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성남구락부전 후일담 (1)
그래, YMCA 회관 정도면, 이만한 인원을 수용할만하지, 게다가 오늘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약해 놨다가, 굳이 취소할 필요도 없는 곳이 이곳 YMCA 회관이다.
혜림의 고용인들이 따로 출장을 오게 한 듯한 요리사들과 함께 분주히 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도 싹 차려져 있고, 여기저기서 주려있는 배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회식의 메뉴는 종류 자체는 막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뿐이었다.
우선, 먹음직스러운 고기찜이었다. 아마 갈비찜 비슷한 것 같았는데, 달달한 맛보다는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먼저 다가오는 맛이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색다르게 맛을 즐길 만하다.
그리고 호박전과 같은 채소로 된 익숙한 모습의 여러 전 종류와 생선 전이 올라왔다. 전들은 당연하겠지만, 꽤 익숙한 맛으로 막걸리를 절로 부르는 안주 느낌이 강했다.
다음은 떡이 보였다. 떡은 여기서 한 것 같지는 않고, 미리 주문한 듯했는데, 무려 시루떡이었다. 이곳 생활을 하면서 느낀 바로는, 엄청 비싼 축에 속하는 음식일 텐데도 상 위에 올라왔다.
쫀득하면서 은은한 단맛이 퍼지는 맛 좋은 떡이었다. 원래 떡을 즐겨 먹지 않는데도 이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일과 약과 또한 보였다. 이것들도 평소에 맛보기 힘든 귀한 음식들인데, 마찬가지로 상 위에 올라왔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었음에도, 오늘은 술술 들어갔다.
그렇게 차려진 음식들에 감탄하고 있던 찰나, 밖에서 몇 명이 잔뜩 음식 그릇을 들고 찾아왔다. 근데 어째 메뉴가 좀 낯이 익다. 그리고 이들을 보자 남상혁이 상에 앉으려다 말고 뛰쳐나갔다.
“헉, 주···주인 어르신···. 여기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 정체는 상혁이 일하던 냉면집의 주인장이었다. 급발진해서 뛰쳐나온 전 직장에 상사와의 만남··· 이거 좀 난감한 상황인데?
어쨌든 난 다시 냉면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일단 환영이었다. 근데 멱살잡이라도 할 줄 알았던 상혁의 전 직장 상사는, 상혁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상혁을 끌어안았다.
“상혁아, 우리 가게에서 어렸을 때부터 너를 고생시킨 것 같아서 내심 미안한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보내주려고는 했었다.
그래도 갑자기 가게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는 많이 당황하고 걱정스러웠는데, 네가 이렇게 대단한 일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몰라봤구나. 네가 자랑스럽구나!”
오호, 해피엔딩이네, 해피엔딩이야. 상혁이 녀석, 일을 대책 없이 그냥 그만두고 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런 주인이기에 그렇게 쿨하게 그만두고 나올 수 있었구나.
상혁도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주인을 같이 끌어안았다.
“흑흑흑··· 어르신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주셨다니··· 저는 맨날 일만 시키셔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로만 하면 안 되지. 자, 여기 그동안 조금씩 모아놓았던 너에게 주려던 거다. 받거라.”
냉면집 주인은 상혁에게 봉투를 건네었다. 역시 오고 가는 봉투 속에 싹 트는 우리의 정인 법이지.
“헉···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감격의 상봉을 하는 둘이었는데, 잠시 뒤 냉면집 주인이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꺼냈다.
“저희 상혁이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냉면값만 받도록 하고, 여기 함께 가져온 고기 수육은 제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십시오.”
캬, 이거 개꿀이구만~. 매번 냉면만 시켜 먹었는데, 오늘은 수육까지? 이 시대의 냉면은 아직 미원이나 다시다의 맛이 아니었기 때문에, 육수의 맛이 중요한 음식이었다.
