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화. 석화단과의 혈투 (1)
양기탁은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다 좋은데,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석화단에게 벌써 아우성을 친다는 얘기가 있소. 안 그래도 훈련 구경도 못 하게 통제하여 민심이 안 좋은데, 개성에서 온 사람들도 소문을 퍼트리고 말이오.
석화단을 너무 악인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오만, 괜찮은 거요? 그래도 잠깐이나마 알고 지내던 이도 있으니 조금 걱정이 되오.”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살았어도, 인터뷰를 통해 충분히 뒤집을 기회를 준겁니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헛발질했을 뿐이고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데 어쩔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아직 정말 마지막 기회가 있기는 합니다.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그들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내 말을 들은 양기탁은 조금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기웅이 인간성과는 별개로 알고 지냈던 시간이 있다 보니 이해는 간다.
특히 일본의 압박이 심해져 가는 상황에서 같은 민족끼리의 분열을 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거군······. 알겠소. 최선을 다해주시오. 아, 그리고 우리 측에서 기자를 보낼 테니, 경기 끝나고 인터뷰 잘 부탁드리겠소.”
“그거야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확실히 밀어드려야죠. 그럼 우리 경기 기대해주십시오.”
[1906년 6월 2일 동대문 임시 야구장]
내 우려와는 달리, 이번에도 동대문 야구장에는 관중들로 꽉꽉 채워졌다. 역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광고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 한양 이곳저곳에 현수막도 걸고, 무엇보다 대한매일신보에 광고를 돌렸으니 말이다.
우리가 정식으로 광고를 넣은 것은 대한매일신보가 유일했지만, 야구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가니, 다른 신문사도 어쩔 수가 있겠나? 다들 야구 기사를 어떻게든 집어넣으려고 안달이었다.
어쨌든 사람들로 꽉 찬 야구장을 보고 있으니 뿌듯했다. 단, 아쉬운 점이라면 이번에는 경기 홍보를 제외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정식으로 야구장이 지어지기 전이니, 경기가 열릴 때마다 한 가지씩이라도 시도를 하고 싶었는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슬슬 여름이 시작될 때라, 음식 판매를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이렇게 사람이라도 많이 와준 게 어디인가 싶다. 이로써 그냥 야구 시합 자체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고 봐도 되니 말이다.
관중들은 꽉 찼지만, 오늘은 고종 황제나 기방에서 단체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아, 저기 혜월이와 홍란이는 와 있다.
혜월이야 야구에도 어느 정도 빠져있기도 했고, 우리 팀의 경기는 빠지지 않고 왔다. 그리고 홍란이 찾아온 이유는··· 말해서 뭐하는가. 오늘 민수가 경기에 출전하는 날이니 그렇다.
대신 오늘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는데, 바로 배재학당의 학생들이었다. 배재학당의 학생이 두 명이나, 그것도 한 명은 오늘 경기에 주전으로 출전을 하였으므로, 이를 구경하기 위해서 단체로 찾아온 것이다.
내가 오늘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더더욱 아쉬워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저번에 배재학당에 갔을 때, 승리한 팀과 패배한 팀 모두에게 닭죽 이용권을 지급하기로 했던 일이 있어서 그렇다.
나는 이점이 내심 찔렸기 때문에, 경기 시작 전에 배재학당 학생들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 저번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늘 좋은 경기로 보답할 테니, 이번 한 번만 넘어 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닭죽 약속은 유효하니, 다음에 경기에도 꼭 찾아와 주세요!”
-네! 영준 선생님!
-오늘은 우리 형들 응원하러 온 거라 괜찮아요!
-다음에도 꼭 보러 갈게요. 그때는 꼭 닭죽 주셔야 해요?
배재학당 학생들과의 접선을 마무리하고, 석화단과 우리의 라인업을 살펴보면서 경기를 그려보기로 했다.
<석화단 라인업>
1번 타자 우익수 김강선
2번 타자 좌익수 신사혁
3번 타자 1루수 이기웅
4번 타자 투수 장성훈
5번 타자 유격수 유성인
6번 타자 우익수 정상현
7번 타자 중견수 오승균
8번 타자 2루수 김현식
9번 타자 포수 한판석
이기웅은 참, 사람이 꾸준하기는 한 것 같다. 석화단에 가서도 죽을 사(死)라고 4번 자리를 피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근데 이는 석화단의 선수단 구성상 나쁘지는 않은 구성이기는 하다.
