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YMCA 자체 청백전 (7)
길례태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지금도 길례태가 딱히 처리 못 한 공도 없었던 거 같은데 얼마나 더 잘하려고 저러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우리는 쉬는 시간 동안 한진이 점수를 뽑을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잘 살리자는 것과 길례태가 더 수비에 집중하겠다는 작전이라고 하기도 뭐한, 두 마디를 듣고 다시 경기장으로 나섰다.
6회 초 청팀은 다시 1번 타자인 영복이부터 시작되는 타순이었다. 현일은 길례태를 한번 쓱하고 쳐다보더니 길례태의 끄덕임을 보고는 알았다는 듯이 공을 던졌다.
딱-!
소리부터가 이건 안타라는 듯이 시원한 소리를 냈고, 1루와 2루 사이를 눈 깜짝할 사이에 뚫고 지나가려던 찰나···.
휙- 착!
눈앞에서 눈이 동그랗게 떠질 만한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웬만한 2루수들이라면 흘려보냈을 공이었지만, 길례태는 몸을 던져서 글러브 끝으로 간신히 공을 잡는 묘기와도 같은 다이빙 캐치를 선보이면서 공을 잡아냈다.
그리고 이어서 손목만 까딱여서 1루에 있는 한진에게 바로 공을 토스하였고, 그대로 선두타자 영복이를 아웃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수비에 더욱 힘을 써보겠다는 길례태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거다.
- 와아!
- 저건 무슨 묘기 같은 움직임이지?
- 외국인 양반이라 그런지
길례태의 환상적인 수비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래그래 이런 플레이를 보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겠지.
청팀의 벤치도 혀를 내두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나였어도 상대 팀이 저런 타구까지 잡아버리면 이건 뭐 점수를 내지 말라는 얘기니 전의가 상실되었을 것 같다.
그래도 다음 타자인 만복이는 길례태가 수비 기어를 올린 상황에서 나름대로 영리하게 대처를 했다. 영복이와 만복이는 쌍둥이고 신체조건이나 스탯상으로도 비슷한 선수들이지만, 영복이가 좀 더 운동신경이 좋고 본능에 따르는 타입이라면, 만복이는 운동신경은 떨어지지만 소위 말하는 뇌를 쓰는 플레이에 좀 더 능했다.
만복이는 현일의 공을 길례태의 수비를 피할 수 있는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보냈다. 하지만 만복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길례태의 수비집중으로 인해 윤상의 수비 또한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길례태가 넓은 범위의 수비를 맡아줌으로써 윤상은 이제 아까보다 좁은 범위를 확실하게 잡아내기만 하면 되는 상황으로 수비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고, 원래 같았으면 3유간을 절묘하게 빠져나갔을 수도 있는 타구가 윤상의 범위 안에 걸려든 것이다.
게다가 윤상 또한 방금 길례태가 했던 다이빙 캐치를 어설프긴 해도 본능적으로 따라 해냈고, 2번 연속으로 호수비가 나오자 관중들은 또다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어서 남상혁은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나게 만들고는 청팀의 6회 공격이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우리의 공격 기회. 시작은 바로 우리의 점수를 확실하게 책임져줄 한진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한진의 앞에 주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주자가 없어서 그런지 저번 타석과 달리 이번에는 한진을 제대로 상대하려는 김훈이었다.
김훈의 1구는 한가운데 높은 공. 제구 난조라거나 자신의 공을 과신했다거나 한 게 아니라 기왕 얻어맞을 거 빠르게 얻어맞자는 체념한 듯한 공이었다.
빡-!
그리고 그러한 의도에 맞게 공은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담장을 넘어가 홈런이 되었고, 이제 점수는 2대2 동점이 되었다.
-와아! 또 홈런이다 홈런!
-백팀은 저 우한진이라는 선수 혼자 점수를 내네? 정말 대단하군!
-우한진! 우한진! 우한진!
당연한 얘기지만 관중석은 다시 한번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고, 한진의 이름은 경기장이 떠나가라 외쳐졌다. 이번 경기는 나도 선수로 경기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관중석에서 응원하며 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 이러다가 우리 에이스 망가지는 건 아닌가몰라 싶기도 했지만, 김훈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김훈은 그냥 줄 점수를 줬을 뿐이라고 생각하고는, 빠르게 다음 타자들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화풀이라도 하듯이 다음 타자인 김산, 현정훈, 그리고 나를 상대로 차례대로 뜬공과 삼진 2개로 처리하고는 이닝을 마무리했다.
동점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제 우리 또한 확실한 점수를 낼 기회는 사실상 사라졌다. 한진이라는 치트키는 다음 타석 때는 무조건 걸러질 것이고, 남은 3회 동안 한진의 타석이 두 번이나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승리’를 하려면 더이상 한진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김훈을 공략해내야 하는데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으니 문제이다.
어쨌든 지금은 7회 초, 다시 우리가 수비할 차례이다. 청팀은 다시 4번 영수부터 시작되는 좋은 타순. 아까는 청팀에게 주어진 스트라이크존 패널티 덕분에 이들을 쉽게 넘길 수 있었지만, 아까 한 차례 겪어봐서 이번에도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영수는 이미 재빠르게 스트라이크 존을 다시 설정해놨다는 듯이 현일이 최대한 애매하게 던진 공들마저 매섭게 커트해냈다.
확실히 아까는 가만히 놔두면 볼이 될 공이라서 굳이 칠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지, 쳐야 할 공이 된 이상 공을 맞히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었다.
