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고종 앞에서 사업 설명회
고종 황제를 만난다는 긴장감에 어제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보나 마나 눈은 아마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침밥도 제대로 못 먹고 상을 물렸다. 이건 나에게는 위기 신호이다.
어제 손탁호텔까지는 참 좋았다. 양복도 사고, 맛있는 케이크도 먹으면서 혜림 씨와 담소도 나누고, 이렇게 최상의 시나리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고 나서 고종 황제를 알현할 생각을 하니. 자꾸 긴장되면서 입맛도 없어지고, 제대로 된 답을 못 냈을 때 어떻게 될지 자꾸 상상되는 통에 잠을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
지금까지 봐온 어느 시험보다도 나를 시련에 들게 하는 시험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아무리 내가 한국사 공부할 때마다 씹어댔던 사람이 고종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리에 없을 때나 나라님도 욕하는 개념인 거지, 바로 앞에서 그러면 일단 내 모가지가 온전치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음지에서는 야구선수를 마구마구 욕을 해도 바로 앞에 서 본다면 팬을 자처하게 되는 것처럼, 아마 고종 앞에서 나는 순한 양이 될 것 같다.
다시 한번 체크를 해보자. 우선 다녀와서 다시 몸을 제대로 씻었다. 쓰면 좀 눈치 보일 것 같은 고급 세면도구까지 사용하며, 몸을 박박 씻어냈다.
그리고 양복. 이건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참 각이 잘 잡혀있다. 이걸 입고 간다면, 적어도 한량이라고 불릴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종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예상해 본 대본. 이거라도 준비 안 했으면 진짜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했을 것 같다.
다행히도 따로 고종에게 예의를 갖춰야 할 복잡한 절차는 크게 없는 것 같다. 혜림이 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서구화를 받아들이시면서, 복잡했던 기존의 궁중 예법을 간소화하고 서양식으로 많이 대체하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있잖아요. 제가 또 어렸을 때부터 황제 폐하를 많이 뵈었기 때문에, 저와 만나실 때는 굉장히 편하게 대해주고는 하세요. 오늘도 아마 특별히 이상한 행동만 안 하시면 별일 없을 거예요!”
그래, 나 채영준, 머릿속으로는 온갖 또라이 같은 망상이 가득할지라도, 표면적으로는 안전빵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사람이다. 나는 절대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오늘도 혜림 씨만 믿고 가겠습니다. 그럼 가보실까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벌써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혜림의 발랄한 목소리를 들으니 어느 정도는 힘이 났다.
“네, 제가 만든 자리이니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후훗.”
[1906년 4월 13일 경운궁 수옥헌]
내가 도착한 곳은 현대에는 덕수궁으로 불리고 있는 경운궁의 수옥헌이라는 곳이었다. 원래는 황실 도서관 건물로 이용되던 곳인데, 경운궁 본궁이 화재가 발생하면서 지금은 이곳이 고종이 기거하는 곳이라고 한다.
사극을 많이 접하다 보니, 당연히 기와가 멋들어지는 전형적인 동양풍의 건물을 생각했으나, 이곳은 완전히 2층 벽돌집의 형태인 서양식 건물이었다. 예상과 다른 모습에 일단 당황하였다.
“혜림 씨, 이곳이 황제 폐하가 계신 곳이 맞나요? 진짜 서구화에 진심인가 보네요.”
“그런 것도 있고, 이곳에 얽힌 사정이 다 설명하기에는 조금 많아요. 어쨌든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들어가 볼까요?”
건물의 생김새가 궁금하긴 했지만, 두리번거리는 것조차 지금은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나는 바짝 긴장을 한 채, 혜림의 뒤만 보며 계속 걸었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경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신하들이 보이는 방 앞에 도착했다. 혜림이 문 앞을 지키던 사람과 얘기를 나누자 이윽고 고종에게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드디어 고종을 만나는구나.
