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배재학당으로
[1906년 4월 29일 YMCA 건물 앞]
오늘은 한진의 공진단 복용 때문에 좀 여유 있게 도착했는데도, 늘 그렇듯이 한진과 나는 제일 먼저 도착했다. 오늘은 훈련하는 날은 아니니 상관은 없다만, 자꾸 이러면 좀 그런데··· 언제 한번 줄빠따라도 내려쳐야 하나?
한진은 오늘도 도착하자마자 솔선수범하며 이따가 가져가야 할 야구 장비와 도구를 모두 챙기고 있었다.
다행히도 엊그제 미리 출발하는 일행들 때문에 정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그냥 꺼내놓으면 됐다. 물론 양이 상당히 많아서 그것만 해도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파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자, 길례태와 제이손에 이어서 영복이와 만복이까지 한명 한명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들 뒤로 예상치 못했던 한 명이 더 보였다.
“영준이 형님~! 저도 왔습니다!”
그건 바로 한민수였다. 얘는 덕어학교 소속이야, YMCA 소속이야?
“민수야, 우리 다른 곳으로 야구 가르치러 파견 나가는 건데 너는 왜 왔냐?”
민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영준 형님···. 우리가 어떤 사이입니까··· 바로 지옥의 합숙훈련을 함께 견딘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때 교육까지 다 받지 않았습니까! 도움이 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길례태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오우, 민수군 말대로 입니다. 민수군도 우리 YMCA 합숙 훈련을 마쳤기 때문에 이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선수이고, 오늘 영준씨가 가봐야 할 곳이 둘만으로는 좀 벅찰 수 도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 생각해보니 한진이가 아무리 교육을 잘해놨다고 하더라도, 만복이와 둘만 교육을 간다면 나도 몸을 많이 써야 했을 텐데, 민수 녀석이 함께 간다면 내 몸이 더 편해질 것 같은데?
“흠흠··· 너의 필요성에 대한 길례태씨 말씀도 있고, 네 말도 듣고 보니, 우리가 함께 쌓았던 그 날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는구나. 그럼 ‘특별히’ 나를 따라 오는 것을 허가할 테니, 대신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그 말을 듣자, 민수 녀석은 폴짝 뛰면서 적극 어필하였다.
“네! 당연합죠!!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근데 형님···. 듣자 하니 오늘 가는 곳이 서대문 부근이라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끝나고 나서 가보기 좋은 곳이 있는데 말입니다?”
응? 에휴, 그럼 그렇지. 이 녀석도 꿍꿍이라고 하면 김산 못지않은 녀석이다. 어떻게 김산 녀석이랑 똑같은 사고회로를 보여주는 거지?
“에휴···. 너 설마 혜월이냐?”
“네? 아···아닙니다! 혜월이라뇨!”
뭐? 혜월이가 아니라고? 그럴 리가 있나.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나.
“다 알고 있다, 이 녀석아. 뭔 혜월이가 아니야. 김산 녀석도 딱 네놈이 한 말이랑 똑같은 말 했었다. 서대문 쪽으로 배정받자마자 싱글벙글했던 거 말이다.
네놈들이 그 부근에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이 혜월이가 있는 기방밖에 더 있겠느냐?”
“아···아닙니다! 기방은 맞지만 혜월이가 아니라고요···. 다른 아이를 만나러 갈겁니다···.”
엥? 기방은 맞지만 혜월이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고?
“야, 그건 무슨 소리냐. 너 혜월이가 준 손수건을 받고는 평소보다 미칠 듯이 경기에 집중했던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아니··· 그게 사실··· 알고 보니 그게 혜월이의 손수건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 날은 오지 못했던 홍란이라는 아이가 혜월이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더라고요.”
뭐라고? 그거 나라면 뭔가 배신감이 느껴질 것도 같은데···?
“그럼 혜월이가 너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냐?”
민수는 손을 휙휙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실 그날은 혜월이가 저에게 손수건을 줬다는 사실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서 손수건을 건네받으며 했던 말을 못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번 성남 구락부와의 경기 때, 자신의 손수건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날 홍란이를 만나게 되었죠, 흐흐흐···.”
으이그···. 이런 줏대 없는 자식을 봤나. 누군가를 한번 좋아했으면 끝까지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 홍란이라는 아이는 이쁘더냐?”
과거부터 현대까지 남자끼리 하는 국룰 질문일 것이다.
“하하하··· 그걸 제 입으로 말하면 좀 그렇죠? 뭐, 제 눈에는 제일 아름답다고 해놓을까요?”
얼씨구, 저번까지는 산이 녀석과 함께 혜월이 없으면 죽으려고 하던 놈 아니었던가? 이거 완전 금사빠였네.
“에휴, 벌써 푹 빠진 것 같구나. 근데 너 혼자 가면 되는 거지, 왜 나를 데려가려는 것이냐?”
민수 녀석은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한 대 툭 치더니 얘기했다.
“에이, 우리 홍란이 한번 소개하고 싶어서 그렇죠, 하하하. 그리고 혜월이가 올 때 형님도 모시고 올 수 있으면 모셔오라고 했었습니다.”
“응? 혜월씨가 나를 왜?”
“저번에 경기 끝나고 뒤풀이 때, 형님은 이곳저곳 술 받으러 가시느라 정작 기방 일행과는 제대로 놀지도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이상한 노래나 부르다 쓰러지셨지···.”
아니 이 자식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흠흠···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그날 한진이와 술을 마신 이후에는 기억이 잘···.”
“그렇다고 칩시다~. 어쨌든 저는 오늘 몸을 던져서 가르칠 테니까 형님도 끝나고 가시는 것으로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뭐··· 나도 기방을 간다고 손해를 볼 건 딱히 없지···? 이제 응원단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정당한 핑곗거리도 있으니 말이야.
