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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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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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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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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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Help Me, Please!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안 힘들어?”

“이 정도에 지치면 영화 때려치워야 돼.”

“저 사람들은 미친 것 같아.”

“미치지 않으면 못하니까.”

“남는 게 뭔데?”

“성취감? 재미와 보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근데 영화를 하다보면 느끼는 감정 중에 흥분이 있지. 난 그것 때문에라도 이 걸 못 놓겠더라.”

“흥분?”

“그냥 미치는 거지. 다른 모든 일도 그렇겠지만, 영화일은 말 그대로 미치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어. 쏟아 부은 열정과 시간과 얻게 되는 성과가 정비례하지 않아. 그러니까 성과를 높게 잡으면 매번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 마치 니들하고 즐겁고 신나게 술을 진탕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술이 깼을 때 허무해지는 그런 것처럼 ”

“......”

“넌 어때?”

“뭐가?”

“공부하는 거?”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재미있다거나 보람은... 솔직히 모르겠어. 흥분은 더더욱.”

“네가 뭘 할 때 재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끼는 지 생각해 봐. 돈 버는 거?”

“딱히. 아마 일할 때인 것 같아.”

“무슨 일?”

“학력고사 공부할 때보다 너희들하고 비디오 찍으러 다니고, 수금하고, 장부 쓰고... 성과가 눈에 보이니까 그럴 때 좋더라고.”

“그런 게 경영이고 사업일까?”

“네가 알지 내가 아냐? 너는 사업을 하고 있잖아.”

“경영학과 간 놈이 누구더라?”

“교양과목만 듣고 있는 데 뭘.”

“경영은 고용한 전문가들이 하지. 난 영화감독이 하는 대로 할 뿐이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창의력을 끌어내고, 그들의 상호작용을 장려하고, 때로는 비전을 제시하고.”

“그게 경영이지 뭐가 경영이냐? 기업의 이해당사자들이 원하는 것을 수렴하고 조정해서 때로는 혁신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행위.”

“내가 미국에서 만나본 사업가들하고는 다르네.”

“뭐가 다른데?”

“매튜 그레이엄 알지?”

“약쟁이 형?”

“그 형이 배운 미국식 경영학은 네가 이야기 한 것과 다른가봐.”

“우리가 배우는 경영학은 주로 미국에서 영향을 받았을 텐데.....”

“그들은 장기적인 사업보다 어떻게 하면 회사를 잘 포장해서 M&A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가를 고민한대. 사업에 어떤 애정도 없이. 철저하게 돈이 목표인거야. 그 안에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


대니얼 그레이엄의 가르침이나, 래리 킴의 태도 그리고 매튜가 한 때 몸담았던 기업사냥꾼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

류지호가 보기에 그 모든 것에는 자본만 있다.

그 어디에도 사람과 사회공헌은 없다.


“사업을 영위해서 자본의 양을 늘리는 행위가 경영이니까, 그 말도 맞는 거야. 아마 인간중심의 경영학이냐 자본의 논리에 의한 경영학이냐 따라 갈리는 거겠지.”

“난 경영이나 그런 건 모르겠고. 내가 자기실현을 하는 만큼 내가 일군 기업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자기실현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회사가 잘도 굴러가겠다.”


킥킥.


언제나 한결같이 삐딱한 황재정이다.


“감독은 할만 해?”

“감독이란 직업 자체는 쉬워. 영화가 어려워서 그렇지.”

“전혀 쉬워 보이지 않던데?”

“너에게는 당연하지. 넌 경험하지 못 했으니까. 안 해본 사람에게는 어려워 보이겠지.”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쉽다는 뜻이냐?”

“그렇게까지 만만할까마는. 이 바닥도 자기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영역이 천차만별이야. 글은 잘 쓰는데 디렉터가 안 맞는 사람도 있어. 그 반대도 있고. 실무는 잘하는데 창작은 많이 부족하고 뭐 그런."

“내가 취미로 가온웨딩에 들락거리는 게 맞을까? 내가 가온웨딩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뭐든 해봐야 알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네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아니, 이건 너한테는 안 어울리는 말이니까 취소. 모르겠다는 의미 그건 즉 두렵다는 말이기도 해.”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황재정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은 모르는 것에서 생기는 거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당면하게 되면 누구나 당연히 두렵지. 하지만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닌 일들이 있잖아. 가온웨딩이든 또 다른 일이든 그렇지 않을까?”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

황재정은 그 말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니까 겁이 나는 것이고, 미지라는 건 그래서 사람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냥 부딪쳐야 하는 거냐? 아무 계획도 준비도 없이?”

