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YMCA 야구 교육 작전
그렇게 양기탁과 5년 200원의 광고 계약을 체결하고 악수를 나뉜 뒤에 헤어졌다.
“영준 선수! 다음에는 혜림양도 함께 만나서 식사라도 합시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꼭 해야죠. 그럼 다음에 또 뵙시다. 양 총무님!”
바로 옆이 집이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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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마지막으로 만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평소와 같이 야구 훈련을 하러 가거나, 야구장 건축에 대해 구상을 하거나, 소설을 잠깐씩 쓰고는 지냈다.
분명히 고종은 조만간 연락을 준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금 답답해질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혜림에게 물어보기도 힘든 게, 그녀 역시 뭐가 그리 바쁜 것인지는 몰라도 마주칠 새 없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래, 기다리면 언젠가 소식이 오겠지. 내가 아직도 디지털 시대에 찌들어 있어서 이렇게 급한 거겠지.
사실 이 시대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느긋하고 여유가 있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름이 느껴질 정도였다. 과연 이 사람들이 뭐든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 사람들의 선조가 맞는지 가끔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본성 자체가 글러 먹었다는 소리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도 현대처럼 치열하게 노력한다면 성공에 다가갈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모습일지 모르는 것이다.
즉, 그들의 모습은 그냥 시대적 환경에 따른 특성이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소식이 없다 보니 이런저런 푸념을 하게 되네. 이럴 때는 소설이나 계속 써봐야겠다.
사실, 소설 자체는 꽤 많은 분량을 써놨고, 대한매일신보라는 연줄이 있다 보니, 당장이라도 연재가 가능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내가 정식 연재를 시작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내가 연재를 시작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신소설의 연재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를 공부해봤다면 예술 분야에서 지나가듯 언급되는 소설이 하나 있다. 바로 이인직의 ‘혈의 누’이다.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를 찬양하는 듯한 색체가 짙은 친일 문학으로도 꼽힌다. 당연하게도 이 글을 쓴 이인직 역시 친일파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이 소설의 연재를 기다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혹시라도 내가 먼저 연재하게 됨으로써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내 소설에 붙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미 내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를 바꾸는 일이 되고 있겠지만, 되도록 역사의 흐름대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내가 암기한 기억에 의하면, 마침 혈의 누가 연재된 시기가 딱 올해인 1906년이다. 정확히 몇 월에 연재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그다음은 대비 효과를 누리려는 것이다. 나는 영웅이 부각 되려면, 악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소설 자체로도 대중들의 열광을 끌어낼 수도 있겠지만, 정반대 위치에 소설과 함께 연재된다면 그 효과가 더 좋을 것이다.
이를 노려, 나는 내 소설과 혈의 누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대비되게 하려고 준비 중이다. 일단, 연재처부터 친일 신문으로 변질한 만세보와 일제에 끝까지 맞서 싸우게 되는 대한매일신보이다.
소설의 내용도 일본을 구원자로 여기는 혈의 누와 달리, 내 소설은 체포가 두려워 대놓고는 아니지만, 여기저기에 일제의 만행들을 넣고, 그들을 돌려 까는 내용을 넣어놨다.
그리고 내 소설의 가격은 싸다. 이 시대에 책 한 권은 30전쯤 되는데, 이는 만오천 원 정도의 가격에 분량도 현대의 책들에 비해 반토막이니 책 한 권에 3만 원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현대에도 책 한 권에 3만 원이라고 하면 구매 욕구가 확 떨어지는 가격일 텐데,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보다는 확 가격을 낮춰서 현대의 만화책 가격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시대의 출판 환경을 우선 알아봐야 하니, 나중에 대한매일신보에 찾아가 봐야겠다.
어쨌든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해보면 대중들이 어느 소설에 열광할지는 벌써 눈에 훤하지 않은가?
이인···직. 아직 본적도 없는 그였지만, 내 소설의 희생양으로 점찍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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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힘을 쏟는 동안 며칠이 더 흘러서 고종과 만난 지 열흘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고종의 연락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포기를 했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고종이 연락을 안 준다고 내가 계속 기다리고, 훈련하는 거 말고는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오래간만에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했던 합숙 훈련의 성과를 내러 가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오우, 여러분. 다들 모이셨습니까? 오늘 모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바로 야구의 저변을 확대하러 파견을 나갈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저번 경기 결과로 인한 반향인지, 우리 YMCA에 야구 지도를 부탁하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도 야구는 외국인 교사가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흐름에 우리의 경기 결과가 기름을 부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동안 훈련만을 해오던 단조로운 일정에서 벗어나, 어떤 사람은 저 멀리 지방까지도 다녀와야 하는 여러 일정이 잡혔다.
우선 이번 1차 야구 전파 계획은 크게 한양 부근과 평양, 개성 등 북쪽까지가 목표로 결정되었다.
길례태와 제이손은 YMCA의 일정도 소화해야 했으므로, 도성 안의 학교 위주로 파견을 나가기로 했다.
김훈과 허영수는 평양까지 다녀와야 했다. 영수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조금 걱정이 될 법도 했지만, 그 옆에 있는 김훈이 전국 팔도를 다 섭렵하고 다닌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평양까지 보내기로 한 것이다.
