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화. 덕어학교 2차전 (完)
순간 민수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는지, 공에 대한 반응이 느린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도 민수는 공을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니었다. 늦은 타이밍에도 어떻게든 공을 맞혀냈다.
-딱!
공을 맞혀내기는 했지만, 민수 입장에서 좋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 대상은 유격수인 영복, 변수가 있다면, 살짝 빗맞혔지만, 공에 힘은 실려 있다는 것과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영복이 잡아낼 수 있을지였다.
오늘 경기 내내 공수 모든 부분에서 좋지 못했던 영복이었지만,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던 것 같다.
빠르게 굴러오는 공을 몸으로 막으며 정확히 잡아냈고, 2루수 만복에게 이번에는 침착하게 토스했고, 만복은 이를 잡아 아웃시킨 뒤에, 나에게 깔끔하게 공을 던졌고, 나 역시 깔끔하게 잡아내어 병살타를 끌어냈다.
야구를 잘 모르는 관중석에서도 대단한 장면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는지, 다들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쳐줬고, 우리 팀원들도 다 같이 박수를 쳤다.
하지만 아직 2아웃에 주자 3루였다. 이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영수가 일어나서 들떠있는 선수들을 진정시켰다. 이를 보고 다들 다시금 정신줄을 잡았고, 마지막 타자까지 침착하게 아웃 카운트를 잡아낼 수 있었다.
-아웃!
“경기종료! 1대 2로 황성 YMCA의 1점 차 승리!”
길례태의 경기종료 선언과 함께 우리 팀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선수들은 그제야 다 같이 얼싸안으며 기뻐하였고, 관중들도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홍보도 하지 않았고, 관중석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 펼쳐진 경기임에도, 대략 3천여 명이나 몰려들어 관람한 경기였다. 이 당시 한양의 인구가 30만 명 언저리였으니, 100명 중 1명꼴로 봤다는 얘기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이유로 주목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기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순간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나는 민수를 먼저 찾았다. 중간중간 눈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오늘 민수가 보여준 모습은 놀라웠다. 민수에게 물으면 그 방법을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민수야, 오늘 경기 상대편이었지만, 정말 멋있었다. 네가 이렇게 두려운 타자가 될 줄은 몰랐다. 근데, 너 솔직히 그 정도로 잘 치는 타자는 아니었잖아. 어떻게 된 일이냐?”
민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유, 영준 형님 저 원래 이 정도 치잖아요~. 마지막 타석에 잠깐 땀방울이 흘러서 아쉬웠네요. 원래 안타 하나 더치는 건데···.”
“아니, 농담 그만하고, 진짜 어떻게 한 거냐?”
내가 되묻자, 민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혜월 씨요.”
“혜월 씨라고?”
“네, 혜월 씨가 주신 손수건을 꺼내어 볼 때마다 힘이 나더라고요. 하하하.”
아니 진짜 그것 때문에 실력이 폭발했다고?
“아니, 진짜 농담하지 말라니까. 그래, 아까 그 한진이한테 뭐 들은 거 있었지 않냐?”
“아~ 네, 한진 형님이 이쪽으로 오신 김에 저한테도 타격에 관해 이것저것 알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혜월 씨의 손수건을 꺼내어 볼 때마다 집중력이 올라가면서, 한진 형님의 가르침까지 떠오르더라고요.”
음··· 진짜 한진의 지도에 혜월의 손수건이 트리거가 되어, 잠재력이 개방되는 뭐 그런 건가? 하긴, 지금 당장으로는 이 정도 추측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구나, 잘 알았다. 어쨌든 오늘 경기 진짜 대단했다.”
“형님도 오늘 스윙 한번 안 하고도 출루하신 거 대단했습니다. 다음에 또 혜월 씨 같이 보러 가시죠.”
흠흠··· 이 녀석 칭찬하고 훈훈하게 헤어지려는데 또 혜월 씨 얘기를 하네. 하지만 난 굳이 기방에 안 가고도 이제 만날 명분이 생겨났단다 이 녀석아.
그렇게 양 팀의 마무리 인사로 경기는 마무리가 되었고, 관중들은 물밀듯 빠져나갔다.