“서울대 경영학과 왜 갔냐?”

“그야...”

“그곳에서 배우고 익히면서 계획하고 준비해야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부터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난생 처음 해보는 것들이야. 막막한 건 당연하지. 그런데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이 흐르고 나면 처음 그 것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대상이 아닐 걸? 즐거움의 대상이거나 따분함을 선사할 뿐이겠지. 안 그래?”


황재정은 대꾸 없이 열심히 리허설 하는 단원들에 시선을 던졌다.

덩달아 류지호도 입을 다물었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황재정의 입이 열렸다.


“조금은 알 거 같아.”

“뭘?”

“내가 흥분할 수 있고, 무엇에서 보람을 느낄지.”

“뭔데?”

“나중에 알려줄게.”

“야!”


황재정이 류지호의 어깨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도 미지에 대해 궁금해봐.”

“내가 궁금해서 속 터지는 걸 보고 싶은 거냐?”

“오늘 좋은 경험 많이 했다.”

“어라? 앞으로 촬영장에 안 나오려고?”

“봐 인마. 해지려고 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단원들과 김영복이 열심히 리허설을 하고 있다.


“자. 여러분! 이제 그만 합시다!”


류지호가 리허설이 한창인 곳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황재정의 표정이 어딘지 개운한 듯 보였다.

현장을 정리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황재정은 생각했다.

다들 열심이라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오늘도 저들은 시간으로 실력을 사고 있는 거다.


‘부디, 다들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가져가기를.’


친구 류지호를 위해.

그리고 참여하는 모두를 위해서.

황재정은 후련한 표정으로 단편영화 <Help Me, Please>에 건투를 빌어주었다.


❉ ❉ ❉


<Help Me, Please> 크랭크인 전날.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의 버나드 휴즈가 한국에 입국했다.

까만 피부에 순박한 눈망울을 한 그는 회사에서 기술지원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휴즈씨가 직접 올 줄은 몰랐어요.”


류지호와 가볍게 포옹을 하며 버나드 휴즈가 흰 이를 한껏 드러냈다.


“하하하. 몇 년 동안 LA를 벗어난 적이 없어서 이참에 휴가를 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죠.”

“정식 휴가는 열흘 후부터랍니다. 이곳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면 가족들과 일본여행을 할 예정입니다.”

“한국은 처음이죠?”

“일본은 장비구입 때문에 몇 번 오갔습니다만, 이 나라는 처음 방문입니다.”

“한국에 온 걸 환영해요.”


이후 버나드는 김영복의 촬영팀과 만남을 가졌다.

류지호는 트라이-스텔라에 현장 모니터 시스템을 문의했다.

겸사겸사 WaW 픽처스 오프닝 로고 제작도 부탁했다.

이번 버나드 휴즈의 한국방문은 류지호의 요청에 따라 WaW Pictures 로고 네거필름과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보유하고 있던 현장 모니터 시스템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김영복이 이번 촬영에서 사용할 카메라는 롱테이크 핸드헬드 촬영시 사용하게 될 ARRI Ⅲ와 동시녹음에 사용할 ARRI BL Ⅳ 카메라 두 대다.

현장 모니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날로그 영화용 카메라의 경우 뷰파인더 몸통 부분에 따로 비디오 신호로 바꿔주는 장치를 부착해야 했다.

버나드 휴즈가 직접 카메라에 액세서리를 부착하는 시범을 보이고, 모니터에 연결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 창고에 방치되던 걸 손 봤지만, 충분히 쓸 만할 겁니다. 그 대신 모니터에 보이는 컬러는 믿으면 안 됩니다.

- 컬러는 상관없어요. 앵글과 화면 구도만 확인할 거니까.

-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오 실장 통역 좀 부탁해요.”


류지호는 촬영팀이 충분히 시스템을 숙지하도록 자리를 피했다.

그런 후, 기획홍보팀 직원들을 호출했다.

그녀들과 함께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 의뢰해 만든 새로운 영화사 로고를 확인했다.


보글보글.

수중에서 물거품이 일렁인다.