“그래 알았다. 대신 너 오늘 진짜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넵넵! 알겠습니다! 자자, 만복아 너도 기합 좀 넣어라! 오늘 열심히 가르쳐야 하니까!”
그렇게 출발하기도 전부터 민수 녀석 때문에 기가 쭉 빨리고 시작하였다.
그렇게 전원이 모이고 나니, 길례태와 제이손은 장비와 도구를 배분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받고 나서는 길례태가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자자, 우리도 이제 출발합시다! 위쪽으로 간 단원들도 이제 다 도착을 했고, 우리와 비슷하게 가르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YMCA 전 단원들이 함께한다는 얘기죠! 그러니 구호 한번 외치고 갑시다!”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길례태는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아··· 이거 혜림씨 없으면 맛이 안 나는데 말이지···. 그래도 다들 손을 올리니 나도 마지 못해 손을 올렸다.
“최초! 최강! YMCA! 잘해보세!”
우리 단원도 아닌 민수 녀석이 어째 제일 큰 목소리로 신나게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미리 정해놨던 세 조로 찢어져서 각자의 목적지로 야구 교육 파견을 나갔다.
···
···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서대문과 남대문의 사이에 있는 배재학당이었다.
사실 편의상 서울의 서쪽, 중앙, 동쪽으로 분리하여 갈 곳을 나눈 것이지, 우리가 향한 곳은 사실상 남쪽에 가까웠다. 괜히 김산 녀석이나 민수 녀석이 기방과 가깝다고 좋아하던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발을 디딘 곳은 방금 말했듯이 말로만 들었던 그 유명한 배재학당이었다. 사실 배재학당은 이름만 들어봤지,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다.
직접 와보니, 현대의 학교와는 비교하기 좀 민망한 아담한 크기의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이었다. 그래도 안에는 강당과 도서실 정도는 있어서, 딱 기초적인 학교의 기능이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잠깐 배재학당을 구경하고는, 학생들을 만나기 전에 우선 인솔 교사를 찾았다. 그때, 두리번거리는 우리 앞에 안경을 낀 외국인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어떤 일로 찾아오셨죠?”
이제 외국인이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아, 혹시 배재학당 쪽 선생님입니까? 반갑습니다. 저희는 오늘 야구를 가르치러 파견 나온 황성 YMCA 야구단 소속 단원들입니다. 저는 채영준, 이쪽은 김만복, 그리고 이쪽은··· 오늘만 YMCA 소속인 한민수입니다.”
“오! 안 그래도 여러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셰필드라고 합니다. 조선말을 괜찮게 하죠?”
그렇긴 한데··· 내 주위에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오···. 딱히 놀랍지는 않소만···.
“네! 외국인분이 너무 자연스럽게 한글로 대답하셔서 놀랐습니다. 근데 오늘 저희가 어디서 가르치면 될까요?”
“아,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따라오시죠.”
그를 따라간 곳에는 YMCA 건물 마당보다 조금 더 큰 운동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아,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여러분이 일찍 오셔서 말입니다. 조선에 오고 나서 이렇게 시간보다 빨리 나온 분들은 처음 뵙는 것 같군요.”
나도 느끼는 것이지만, 괜히 옛날에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있던 게 아닌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시계가 잘 보급되지 않았을 때이기는 하지만, 시계가 충분히 보급되고도 꽤 오랜 뒤까지도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으니 오케이인가?
“마침 잘됐군요. 어차피 저희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보이니 말입니다.”
나는 운동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 그러시구나. 그렇다면 저는 기숙사로 가서 학생들을 인솔해 오겠습니다. 그동안 준비를 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하더니 셰필드는 기숙사를 향하여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교육을 할 준비를 했다. 야구 장비와 도구들을 한쪽에 정리해 놓고, 아무것도 없는 운동장에 선을 긋고 베이스를 설치하였다.
한진이 하는 것을 몇 번 보고 도운 경험이 있어서 꽤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물론, 만복이와 민수의 도움도 컸다. 특히 민수를 데려온 것은 지금 생각해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민수가 워낙 놀기를 좋아해서 그렇지, 일단 일머리는 꽤나 좋은 편이다. 남대문에서 제일 잘 나가는 포목상 집의 아들이라는 티가 난다고 해야 할까?
그 바쁜 포목상 집에 몰려오는 손님을 받을 때는 이 녀석도 한몫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이것저것 잡일을 배워와서 그런지, 특히 선 긋고 물건 나르는 것은 익숙하다는 듯이 해냈다.
우리가 일을 서서히 마무리할 때쯤 셰필드가 걸어갔던 방향에서 다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타났다. 저들이 바로 배재학당의 학생들? 그 무리의 앞에는 셰필드가 보였다.
“오! 영준씨 벌써 준비를 전부 하셨군요! 역시 그냥 성남 구락부를 이긴 YMCA 야구단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길 잘한 것 같군요. 자, 여기 있는 학생들이 바로 우리 배재학당의 학생들입니다. 다들 인사!”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와! 저 저번 경기 봤습니다!
이곳의 학생들은 정말 학생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외국어학교에는 나나 한진 정도의 나이로, 늦깎이라고 불려야 할 나이의 학생들도 꽤 많았는데, 이곳은 대부분이 만복이보다도 어린 나이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진짜 뉴비들을 만난 것 같아서 가르칠 의욕이 생긴다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이런 내 순진한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래, K-잼민이의 유전자가 어디서 왔겠는가? 당연히 저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겠지···.
교육을 시작하려는 내 앞에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