객석을 채우고 뜨거운 박수를 보내던 관중들이 빠져나간 뒤 정적이 흐르니, 뭔가 허무해진다. 오늘 경기는 딱히 관중이 오는 것을 의식한 경기도 아닌데, 옛날 노래 중 ‘연극이 끝난 후’라는 곡이 생각날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우울한 감정까지 들었다. 가수들이 콘서트가 끝나면 공허함에 후유증을 느낀다고 하던데, 이해가 될 것 같다. 나 혹시 무대체질···?
어쨌든 이 공허함을 잊으려면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할 것 같다. 마침 저기서 혜월과 직장동료들이 오고 있다.
“영준 나리~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옆에서 혜림 언니가 막 가르쳐 주시는데,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그렇지 얘들아?”
-맞아 맞아!
-오늘 처음 봤는데, 나 야구 전문가가 된 것 같아~
-홈런이라는 거 진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나왔다! 여인 3명 이상이 모이면 나온다는 한마디 던지면 스무 마디가 돌아오는 그 상황! 공허하다는 말 취소할란다···. 차라리 조금 공허한 게 낫겠어. 기 빨린다 진짜···.
“하하하, 다들 야구 관람이 재밌었다면 너무 다행이네요. 근데 혜월 씨, 혜림 언니요? 두 분 벌써 그렇게 친해지셨어요?”
혜월과 혜림은 나를 보며 웃더니 대답했다.
“진작에 혜림 언니 만날 걸 그랬어요! 혜림 언니는 얼굴만 고우신 게 아니라, 마음씨도 어쩜 이렇게 고우신지··· 옆에서 저희한테 괜히 시비 걸던 무리도 대신 물리쳐 주셨어요!”
캬 역시 혜림 씨···. 혜림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야구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제가 책임져야죠. 그리고 오늘 초대받은 손님들인데, 해코지당하는 걸 두고만 보고 있으면 말이 안 되죠! 그리고 혜월이 너야말로 너무 고운데 왜 자꾸 나한테 그러니, 민망하게. 호호호.”
둘이 친해지면 나는 좋은 거지. 이제 괜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없이, 필요하면 혜월에게 가도 되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응원단 관련 계획도 탄력이 붙을 것 같다.
“그런데 혹시 오늘 응원단 관련 얘기도 나누셨나요? 야구 관람하고 느끼신 부분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해서는 혜림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게··· 응원단 얘기는 거의 못 했어요! 야구를 처음 본다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신나게 야구 얘기로 떠들어 댔더니, 정작 중요한 응원단 얘기는 하나도 못 꺼냈어요···.”
뭐라고? 근데 딱히 잘못한 것은 아니다. 이 역시 넓게 보면 응원단 교육의 범주 안에 들어가니 말이다.
“어··· 그럴 수 있죠. 근데 야구에 흥미를 갖게 하는 것도 응원단 얘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응원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 잘하신 겁니다.
응원도 흐름에 맞는 응원을 해야 하는데, 야구에 대해 잘 안다면 적재적소에 알맞은 응원 구호를 외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타가 특기인 선수한테 고작 안타 쳐달라고 응원하면 좀스럽죠.”
-네 맞아요! 야구가 뭔지도 몰랐으면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었을 거예요.
-어찌나 신이 나서 설명하시는지, 저까지 흥이 올랐다니까요?
-오늘 못 본 장면 빼고 다 알 것 같아요! 쳐서 나가면 안타! 네 번 참으면 볼넷!
기생들의 반응이 혜림의 활약상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혜림에게 동화되어서 아주 그냥 야구에 다들 푹 빠진 것 같다.
“하하하. 혜림 씨가 정말 열심히 설명해주셨나 보군요. 그럼, 다음에 본격적으로 논의할 날짜를 잡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해산하는 것으로 할까요?”
-에이, 이렇게 헤어지면 아쉬운데···.
-경기도 끝났는데 우리 한잔해요!
-맞아 맞아. 우리 가게로 가시면 되잖아요~.
-설마, 우리가 싫으신가요? 왜 이렇게 빨리 보내려고 하시지?
크악, 한계에 다다를 것 같다. 제발 그만 좀 해주세요. 이제 빨리 기운도 없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도 힘들게 경기한 터라, 뒤풀이가 고픕니다. 하지만 며칠 뒤에 정말로 중요한 시합이 하나 있거든요.
그날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시합이라, 그때까지는 저희 모두 야구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저희도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기생들이 깔깔대며 웃었고, 혜월이 말했다.