그 사이로 W. A. W의 영문 글자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드넓은 강물의 수면을 뚫고 나온 세 글자가 한 바퀴 돌며 화면 중앙에 정렬한다.

22초짜리 오프닝 영화사 로고와 엔딩 크레디트 고정용 로고 시사가 끝이 났다.

기획홍보팀 삼인방이 탄성을 터트렸다.


“와우!”

“20세기 팍스 부럽지 않네!”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류지호의 기준에서는 CG라고 불릴 수 없는 기초효과만 들어간 오프닝 로그다.

배경이 있긴 하지만, WaW 글자가 강조된 로고다.


“<씨네마 천국>부터 이 오프닝 로고를 넣도록 하죠.”

“네. 좋아요!”


나중에 박건호와 오동석이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엄지를 추켜올렸다.

류지호로서는 다소 아쉬웠다.

어쩔 도리가 없다.

할리우드 메이저 수준의 오프닝 로고를 제작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어쨌든 옵티컬 자막으로 로고를 쓰는 여타 한국의 영화사들보다는 세련됐다.

당장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CGI 기술이 더 발전하면 스펙터클한 이미지로 바꿀 예정이다.

마침내 <Help Me, Please> 크랭크인을 앞두고 조촐한 고사를 지냈다.

16mm 영화도 황송할 지경인데 무려 35mm 영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류지호의 지인들은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장 설레는 사람은 류지호다.

김영복이 은근히 류지호를 놀려댔다.


“단편 찍으면서도 이렇게 좋아 죽는데, 장편 찍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뭘 어떻게 해? 부활해서 계속 찍어야지.”

“이것만 찍고, 죽었다 살아나서 장편 좀 찍어.”

“벌써 입봉 할 수 있어?”


김영복이 ‘흐흐’ 웃으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아니. 네 마수에서 벗어나려고.”

“그래? 알았어. 아쉽지만 이번 작업이 형하고 하는 마지막 작품이네?”


순간 식겁하는 김영복이다.


“야! 왜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데!”

“나하고 그만 하겠다며?”


김영복이 쩔쩔매며 변명을 늘어놨다.


“선배가 앓는 소리를 하면 적당히 장단을 맞춰줘야지. 갑자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러냐.... 사람 식겁하게.”

“역지사지로 생각해봐. 형이 날로 먹으려는데 내가 같이 가고 싶겠어?”


농담 한 번 잘못 건넸다가 본전도 못 찾고 사정하는 신세가 된 김영복이다.

고사파티가 파할 때까지 류지호는 계속해서 김영복을 놀려댔다.

서로 투덕거리다보니 어느새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부담감이란 벽돌 한 장이 깨져 나간 것 같았다.


“영복이형, <Help Me, Please>도 <영정사진>처럼 잘 부탁해.”

“촬영은 이 형한테 맡겨. 이번 영화로 칸 한 번 가보자.”

“그럽시다. 까짓것!”


❉ ❉ ❉


촬영 1일 차.


사당동 재개발지역.

찢어지고 훼손된 현수막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고,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다.

일부 집들의 담장이 무너지고, 지붕까지 주저앉은 집도 보인다.

주민들이 모두 빠져나간 마을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부우웅.


버스 대여섯 대는 너끈히 주차할 수 있는 공터로 차량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머큐리 세이블을 선두로 옆면에 가온웨딩 스튜디오 로고가 박힌 봉고차, 25인승 미니버스, 조명 탑차가 차례로 달동네 공터에 차를 주차했다.

촬영현장에 도착한 후 가장 바쁜 스태프는 제작부다.

전하영의 지휘 아래 권영균과 김재욱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권영균은 전하영이 일영영화사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올해 마흔 두 살 된 남자다.

서울대 미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충무로의 천편일률적인 현장과 달리 도전적인 시스템을 실험하는 영화 현장이 있다고 해서 자원했다.


“천막부터 칩시다!”


공터 한 편에 천막이 쳐졌다.

본격적인 조명 세팅이 시작되어야 하지만, 야외이면서 낮 촬영이라 조명팀이 분주히 움직일 이유는 딱히 없다.

김재욱이 조명팀에게 무전기를 나눠 줬다.

조명기사가 이 무전기를 통해 조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재촉하고, 사과하고, 수고했다고 인사까지 나눈다.

