 데르미엔의 손에 들어가고야 말았답니다.
-BAD ENDING.
타국을 끌어들인 반란의 끝은 이런 것이겠지.
아마 테로아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화면이 꺼지고,
하얀 화면만 남았다.
그리고 여전히 연신이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철컹,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열렸다.
이 어둠 속에서 혼자 있느니
달콤한 지옥 속에 잠겨 죽을래.
나는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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