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의 정석, 서브 남주는 다른 남주인공과의 사랑을 서포트 해준다
“좀 쉬십시오.
너무 지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얌전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역시.
그럼 그렇지.
이 작가, 계속 간만 보고 로맨틱한 장면은 잘 안 보여 준다.
요즘 이런 거 인기 없는데.
테베는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내게 빙긋 웃어 보였다.
가슴이 뜨끔 한다.
엔딩 롤에서의 테베가 되살아난다.
피를 토하며 가슴을 움켜쥐던 그 새하얀 얼굴.
아름다운 얼굴을 고통으로 일그러뜨리며 괴로워하던 그 모습.
그 모습과 지금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뒤섞인다.
“···미안해요.”
지금의 테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뱉었다.
알고 있다.
내 이기심이라는 것쯤.
테베는 놀란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내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샤 양이 제게 미안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보 같긴.
지금 내가 신세 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닌데.
바보는 나다.
테베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
어둠 속에서 이사가 울고 있다.
서글프게.
가슴 찢어지는 목소리로.
아니다.
저건 이사가 아니다.
나다.
“왜 울고 있어?”
테베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언제나의 그 상냥한 미소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테베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나는 마녀예요.
나랑 얽히면 모두가 불행해져요.
오빠도 나랑 있으면 불행해질 거예요.”
아아.
저건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어놨던 감정이다.
홀로 있던 내가,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 얻었던 결론.
그 여자는 항상 말했다.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나만 없었어도 그녀는 사진 속 그 밝고 화사한 아가씨인 채 있을 수 있었다고.
저런 남자와 함께할 일은 없었다고.
그 남자는 항상 말했다.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나만 없었어도 그녀가 이렇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저런 여자와 함께할 일은 없었다고.
이성으로는 알고 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거기에서 생긴 불균형이 그들을 불행하게 했다.
나는 그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뿐이었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
하지만 감정이 말한다.
그건 결국, 내 존재 자체가 죄라는 것은 아닌가?
“왜 네가 마녀라고 생각하니?”
테베가 묻는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져 있다.
대신 진지한 표정이 채워져 있다.
“내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에요.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은 불행해져요.”
내 동기들은 나로 인해 불행하다고 했다.
선배들에게 기합받는 일이 종종 생길 때마다 내 탓이라고 했다.
이성으로는 알고 있다.
만약 그들이 날 모함하지 않았다면 내가 싼 여자로 소문나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선배가 날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선배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은 말한다.
결국, 그들이 날 모함한 이유는 내가 나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내가 없었다면 다들 불행해지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아니라 은화가 여기 있었다면.
내가 공략한 남자들은 과연 불행했을까?
그런 서글픈 엔딩들 따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연신이도 죽지 않았겠지.
연신이는···.
연신이도 나로 인해 불행해졌다.
“너는 마녀가 아니야.”
테베는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 말했던가.
카이델이 내가 마녀가 아님을 믿기 때문에,
그도 내가 마녀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고.
즉,
카이델이 내가 마녀라고 생각했다면 테베도 나를 마녀라고 생각했을 테지.
“폐하는 내가 마녀일지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카이델은 반역자와 엮여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마녀라고 매도했다.
물론, 내가 내뱉은 말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마녀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나를 마녀로 단정 지었다.
“···폐하가 뭐라고 하시든 나는 너를 믿어.
너는 마녀가 아니야.”
아아.
안 된다.
나는 알고 있었다.
테베를 공략했을 때 알았다.
테베는 나를 위해서는 카이델도 배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배반은···.
테베 스스로를 좀먹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테베를 죽게 하겠지.
그러면서도 그는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테베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마녀예요.”
어린 내가 차갑게 내뱉는다.
흘러내리던 눈물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목소리만이 차갑다.
내 생각을 대신 전달해 주는 걸까.
아니면 꿈이라서 내 생각대로 말하는 걸까.
“너는 마녀가 아니야···.”
테베는 그런 내게 손을 뻗었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나는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거부해.
거부해야 해.
이건 그를 위하는 길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런 슬픈 소리는 하지 마.”
그는 내 뺨의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그 크고 굳은살 가득한 손이 솜털보다도 부드럽게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제 울지 마.”
묘하게 뺨에 닿는 감촉이 생생하다.
나는 멍하니 눈을 떴다.
“···.”
눈앞에 녹색 구슬이 보였다.
깊고 부드러운 색.
싱그러운 숲이 생각나는 색이다.
“···테베···?”
멍한 머리가 멋대로 단어를 내뱉는다.