조명부에게 무전기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언제나 함께하는 필수 장비다.

이 당시까만 해도 충무로에서도 무전기 못 쓰는 현장 많았다.

사실 무전기 성능이 류지호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기에 구입을 망설였다.

그럼에도 이번 한 번 쓰고 말 것이 아니기에 큰맘 먹고 준비했다.

김재욱이 조명부에게 선이 감겨있는 돌돌이를 얻어왔다.

전하영이 함께 재개발조합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

끼이익.


전날 사무실에서 술판이라도 벌인 모양이다.

조합사무실 안은 여기저기 술병이 굴러다녔다.

중국요리 그릇과 접시에는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어있다.

전하영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예의바르게 인사부터 했다.


“실례합니다.”

“뭐시여?”


부스스한 20대 후반의 깍두기 머리 사내가 정체불명의 사투리를 구사했다.

얼핏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 같다.

억양이 절대 전라도 출신이 아니다.


“오늘부터 촬영하기로 한 영화팀이예요.”


사내가 전하영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명백히 음흉한 시선이다.


“아따, 부지런도 허잉.”


전하영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제작부를 하려면 저런 자들의 시선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줄 알아야 했다.


“촬영 시작한다고 인사도 드릴 겸. 전기 좀 끌어가려고 하는데요.”

“전기?”

“사무장님이 허락해주셨어요.”

“그려?”


김재욱이 흔히 돌돌이라고 부르는 전기선을 감아두는 도구를 내려놓았다.


“아야, 저그 콘덴스 보이제? 거기 꽂아잉.”


건들거리는 사내에게 기가 죽을 김재욱이 아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가 전기코드를 꽂은 후 돌돌이에서 전선을 풀었다.

김재욱이 사무실에서 전기를 끌어 오는 사이.

미니버스에서 극단 ‘마임’ 단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경호 단장을 빼고 단원만 15명.

이들이 좀비 역할도 하고, 공수부대 역할도 하며, 죽은 시체 역할도 할 예정이다.

이번 영화는 스태프보다 연기자들이 더 많다.

밥값만 해도 결코 만만치 않다.


“으아아! 몸이 찌뿌듯하네.”

“헛 둘! 둘, 둘!”


단원들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천막 안쪽에 전신 거울을 가져다 놓고, 의자를 세팅하는 등 간이 분장실이 세팅되었다.

의상팀이 미니버스 안에서 좀비가 입을 옷과 군복을 꺼내기 시작했다.

천막은 간이 분장실과 배우 대기실, 미니버스는 의상을 갈아입을 탈의실로 탈바꿈했다.

또한 한낮에는 이 천막의 그늘이 배우들이 휴식을 취할 장소가 되어 줄 것이다.


“한 분씩 의자에 와서 앉으세요.”


첫 촬영에 투입될 단원의 좀비 분장이 시작되었다.

한편 연출부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스크립터 홍진아가 조명부에게서 C 스탠드를 빌려왔다.

조명용 C 스탠드는 센츄리(Century)라고도 불렀는데, 청테이프, 아이스박스, 애플박스와 더불어 영화촬영 현장의 필수품으로 꼽힌다.

일반 A 스탠드로는 조명설치가 불가능한 좁은 공간 또는 경사진 공간, 계단 같은 곳에 설치하기가 용의하고, 접으면 공간을 별로 차지 않는 장점이 있다.

다만 무게가 좀 나가는 게 단점이다.

조명을 지탱하려면 스탠드가 튼튼하고 묵직해야 하는 걸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홍진아가 확대·복사한 스토리보드를 보기 좋게 붙여놓은 두꺼운 보드지를 C스탠드 암(Arm)에 나무집게(C47)로 고정했다.

류지호의 현장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권영균이 그런 홍진아를 도왔다.


“현장에 일하는 배우와 스태프들 누구나 공유하는 오늘 촬영 분량이에요.”

“이 스토리보드를 감독이 직접 다 한 거예요?”

“콘티는 감독님이 하고 그림은 따로 만화가지망생에게 부탁했어요.”


권영균은 감독이 할리우드 흉내를 어지간히 내고 싶어한다고 여길 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실제 충무로에서 콘티북이나 스토리보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어떤 감독들은 콘티 자체를 배우나 스태프와 전혀 공유하지 않고 연출하는 일도 빈번한 것이 현실이다.