문을 열자 그곳에 보이는 것은 황색의 곤룡포를 입고 앉아있는 왜소함이 확실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만만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친근함이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고종의 경우 당시 사람들이 꺼리던 사진 찍기에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역대 조선의 왕 중에 제일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물론 제일 후대 왕인 점도 있지만) 왕이다.
덕분에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봤던 그 모습이 내 머릿속에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었는데, 내가 본 고종의 모습 또한 각인되어 있던 그대로였다.
차이점이라면 아무리 현대에서는 고종이 호구 이미지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보니 역시 일국의 지도자 자리에 40년 동안 지키고 있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그런지 생각보다 위엄이 넘쳤다.
설령 위엄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일단 숙여야지.
“황제 폐하를 뵙겠사옵니다.”
“그대가 혜림이 말하던 야구장 건립 계획을 세운 자인가?”
“송구스럽지만 그러하옵니다.”
“흠··· 풍채가 상당하구먼. 서양의 외교관들과 비교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 게 마음에 드는구나.”
뭐···뭐지 칭찬인가? 그런 걸 떠나서 나름대로 대화를 이어가고는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황제 폐하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황송하옵니다.”
“그래 좋다. 근데 오늘 혜림과 온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본론이 시작된다. 정신 차리자.
“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아뢰옵겠사옵니다. 다름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시러 친히 동대문에 있는 야구장까지 행차하여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에 왔사옵니다.”
“계속 말해보도록 하여라.”
“네, 황제 폐하께서 친히 행차해주셔야 할 이유를 아뢰겠습니다. 우선, 선수들이 야구장에서 경기해야 실력이 온전히 발휘되옵니다. 무릇 스포츠 경기란 전쟁과 같아, 실력이 비슷하다면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사옵니다.
동대문 야구장은 이미 선수들이 두 차례나 경기를 치렀던 곳이자,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응원을 할 것이옵니다. 그러면 상대 팀은 위축이 될 것이고, 우리 팀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전에서 시합하게 된다면, 그러한 장점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실력만으로 시합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승부를 확실하게 장담할 수가 없사옵니다.”
고종은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뒤에 말도 계속해보도록 하여라.”
“다음은 사업적인 측면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행차하신다고 하면 한양의 만백성이 몰려들어 구경할 것이고, 이때 야구에 대한 관심도 역시 급격히 늘어날 것입니다.
이는 훗날 야구장이 건립되었을 때, 관중들이 이때의 기억으로 다시 발걸음을 하게 만드는 굉장한 홍보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고종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하였다.
“마저 말해보도록 하여라.”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서 제대로 야구를 즐기시려면 야구장에 와서 관람하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는 서구 문물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소가 어떻든 흥미롭게 보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구의 재미와 야구장의 재미는 그 궤가 다르옵니다. 야구장은 야구가 아니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큰 재미를 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론 아직은 야구장이라기에는 민망한 곳입니다만, 직접 와보신다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백성의 음성과 함성을 들으며 밑바닥 민심에 대해서도 들으실 수 있고, 다 함께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을 들으면 대한제국 백성들의 단합력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맛있는 먹거리까지도요.”
원래는 벌써 야구장에서 먹거리를 팔 생각은 없었다. 아직 인력도 없는 데다가, 정식 야구장도 아니고 간이 야구장일 뿐인데 뭔 먹거리여.
하지만 지금은 일을 성사할 수만 있다면, 공수표라도 남발해야 할 때이다. 때깔 좋아 보이는 거라면 다 해놓는 거 현대에는 장사치의 기본 소양 아닌가?
진짜 사기꾼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일국의 왕을 설득하려는 자리인데 이만하면 공수표 남발도 아니지. 나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다.
어쨌든 나의 혼신의 힘을 다한 입털기가 끝나자, 고종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입을 열었다.
“다 끝났느냐?”
뭐지, 이 반응은? 예상치 못한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말을 이어갔다.