기웅 때문에 억지로 맞춰진 듯한 신사혁-이기웅-장성훈의 2, 3, 4번 라인업이 오히려 현대야구에서라면 정석으로 여겨질 것도 같다. 만약 이게 기웅 때문이 아니라 노린 것이라면 조금 놀라울지도?
오늘 주의해야 할 점은, 상대 팀의 뛰어난 운동신경과 불과 며칠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오늘은 수비 시프트로 상대 타구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순전히 힘 대 힘으로 맞붙어야 한다.
<황성 YMCA 야구단 라인업>
1번 타자 유격수 김영복
2번 타자 2루수 김만복
3번 타자 포수 허영수
4번 타자 1루수 한민수
5번 타자 투수 김훈
6번 타자 우익수 채영준
7번 타자 중견수 남상혁
8번 타자 좌익수 김현장
9번 타자 3루수 이윤상
반면에 우리 라인업은 참 초라해졌다. 타선에 무게감을 실어주던 사람이 3명이나 빠져버렸으니 말이다.
특히나, 클린업 트리오 중 김산과 우한진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를 긴급하게 투입된 한민수와 투수인 김훈이 차지하고 있으니 무게감이 너무 떨어진다.
게다가 내가 난생처음으로 6번 타자라는 앞 순번의 타선에 배치되어야 할 정도인 것을 보면, 내 뒤 타자들이 얼마나 처참한지 짐작이 되는 라인업이다.
그나마 기대할 거라고는 홍란의 응원 버프를 받고 민수가 저번 덕어학교전 때처럼 각성한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일 텐데, 민수의 상태를 보니 그다지 기대가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타선의 경우는 결국, 후반에 돌아올 한진의 분전을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수비는 김훈의 힘을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고 말이다.
오늘의 선, 후공은 석화단의 요구로 인해 우리가 선공, 그리고 석화단이 후공을 하게 되었다.
야구에서의 선공과 후공은 9회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우리 경기가 8회나 9회에서 역전이나 승기를 굳혔던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우리에게는 불리한 점 중 하나였다.
오늘도 경기 시간이 되자, 길례태가 나와서 경기장 한가운데로 양 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길례태가 주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길례태만큼 공정하게 심판을 보는 이도 없을 테지만, 석화단은 아니 이기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길례태가 주심을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면서 이 역시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래도 경기의 시작 정도는 길례태가 알려도 되는 것으로 합의를 봤기 때문에 평소처럼 길례태가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황성 YMCA 야구단과 석화단의 야구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양 팀 모두 한 줄로 서주시고 인사!"
저번 성남 구락부와의 경기에 이어서 이번 석화단과의 경기에서도, 인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가볍게 묵례 정도는 했지만, 석화단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우리의 인사만 넙죽받았다.
그리고 악수를 주고받을 때도, 우리는 평소대로 가볍게 악수를 하려는데, 석화단 측은 그 넘쳐나는 힘으로 우리 선수들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손을 꽉 쥐었다. 이 모습을 보고 길례태는 오늘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선수들의 비명을 듣고는 내 앞에 있던 기웅의 손을 그대로 맞잡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만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기웅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경기 시작 전, 석화단과의 기싸움을 뒤로 한 채로 우리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간만에 혜림이 더그아웃에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평소대로 혜림이 우리를 한데 모아놓고는, 이어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새로 온 신참들이 어리버리하게 가만히 있을 때, YMCA 고인물들은 재빠르게 혜림의 손 위로 모두의 손을 올렸다. 그제야 신참들도 손을 올렸고, 손이 다 겹쳐지자, 혜림은 익숙한 대사를 읊었다.
“우리는 조선 최초의 야구팀이자, 조선 최고의 야구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화답하듯 구호를 외쳤다.
“최초! 최강! YMCA! 잘해보세!”
잠시 후, 길례태의 외침과 함께 석화단과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플레이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