녹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가, 반쯤 사라졌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
멍한 머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그제야 나는 지금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옆으로 누워있는 내 뺨을 어루만지는 채,
내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꿈에서와 꼭 같은 모습이었다.
“···꿈?”
이건 꿈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뺨에 닿는 손의 감촉이 너무 현실적이다.
“이마의 수건을 갈아드리려 왔다가 그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일단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마에서 툭, 하고 수건이 떨어졌다.
또 열이 났었나.
테베는 그걸 어떻게 안 것일까.
“아까 잠자리에 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열을 내셨습니다.
잘 주무시는 것 같아 깨우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을 흘리시기에 그만.”
울었나.
바보같이.
여기 와서 눈물이 많아졌다.
삶을 살아가는 데 내가 가장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 감정이었다.
감정이 없으면 거부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비난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모함당하고 따돌림당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잘라내 버리면 된다.
감정을 버리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하지만 감정을 버리면서 나는 스스로를 버렸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버렸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
마치 기계 속 톱니바퀴 중 하나가 된 것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려 애썼다.
그 삶은 편했다.
편했는데···.
“공허했어요···.”
지금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어요.
낳아준 부모는 저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저를 저주했어요.”
마치 꿈에서처럼,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나는 테베에게 고했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처럼.
“그 사람들이 불행해진 이유는 나래요.
내가 없었다면 그 사람들은 행복해졌을 거래요.”
테베는 그런 내 말을 그저 담담히 듣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래서 저는 사랑받는 방법을 몰라요.
그래서 저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요.
그렇잖아요?
받아본 적 없는 걸 해줄 순 없는 거잖아요.”
두려웠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창피한 건 또 알아서 그런 내 집안 환경이 부끄러운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숨겼다.
숨기니까 벽이 생겼다.
아마 같은 학년의 아이들도, 대학 동기들도 그런 걸 은연중 느꼈었겠지.
“그런데 내 동생은 그런 나를 사랑해 줬어요.
아무도 그 아이에게 사랑을 준 적이 없는데, 그 아이는 사랑을 알고 있었어요.
그럼, 그럼 내가 잘못된 거잖아요?”
내가 나쁘다.
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내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사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을 때였다.
“나는 이미 잘못된 인간이 되어버렸어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내 동생은 달라요···.”
그 아이는 사랑을 알고 있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 없는 사랑을 모두에게 나눠준다.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아이.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실은···.
모르겠어요.
나는 그 아이를 지키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처음으로 받아본 사랑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요?”
이사가 아니면 내게 사랑을 주는 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렇잖은가?
정말 나는 공략을 위해 온 힘을 다했나?
이 세계를 즐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그들의 사랑을 달콤한 지옥이라고 부르면서,
어쩌면 여기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나?
“내 안이함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요.”
연신이를 잃었다.
그래서 이사에게 가는 길을 잃었다.
카이델에게 갈 수 없으니 다른 남주인공 후보들을 만날 수도 없다.
카이델···.
지금의 내가 그를 보면 달려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그럼 나는 다시 그 어둠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마녀가 된 걸까요.”
두서없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던 테베는,
내 말이 끝났다고 느꼈는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아샤 양은 마녀가 아닙니다.”
아아.
꿈에서와 같은 전개다.
역시 이건 꿈의 연속이 아닐까?
“왜냐면, 마녀는 그런 식으로 아파하지 않거든요.”
하하.
어리석다.
마녀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
마녀에게는 마녀의 아픔이 있는 법이다.
어떤 소설에서도 같다.
모든 악녀, 모든 마녀.
모두에게 사연이 있는데.
“당신이 정말 마녀라면···.
사랑을 알게 된 당신은 분명 그걸 누리려 했을 거예요.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나는 놀란 눈으로 테베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내가 저런 말까지 했던가?
“당신은 정말로 애썼어요.
모두에게 상처 주지 않게 해보려고도 하고,
빨리 모든 걸 끝내려고도 노력해봤어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은 당신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죠.”
테베는 담담한 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녹색 눈동자는 깊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항상 지켜봤었습니다.”
녹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는다.
그는 한참이나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녹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절대 마녀가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그냥 당신이 지키고 싶은 걸 지키려 했을 뿐이에요.”
뺨이 간지럽다.
이상하다.
테베의 손가락은 내 뺨 위에 없는데.
한참 후에야 그게 눈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아.
그런가.
나는 울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울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서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십시오.
저는 당신을 위해 그게 뭐든 돕겠습니다.
설령, 그게···.”
녹색 눈동자가 순간 상처 입은 듯 물기 어렸다.
하지만 테베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다른 남자의 사랑을 얻어내야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테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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