그런 육수의 맛을 뽑아내려면 좋은 고기를 써야 할 텐데, 그렇다면 수육 맛도 보장이 된다는 것이겠지? 사실 오늘 같은 날에는 술을 마실 예정이라 단백질만 있으면 오케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훈훈한 상황이 연출되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한상 거하게 차려진 잔칫상과 함께 YMCA의 승리를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조촐한 다과회 정도였지만, 오늘은 진짜다. 당분간 경기 일정도 없었고, 많은 관중 앞에서 너무나 짜릿한 역전 승부를 펼친 역사적인 날이다. 이건 프로 야구팀도 인정할 경기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오늘은 먹고 마시다 죽을 기세로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은 다른 단원들과 한 잔씩 하면서 얘기를 나눠 보려고 하였으나, 내 의지와는 다르게 기방을 함께 간 파티원인 김산과 한민수에게 붙잡혀서 함께 마시게 되었다.
“영준 형님! 어디 가십니까! 이런 좋은 날에 우리끼리 우선 뭉쳐야죠!”
“그러니까요. 나는 경기 안 뛰었다고 차별하려는 거 아니시죠? 저 목이 쉰 것 좀 들어보십쇼. 진짜 목이 터져나가라 응원했습니다. 이건 혜월이가 증명해줄 것이오.”
아, 잘못 걸렸네. 얘네랑 엮이면 매번 끝이 안 좋은데···. 내 걱정이 무색하지 않게, 이 녀석들은 시작부터 독한 탁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부터 몇 잔을 연거푸 억지로 마시게 되었다. 잔치가 시작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난 해롱해롱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바로 혜림이 다가온 것이다.
“영준씨, 여기서만 계속 마시고 계시게요? 다른 단원들과도 함께 마시는 게 어떠신가요? 이분들은 매번 같이 드셨던 분들이잖아요, 호호호.”
그렇게 말하면서 혜림은 김산을 한번 째려봤다. 어디가냐며 나를 붙잡으려던 김산은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혜림에게 이끌려 다른 단원들과도 한 잔씩 주고받으러 다녔다.
정훈은 한진과 함께 천천히 조용하게 마시고 있었다. YMCA 최고의 거한 둘이 그렇게 마시고 있으니, 무게감이 확 느껴지는 조합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훈은 이곳에서 은근히 미스테리한 존재이다. 몸에 있는 흉터 자국들, 그리고 고종과 나눈 의문의 대화까지···. 한번 취기를 빌려서 들이대 봐?
“아이고, 정훈 형님. 많이 취한 채로 와서 죄송합니다. 저기 김산 녀석 때문에 이거 참···. 이렇게 얘기 나누는 것은 합숙 훈련 때 이후로 처음이죠?”
“크하하핫, 김산 녀석에게 걸리면 뭐 그럴 수도 있지. 저 녀석이 이 야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한량이라 술 마시는 재주만 기가 막혀서 말이지. 그나저나 형님이라니, 내가 연장자기는 해도 그리 차이도 안 나지 않나.”
“하하핫, 그래도 형님의 풍채를 보면 저절로 형님 소리가 나오지 않겠소. 그래도 좀 그러시다면, 현형으로 부르면 되겠소?”
정훈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크하하핫, 그렇게 하게나. 그나저나 자네와 나만 오늘 죽 쓰지 않았나. 같이 죽 쑨 사람끼리 한잔 걸치세.”
그렇다. 나와 정훈만 오늘 타격이 영 별로긴 했다. 그래도 나와 달리 정훈은 참 열심히는 했는데 말이지···.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럼 한잔하시죠.”
나는 정훈과 함께 한잔 들이키고는, 정훈을 한번 떠봤다.
“현형,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좀 물어봐도 되겠소?”
정훈은 뭔가 싶은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별로 물을 게 없을 사람일 텐데··· 뭐,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게나.”
“현형은 대체 어떤 분이오? 다른 게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다른 단원들과 달리 현형에게만 특별하게 말씀을 해주신 것 같아서 궁금했소.”
정훈은 잠깐 시선을 피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건 좀 더 나중에 대답해주겠네. 좀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네.”
흠··· 역시나 아직 호감도가 덜 올라 있나? 취기를 빌리긴 했다만, 내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인데, 아쉽네.
“아, 그런 거라면 괜찮소. 그럼 형 몸의 상처에 대해 혹시 물어도 되겠소?”