미래에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현재는 광고현장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랄 수 있다.

현장모니터 시스템까지 해서 <Help Me, Please> 촬영현장은 적어도 10년은 앞 선 최첨단(?) 영화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류지호 뿐이라는 사실.


“막내야 바디 박스 가져와 봐라~”


촬영부들도 준비를 시작했다.

김영복이 조수들과 함께 ARRI3 카메라와 ARRI BL4 카메라를 조립했다.

이곳에서는 촬영기사인 것은 맞지만, 충무로 판에서는 퍼스트 어시스턴트다.

촬영기사입네 팔짱끼고 방관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물론 성격상 후배들에게만 일을 맡기지 않을 테지만.


“하이. 버나드.”

“하이. 미스터 류.”


버나드 휴즈가 친히 촬영현장에 왔다.

현장 모니터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김영복 팀을 서포트 하기 위함이다.

촬영팀 세컨 어시스턴트 문홍석이 전기테이프부터 청테이프까지 각종 테이프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허리가방을 두르며 투덜거렸다.


“할 일도 많은데 이딴 걸 왜 한다고 해서.”


김영복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하기 싫어?”


문홍석이 입을 다물었다.

불만은 많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겠다는 투다.


“가.”

“어디요?”

“집에 가라고, 새끼야.”

“......?”

“촬영부라는 새끼가 지 편한 일만 하려고 해?”

“형,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뭐?”

“개나 소나 루페 보는 거 알면 오야지들이 지랄할거야. 촬영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거라고.”

“권위는 지랄...!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 거 아냐! 촬영에 도움이 될지 헛짓거리가 될지 네가 해봤어? 그걸 테스트해보자는 거잖아.”

“촬영부 조수들도 함부로 뷰파인더를 못 보는데, 뭣도 아닌 것들이 촬영기사가 찍는 걸 지켜보는 게...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지호가 뭣도 아니든?”

“.....”

“대답을 못 하네? 내가 볼 때는 웬만한 충무로 입봉 감독보다 지호가 영화 훨씬 잘 찍어.”

“감독만 본다는 보장이 없잖아. 편집실처럼 어디 틀어박혀 있는 것도 아니고.”


김영복이 자신의 부사수들을 향해 물었다.


“니들도 불만이냐?”


막내인 신효섭을 제외하고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새끼들... 어제까지는 신나게 모니터가지고 놀더니, 현장 와서 딴 소리야!”


류지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버나드 휴즈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 미스터 류, 촬영현장에서 팀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아마추어도 하지 않습니다.

- 우리나라 현장에서 현장 모니터는 생소한 시스템이에요. 저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네요.

- 영화 현장에서 권위는 감독만 가지는 겁니다. 저들은 학교에서 프로의 자세를 다시 배우고 와야겠네요. 저로서는 꼴불견이 따로 없군요.


하하.


류지호는 웃음이 나왔다.

버나드 휴즈도 한 때는 개퍼(할리우드 조명감독)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아무리 민주적이고 자유분방한 할리우드라지만, 일단 촬영이 시작되면 아무리 대단한 백전노장의 촬영감독이라고 하더라도 감독을 존중한다.

권위란 실력과 커리어에서 오는 것이다.

나이와 직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이것도 시행착오의 한 과정이에요. 저들은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갈등을 겪고 있는 거고요.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실무와 효율로 현장이 진행되지만, 한국영화는 헤드 창작자의 직감과 스태프들의 헌신으로 진행되지요. 트라이-스텔라가 제작하는 영화의 하루 촬영진행비로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내지요.

- 극장에서 상영할 영화를 만드는데, 100만 달러도 안 든단 말입니까?

- 그럼요.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개런티를 전부 합친 돈이 버나드가 개퍼로 일할 때 받던 돈보다 적을지도 몰라요.

- 몇 편의 한국영화를 봤어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영화를 잘 찍었던데....

- 영화는 돈이 있어야 찍지만, 땀과 열정으로 찍기도 하잖아요.


버나드 휴즈는 할리우드에서만 작업을 해 봤으니 한국처럼 영화시장이 작은 나라 사정을 알 리가 없다.

독립영화를 찍는 뉴욕파 감독들의 영화도 한국과 비교하면 대작영화 제작비다.

류지호가 권리를 행사한 고언형제의 <바톤 핑크>의 제작비는 900만 달러.