“호호호, 진지하셔라. 저희도 다 농담이었사옵니다. 물론 저희 가게로 오신다고 한다면 한 상 거창하게 내오려던 것은 사실이지만요. 중요한 시합이 있다고 하셨죠? 저희도 불러주신다면 꼭 가서 응원할게요!”
선수단의 사기가 올라갈 요소가 하나 생긴 것 같다. 오늘은 민수도 있고, 야구를 아예 모르는 채로 왔기 때문에 딱히 뭐가 없었지만, 다음 시합은 일본팀과의 시합이다. 한일전! 무조건 우리를 응원하겠지!
“말씀만으로도 힘이 되네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혜월과 기생 동료들도 떠나갔다.
이제 오늘 경기 결과에 대해, 우리끼리 결산을 할 때다. 경기장을 정리하고 길례태와 제이손도 돌아왔다. 길례태는 와서 칭찬으로 시작했다.
“오우, 오늘 명경기였어요! 조금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발휘해 준 집중력! 너무 멋있었습니다! 한진 선수도 출전 안 하고, 영준 선수도 제 컨디션이 아니었는데도, 이 정도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전력의 반 이상인 한진이 없었다는 점은 동의할 만하다. 하지만 명백히 전력이 낮았던 덕어학교를 상대로 이런 똥줄승은 마냥 칭찬할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민수가 예상외의 활약을 했다고는 해도 말이다.
한진은 이런 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는지, 길례태의 당근에 이어 채찍을 들었다.
“칭찬할 점도 많았지만, 지적할 점도 많은 경기였습니다. 특히, 경기 초반 상대 투수가 한 의외의 호투와 포수의 트래쉬 토크에 말려 타석에서 흥분했던 점이 매우 아쉽습니다.”
순간 조용해지는 선수단 분위기. 특히나 찔리는 표정을 짓는 것은 김산, 김훈, 허영수였다.
“하지만 빛나던 상황 판단도 있었습니다. 특히 요주의 타자를 상황에 맞게 적절한 방법으로 처리한 것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기가 살짝 살아나는 김훈과 허영수였다. 한진 녀석, 채찍만 줄줄 알았는데, 당근도 좀 줄줄 아는걸? 근데 김산은 좌불안석이다.
“김산 선수.”
한진의 부름에 김산은 평소와 달리 긴장을 바짝 한 채 대답했다.
“네···넵! 죄송합니다!”
그런 김산을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하는 한진.
“오늘 앞선 타석들은 한마디로 최악.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상대 투수는 흔들리고 있는데 참지를 못하고 방망이를 휘둘러 알아서 자멸해 줬죠.”
다들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한진은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마지막 타석의 그 집중력은 정말 프로급이었습니다. 주위의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는 존(zone)안에 들어갔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고도의 집중력으로 안타를 만들어 낸 것은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그제야 죽상이던 김산의 표정도 밝아졌다. 하지만 당근은 당근이고 한진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이어갔다.
“우리는 오늘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봐야 합니다. 잘된 점은 다음에도 이어가야 하고, 잘못된 점들은 다 같이 보완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모두 고생 많았고, 이제 정말 중요한 다음 경기인 성남구락부전, 다 같이 힘을 합쳐 준비해봅시다.”
역시 한진은 대단하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건 한진의 인터뷰를 모두 봐온 나로서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진에 대한 이미지는 커뮤니티나 기자들의 썰을 보면 자기 할 일만 딱 하는 타입이었고, 실제로 이곳에 왔을 때도 그런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진은 그런 면이 사라지고 리더십까지 갖춰가고 있었다. 리더십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능력이라 생각하는데, 한진은 필요하다고 느끼니 자신과 동떨어진 능력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여하튼, 한진의 마무리 말과 함께 다 같이 박수를 치며, 덕어학교와의 2차전은 마무리되었다.
對 덕어학교 전
유지훈 8이닝 2실점 4탈삼진 6피안타 5볼넷
한민수 3타수 2안타 1볼넷 1득점 1병살 2루타 1
이상 덕어학교
김훈 9이닝 1실점 9탈삼진 4피안타 4볼넷
4타수 1안타 1타점 2삼진 결승타(8회 말 좌전 안타)
김만복 3타수 2안타 1볼넷 1득점 1실책
김산 4타수 1안타 1타점 1득점 2삼진 2루타 1 1실책
채영준 3타수 0안타 3삼진 1볼넷 3실책
우한진 끄덕1 한숨4 도리도리1 박수2
1:2 황성 YMCA 야구단 승리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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