이번에도 정훈은 시선을 잠시 피하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음··· 이것도 대답하기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자네한테 이 정도는 얘기해줘도 되겠지. 나는 사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포수 일을 했었다네. 짐승들을 상대하다 보니 여기저기에 상처가 많이 나게 되었지.”
아하, 포수··· 사냥꾼을 말하는 것이겠지? 이것으로 의문점이 상당히 해소되었다. 고종과의 사이도 아마 이와 연결되어있는 것이겠지.
총을 다룰 줄 아는 사냥꾼은 전투 병력으로도 소집되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본 것 같다. 의병 중에도 포수 출신이던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아, 포수···. 그러셨습니까? 어쩐지 풍채도 그렇고 범상치 않으시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정훈과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좀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같이 마시고 있던 한진에게는 엄지 한번 치켜 올려주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다음으로 찾은 것은 영복이와 만복이, 그리고 영수까지 있는 어린 피 3인방이었다.
조선시대는 딱히 술을 마시는 데에 연령 제한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담배도 어린애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맞담배까지 태울 수 있는 낭만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어린 피 3인방은 아직은 술을 딱히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고기반찬과 다과에 눈이 팔려 음식들을 흡입하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복, 만복아 술은 한잔 안하냐?”
“네, 마셔봤는데 저희는 별로 마시고 싶은 맛이 아니더라고요.”
“에잉~ 재미없게 말이야~. 그래 음식은 좀 맛이 괜찮냐?”
“네! 이거 정말 맛있습니다. 매일 먹고 싶어요!”
“내 말이! 진짜 맛있어요.”
“하하하, 앞으로도 경기 열심히 뛰어봐라. 오늘처럼 맛있는 음식 팍팍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야.”
그리고 옆에 있던 영수에게도 말을 붙였다.
“영수도 술은··· 아니다. 그래 영수 군도 입맛에 좀 맞나?”
영복이와 만복이는 그래도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성년의 나이였지만, 영수는 이 시대 기준으로도 아직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술을 권하는 것은 좀 찔렸다.
“맛이 썩 괜찮은 것 같소.”
영수 얘도 참 티키타카가 안된다. 좀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포수라는 거 많이 힘들지? 정말 고생이 많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말이야.”
그 말을 듣더니 영수의 어깨가 살짝 으쓱한 것 같았다. 매번 진중해도 영수는 역시 아직 좀 어리긴 어린 것 같다.
슬슬 이것도 힘들어지는데? 그래도 이제 반을 훌쩍 넘겼다.
상혁은 냉면집 주인장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 건너뛰기로 했다. 저 사람 분명 배달해주고 가는 줄 알았더니, 오늘 장사 일찍 접었다고 여기에서 눌러앉아 상혁과 한잔 걸치고 있었다.
거, 훈훈허이 보기 좋구만.
근데 이제 내 눈앞에는 태산이 하나 보였다. 바로 까칠함의 대명사 김훈이다.
“아유, 우리 김훈 씨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영웅 아닙니까.”
그 말을 듣더니 김훈은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끌끌끌, 나한테 좋은 소리도 할 줄 알았던 양반이었는가? 뭐, 오늘 내가 생각해도 죽을힘을 다해 던지기는 했어? 오늘은 고생한 만큼 먹고 마셔도 상관없는 게지?”
“아이, 또 말을 그렇게 하시나. 내가 좋은 말 할 때는 또 제대로 하는 사람이오. 취해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던져주었소.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신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할 거요.”
김훈은 조금 민망했는지, 술 한잔을 단번에 쭉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거, 싱겁기는···. 오늘 안주들이 참 맛있는데, 안주나 좀 더 주게나.”
민망함을 안주 타령으로 넘기는 김훈이었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몸 건강 관리 잘 하시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지만, 김훈 자네는 우리 팀의 대들보요. 그대가 버텨주지 않으면 경기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 말이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요.”
취기를 빌려 말한 내 진심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더더욱 김훈은 쑥스러워하였다. 에잉, 반응이 영 맛이 없네. 이래서 양반 출신이란···.
그리고 이제 남은 한 사람, 한진에게로 돌아갔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