현재 환율로 대략 63억 원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중저예산 영화 축에 들어간다.

캐롤코에서 제작한 <토탈 리콜>은 6,500만 달러(약 455억 원)다.

아놀드 슈발츠네거 몸값만 1,200만 달러(약 84억 원)다.

그에 반해 신강 피디가 기획한 <결혼생활>의 제작비는 5억 정도로 잡혀있다.

대작 한국영화라고 하더라도 제작비가 10억 안팎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국과 한국의 물가가 다르다.

게다가 제작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 부분에 있어서 할리우드는 법적으로 최소 급여를 보장 받는다.

때문에 할리우드는 당연히 기본 제작비부터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반면에 충무로의 인건비는 처참한 수준이다.


- 저들을 저렇게 내버려 둘 생각입니까?

- 프로들이 일하는 곳에서는 더 큰 저항이 있을 겁니다. 저들은 젊어요. 비교적 빠른 시간에 내가 하려는 시스템을 받아들일 거라고 봐요.

- 급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서서히 물들이려는 거군요.

- 가랑비에 옷 젖는 거죠.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정착되기를 바랄 뿐. 엄청난 해일도 처음에는 작은 물결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니까요.


상업영화판에서 시도를 했다면 커다란 저항에 직면했을 터.

그리고 류지호와 WaW 픽처스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현재 류지호는 학생 신분이다.

그러니 이 같은 시도는 프로들에게 귀여운 실험으로 비춰질 터.

다만 참여한 스태프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질 것이고, 류지호보다 훨씬 힘을 가진 누군가가 따라 하게 될 것이다.

한 팀 두 팀.

그렇게 따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현장 모니터는 충무로의 자연스러운 풍경이 될 것이다.

류지호의 이전 삶보다 시간을 훨씬 앞당겨서.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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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Help Me, Please! (6) +3 22.04.04 6,797 180 25쪽
» Help Me, Please! (5) +6 22.04.02 6,966 165 23쪽
124 Help Me, Please! (4) +4 22.04.01 6,991 175 20쪽
123 Help Me, Please! (3) +4 22.03.31 7,024 169 23쪽
122 Help Me, Please! (2) +5 22.03.30 7,108 177 22쪽
121 Help Me, Please! (1) +6 22.03.29 7,412 174 24쪽
120 돈 벌어서 영화만 찍으려고? +6 22.03.28 7,282 191 24쪽
119 세계 최고의 월급쟁이가 되어주세요. +4 22.03.26 7,264 189 22쪽
118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3) +7 22.03.25 7,207 183 23쪽
117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2) +9 22.03.24 7,383 189 21쪽
116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법 있어! (1) +5 22.03.23 7,285 180 20쪽
115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2) +2 22.03.22 7,205 180 17쪽
114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닙니까? (1) +10 22.03.21 7,323 185 19쪽
113 야망이거나 사명감이거나. (2) +6 22.03.19 7,464 184 24쪽
112 야망이거나 사명감이거나. (1) +9 22.03.18 7,508 189 20쪽
111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5) +9 22.03.17 7,596 197 24쪽
110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4) +9 22.03.16 7,530 198 25쪽
109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3) +6 22.03.15 7,541 186 21쪽
108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2) +7 22.03.14 7,592 193 27쪽
107 페가수스의 등에 올라타다! (1) +6 22.03.12 7,891 183 26쪽
106 Tri-Stella Pictures. (5) +6 22.03.11 7,641 195 22쪽
105 Tri-Stella Pictures. (4) +4 22.03.10 7,844 191 28쪽
104 Tri-Stella Pictures. (3) +6 22.03.09 7,768 190 20쪽
103 Tri-Stella Pictures. (2) +5 22.03.08 7,831 185 22쪽
102 Tri-Stella Pictures. (1) +8 22.03.07 8,064 196 22쪽
101 흐르는 강물처럼. (2) +10 22.03.05 8,003 200 27쪽
100 흐르는 강물처럼. (1) +13 22.03.05 7,859 185 23쪽
99 시카고 국제영화제. (2) +23 22.03.04 8,092 212 26쪽
98 시카고 국제영화제. (1) +8 22.03.03 8,095 181 23쪽
97 WaW는 젊은 회사다. (2) +4 22.03.02 7,942 20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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