딱!
공 몇 개를 커트해내면서 간을 보던 영수는 상대적으로 칠만한 밋밋한 공이 들어오자 거침없이 방망이를 돌렸고, 공은 경쾌하게 날아가고 있었는데···.
휘익- 퍽!
길례태는 이번에는 수직으로 높이 점프를 뛰더니 공을 잡아냈다. 마치 모 야구게임에서 악명 높았던 하점이라고 불리는 하이점프캐치 자세였다.
관중들은 이번에는 환호고 뭐고 그저 와··· 하며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만큼 이건 말이 안 되는 수비였다. 한진도 수비수의 송구미스로 높게 와서 빠질 뻔한 공을 잡아본 적은 몇 번 있지만, 상대방의 타구를 공중에서 그대로 가로채는 이런 수비는 아직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보는 우리도 황당할 정도인데, 안타를 도둑맞은 셈이나 다름없는 영수는 어떻겠는가? 영수는 공을 때리고 1루로 질주하려던 중에 길례태의 수비를 보자 혀를 쯧 하고 찼다.
이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리액션인데, 영수가 냉소적인 면이 있기는 해도, 김훈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예의를 잘 갖추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런 영수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올 정도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다음 타자인 김훈은 앞서 나가다가 동점이 되어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상황이다 보니 체력 안배고 뭐고 답답해서 내가 친다라는 마인드로 타석에 임했으나, 조급해진 채로 타석에 들어서서 그런지 영 힘을 못 쓰고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상대적으로 힘든 두 타자를 상대하고 나서 그런지 구현일이 김현장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확실하게 수비수를 믿고 던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으니 하위타선을 상대하는 것에 한해서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여유를 바탕으로 현장에게 땅볼을 유도해냈고, 길례태는 자신에게 굴러온 공을 여유 있게 처리하여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경기는 7회 말, 어째 계속 보던 거 또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시 7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회였다. 마찬가지로 재방송이라도 틀어놓은 듯이 7번과 8번 타자인 성학수와 구현일은 각각 빠르게 아웃이 되었고, 결국은 또 2사 상황에서 길례태의 차례가 돌아오는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아쉬운 상황에서 길례태는 또 열심히 커트 놀이를 시작하며 김훈의 진을 빼놓고 있었다. 그렇게 13구의 승부 끝에 길례태는 또다시 볼넷으로 출루하였고, 타석에는 1번 타자 윤상이 들어섰다.
그리고 윤상을 향해 김훈이 1구를 던지는 순간, 갑자기 1루에 있던 길례태가 뛰기 시작했다. 오늘 양 팀 통틀어서 단 한 번도 도루 시도가 없었는데, 주력은 빠르다고 볼 수 없는 길례태가 누구도 예상 못 한 타이밍에 2루를 향해 달려갔다.
영수도 당황했는지 공을 잡은 대로 재빠르게 던져보았지만, 갑작스럽게 던져서 그런지 공은 만복이의 글러브를 살짝 넘어가게 되었고, 재빠르게 중견수를 보던 상혁이 달려갔지만, 상혁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2루를 돌아 3루, 그리고 홈까지 길례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의 발로 점수를 만들어 냈다. 다시 한번 길례태의 야구 센스에 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우리 팀이 점수를 냈지만, 이 어이없는 상황에 다들 입만 벌린 채로 그저 와- 소리만 내면서 길례태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네고 있었다.
관중들도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이가 없었는지 다시금 입만 벌린 채 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하며 황당하다는 리액션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팀과 관중들도 이런 심정인데, 당한 당사자들은 어떻겠는가? 김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헹하고 코웃음을 냈고, 영수와 만복은 한참을 입맛만 다시면서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이번 회 안 끝났어 이 양반들아. 난 괜찮으니 정신 차리고 다시 경기에 집중해!”
하지만 실점을 기록한 당사자인 김훈이 수비수들에게 자신은 괜찮다면서 수비수들에게 다시 정신줄을 부여잡으라고 독려했고, 윤상을 잡아내며 간신히 이닝을 마치는 것에 성공하였다.
한진을 제외한다면 길례태가 점수를 낼 것 같기는 했지만, 그의 앞에 주자도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만들어 낼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얼굴이 환해진 것은 현일이었다. 현일은 수비수의 도움이 있기는 했다지만, 그의 기량에 비해 정말 예상치도 못한 호투를 펼치며, 최소한의 실점을 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수비수들이 이렇게 잘해주는데도 자신의 기량 때문에 팀이 뒤처져 있다는 자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현일에게 길례태가 낸 점수는 자신감을 회복하게 만든 좋은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현일은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올라간 만큼 던지는 공에도 자신감이 붙었다는 티가 났다. 8번과 9번 타자인 송중연과 박근삼을 삼진은 아니어도 빠르게 땅볼로 손쉽게 아웃시켰다.
하지만 그런 현일의 자신감은 여기까지였다.
9번 타자로 나온 제이손은 앞선 길례태의 활약에 자극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작정하고 나온 듯했다.
아까 너무 최선을 다하는 거 아니냐고 가볍게 핀잔을 줬던 길례태가 저런 슈퍼 플레이를 연속으로 보여줬을 때, 이건 반칙 아니냐며 가볍게 티격태격 했는데, 그럼 이제 제이손도 그렇게 해보라는 길례태의 말을 철저히 이행하려는 듯했다.
팍!
그리고 이어진 타석에서 오늘 경기 중에 들린 타격음 중 가장 호쾌한 타격음이 들렸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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