“네, 제가 아뢸만한 내용은 다 전해드린 것 같사옵니다.”
긴장되는 순간, 고종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박수를 쳤다.
“그래~ 이런 게 내가 원하던 사업이다! 내 이 자리에 있는 동안 많은 사업 얘기를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신뢰할 만한 사업구상은 오랜만에 듣는구나.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젊은 날에는 감언이설에 혹해 헛발질도 많이 하였지. 그러다 보니 지금은 어떤 제안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이제 알 것 같은데, 지금이 그러하도다.”
하긴 황제 폐하께서 당한 호구 짓이 한둘이 아니죠. 군함인 줄 알고 샀는데 알고 보니 화물선이었던 방산비리도 겪으시고, 전기 회사도 날려 먹으시고, 각종 이권 침탈 등등 어휴··· 노이로제가 걸릴 만도 하십니다.
“다 이 나라의 국운을 돌리기 위한 좋은 시도이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대고 장사치 짓이나 하려던 것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옵니다.”
이 말을 듣자, 고종은 사람 좋은 할아버지처럼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껄껄껄, 괜히 혜림이 듣고 데려온 이유가 있는 청년이었구나. 내 혜림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는데, 계집아이라기에는 너무 똑 부러진 아이라 그때부터 총애했었지. 이번에도 복덩어리를 하나 물고 온 것 같구나.”
그 말을 듣자, 혜림은 함께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호, 제가 황제 폐하께 득이 될 일을 했으면 했지, 해가 될 일을 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저도 단번에 혹한 게 아니라, 이런 날을 대비하여 검증의 검증을 거쳤사옵니다.”
헉, 나 그 정도로 검증받고 있었던 것인가? 그런데 디저트 얘기 몇 번 하더니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나··· 흠···. 어쨌든 결과가 중요하지. 이제 다 넘어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 야구장에 행차해주실 의향이 있으신 것이옵니까?”
고종은 결의의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렇네.”
그 말에 나와 혜림은 눈을 마주치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고종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 무겁게 만들었다.
“허나, 내가 야구장에 행차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네들이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네. 알다시피 황제의 업무란 끝이 없다네. 그런 나의 발걸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반드시 일본놈들을 꺾어내야겠지?
사실 나도 이번 일을 전해 들은 바 있다. 손탁의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 말이다. 그때의 범인이 이번에 상대할 성남구락부였나? 그 일본팀에 속해있었지.
나도 손탁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본놈들에게는 손을 쓸 수가 없었지.”
이때 갑자기 고종은 머리에 핏줄을 세워가며 말을 이어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을사년의 치욕은 아직도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치욕중에 치욕이다. 게다가 지금도 일본놈들은 이 대한제국을 먹어치우기 위해 그 발톱을 시도 때도 없이 들이밀고 있지.
그런 놈들에게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지만, 이 냉혹한 현실에서는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혜림의 말을 듣고는 한 가지 길을 찾게 된 것이지.”
고종이 토해내는 열변에 나와 혜림은 입을 다물고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들은 이번 경기를 반드시 이겨내야 하네. 우리에게 더는 패배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패배한다면, 야구장 건립 계획은 당연히 백지화되는 것이고, 영준이라고 했나? 자네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일세.
그래도 나를 야구장으로 행차하게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잘 생각하게. 어전에서 비공개로 시합을 하고, 지더라도 시합내용을 함구하는 방법도 있다네. 그렇다면 야구장 건립은 몰라도 책임은 피할 수 있겠지.”
다 잘 풀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나 역시 일본팀에게 질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저는 야구장에서 경기할 수만 있다면, 단 한 순간도 일본팀에게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사옵니다. 그럴 자신이 있으므로 황제 폐하를 먼 곳까지 행차하시게 하려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고종에게 말했다.
“부디 일본팀과의 경기에서 저희를 믿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황제 폐하, 아니 이 나라를 위해 저희는 반드시 이겨낼 것을 맹세드리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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