나와 현정훈 역시 저 멀리 개성까지 가기로 했다. 내 입장은 그저 한성 부근에서 꿀을 빨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김훈처럼 여러 지방에 다닌 경험이 있는 정훈과 한 조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진과 김영복, 그리고 김산과 김만복 또한 각각 한양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학교로 파견이 결정 났는데, 김산 이 녀석은 또 싱글벙글이었다. 아무래도 야구 교육을 끝마치고는 가까이에 있는 혜월에게 달려갈 생각인 것 같다.
뒤늦게 들어온 깍두기 상혁은 나와 정훈과 함께 개성으로 가는 것으로 정해졌다. 내심 김훈과 함께 가는 것을 원했던 눈치이나, 그래도 잠깐이나마 김훈과 동행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그렇게 파견 위치가 정해진 뒤에, 다음으로 길례태는 거대한 책을 들어 올렸다.
“자, 그리고 여러분! 저번에 작성했던, 야구에 관한 모든 것의 인쇄가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3권이 한 묶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 권에는 야구 규정, 야구 용어, 야구 교본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은 합숙하는 기간동안 많이 접해봤을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파견에 나가기 전에 한 번씩 정독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편찬에는 다들 아시겠지만, 한진씨와 영준씨의 도움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수!”
-짝짝짝!
-우린 다 알고 있었다고!
-저거 쓰느라 진짜 고생 많았겠네.
민망하게 박수를 한 바탕 받고는 모두에게 책을 수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책을 받자마자 다들 신난 표정으로 책을 휙휙 넘겨보고 있었다.
영수나 상혁, 그리고 김훈처럼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야구 교본을 위주로 살펴봤고, 재미를 찾으려는 나머지 인원들은 야구 용어 모음집을 위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야구 규정집은 인기가 없었는데, 의외로 정훈만이 이 규정집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책을 보면서 다들 한바탕 또 신이 나 있었다가, 다음 순서가 이어지자, 그곳에 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이번 순서는 교육에 필요한 장비를 나누어주는 시간이었다.
“자자, 여러분 이번에는 야구 교육에 쓸 장비들입니다. 아직 예산이 부족해서 많은 수량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여러분이 야구 교육을 수행하는 데에는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조별로 각각 방망이 3개와 야구공 5개, 글러브 2개씩이 주어졌다. 전부 품질이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니었지만, 원래 교육용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어차피 우리가 쓸 물건도 아니니 더더욱 말이다.
그래도 받은 물건을 시험하고 싶은지, 다들 방망이도 휘둘러 보고, 글러브에 공도 던져 보고 있었다. 그 뒤, 길례태는 준비된 것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여러분이 YMCA 교육자라는 증표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길례태는 제이손과 함께 한명 한명씩 투박한 뱃지를 하나씩 달아주었다. 뱃지는 YMCA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정말 별거 아닌데도, 다들 어깨가 으쓱 올라가 있는 모습이었다.
“파견은 내일부터 시작이니 오늘은 훈련 대신 각자 어떻게 교육을 할지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으로 합시다!”
그렇게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우리는 모여서 책도 펴보고, 교육 방식에 대해 토론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혜림이었다.
평소였으면 혜림이 뛸 일은 전혀 없을 텐데 무슨 일이지? 혜림은 도착해서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나에게 무슨 일인지 얘기를 꺼냈는데, 이는 마침내 찾아온 고종의 소식이었다.
“헉헉··· 영준씨! 드디어 황제 폐하께서 야구장에 대해 협상을 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모레 다시 황궁에서 보자고 하셨어요!”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소식이 없는 동안에도 나는 틈틈이 고종에게 약을 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 크게 떨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되면 내 파견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 와···! 드디어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잘 됐군요! 어··· 근데 이렇게 되면 내일부터 있을 야구 교육 파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말을 하면서 슬쩍 길례태를 쳐다보았다.
길례태는 싱긋 웃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줬다.
“아,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겠군요. 그렇다고 지방의 파견 날짜를 바꿀 수는 없으니, 영준씨와 김산씨의 파견 장소를 바꾸는 것으로 하고, 한양 서쪽 지역은 하루 늦춰서 교육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이 기회에 개성을 한번 가보나 했는데, 많이 아쉽게 되었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는 황제 폐하를 뵙고, 열심히 교육을 준비하겠습니다!”
나이스! 뜻하지도 않은 행운이다. 하지만 개성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진심이다. 합법적으로 북한에 있는 땅에 가볼 기회였으니 말이다.
근데 뭐, 이제 원정경기도 다닐 예정이라고 했으니, 그때 기회가 있겠지? 아! 그 덕분에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바로 김산 녀석의 표정을 감상하는 일이다.
김산은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길례태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니, 길례태 선교사님, 아니 감독님. 왜 하필 제가 영준이 형과 바꿔야 합니까? 한진 형님도 계시고, 영복이 만복이도 있는데 하필 저라는 말입니까?”
길례태는 김산의 등을 툭툭 치면서 얘기했다.
“자, 들어보세요. 우선 영복 선수와 만복 선수는 나이가 어린 편입니다. 아직 지방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함부로 외부에 보내기에는 염려가 좀 있죠.
그렇다고 한진 선수를 보내자니, 교육자 수준의 균형이 깨지잖아요. 정훈 선수와 한진 선수, 상혁 선수까지 있으면 너무 과하지 않나요? 그러니 김산 선수가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그렇게 김산의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길례태였다. 나는 절규를 하는 김산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다.
아~ 속이 뻥 뚫리네~. 이제 황제 폐하를 설득할 준비를 편하게 하면 되겠구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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