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의 주인이 바뀌는 날 (4)
군도의 총 인구는 20만명 정도였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데도 이렇게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최근 들어 식량을 공급해준 아드리아의 영향도 컸지만, 수많은 선박들을 약탈해 부를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만명의 인구 중 8만이 노예였고 전투 해적은 5만 정도였다.
탈다도스와 같은 전투 해적들은 모두 아드리아 곳곳의 노역장으로 끌려 갔다.
전투력이 놓고, 지위가 높았던 해적들은 구아노 채취장.
전투력이 낮고 지위가 낮았던 해적들은 아르톰 목장.
각각의 장소로 5만의 인원들은 분산 배치되었고, 탈다도스 같은 자살 시도나 도주 시도가 빈번했지만, 그들이 뜻을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8만의 노예들은 이민자들과 같이 아르톰과 몰디아의 이민청을 통해 거주지를 배당 받았고 대부분 검은숲의 새로운 경작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남은 5만의 일반 거주민들은 대부분 기술자이거나 어린이, 노인들이었는데 기술자들은 안술러프에게 학자들은 홀스타인에게, 상인은 실비아에게 일임되었고 어린이와 노인은 각 영지에 분산 배치 시켰다.
물론 모든 해적들이 아드리아로 잡혀 간 것은 아니었다.
동대륙으로 향하는 남부연합의 배를 털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갔던 카시드 계열의 잔자르츠 해적단은 향신료를 수송하는 동대륙의 배를 약탈하는 데 성공해 적재함을 가득 채우고 군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으응? 누구지?"
아직 군도가 보이진 않았지만, 측량을 통해 군도가 가까워 졌음을 알고 있던 해적들은 마음이 한층 편안해졌고 메인마스트에서 주변을 감시하던 해적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먼 거리에서 항해하지 않고 돛을 접은 채 바다 위에 떠있는 한 척의 선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엇! 카시드님의 기함이다!"
좀 더 거리가 가까워 지자,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이 카시드의 기함임을 알아 차린 해적은 돛대를 타고 내려가 해먹에서 쉬고 있는 잔자르츠에게 보고했다.
"으응? 카시드님의 배가 홀로 떠 있다고?"
"그렇습니다"
"뭐지... 낚시라도 하시나?"
잔자르츠는 귀찮긴 했지만, 군도의 절대자 카시드의 기함이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속도를 줄여서 카시드님의 기함 옆에 잠시 멈출 수 있도록 해라"
"돛을 내려라!"
잔자르츠의 명령에 해적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속도를 줄였다.
잔자라츠 해적단은 총 7척의 선박으로 이뤄진 선단이었는데,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의 선박으로도 빠르게 전파되어 모든 선박이 돛을 내리고 속도를 줄였다.
'어울리지 않게 왜 나와 계신 것이지? 설마... 상납금 덜 낸 걸로 날 기다리셨나?'
잔자르츠는 해적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항상 군도에만 쳐박혀 있는 카시드가 뜬금없이 바다 위에서 정박해 있는 것이 이상했다.
물론 다른 계열 해적단의 우두머리들은 종종 이런 행동을 할 때가 있었는데 주로 상납금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 것으로 의심되는 해적들을 불시 검문하는 방법이었다.
잔자르츠 역시 상납금 문제로는 뒤가 구린 구석이 있었기에 마음 속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아니겠지 싶은 것이 자신 보다 두 단계 정도 위에 있는 카시드가 직접 나서서 검문하는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카시드 계열 해적단에서 검문은 빌리와 같은 중간보스급 해적들이 도맡았으며 카시드는 해적단의 세세한 운영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두목이었다.
"엇! 카시드님!"
속도를 줄여 카시드의 기함에 더 가까워 지자, 선박 선수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카시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해적들은 카시드를 인식하자 마자 경례를 하며 예를 갖췄고 그때까지도 해먹에서 누워있던 잔자르츠도 얼른 뛰어와 카시드를 향해 경례했다.
잔자르츠의 선박과 카시드의 기함이 10m 정도의 거리로 가까워 졌을 때, 카시드가 높이 뛰어올라 잔자르츠의 선박을 향해 날아왔다.
-쿵!
적절한 낙법으로 선박에 주는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인 카시드가 잔자르츠의 눈 앞에 나타났고 잔자르츠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음....자네 이름이 뭐였더라?"
"잔...잔자르츠 입니다. 두목님"
"아하.. 이제 기억났다. 동대륙 가는 선박을 주로 터는 잔자르츠 해적단 이었던가?"
"그렇습니다 두목님"
카시드는 기억 속에서 잔자르츠를 떠올려 냈고, 잔자르츠는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안도했다.
'적어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란 거지'
최근 늘어난 수입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고 축소해서 보고 한 전력이 있었기에 카시드가 눈 앞에 나타나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불안했지만 별 감정이 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안도했다.
"선단을 이 지점으로 옮겨라"
카시드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잔지르츠에게 내밀었다.
'으응? 여기는 군도 앞 공해인데? 아무것도 없는 이곳으로 왜 가라고 하시지?'
카시드가 건넨 종이는 군도 인근 지도와 목적지의 좌표였다.
군도에서 5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목적지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지도에 나와 있는 것도 그러했고 잔지르츠의 기억속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바다 한가운데였다.
"어...저.. 두목님 저희가 약탈에 성공해서 지금 전리품을 잔뜩 싣고 있는데 일단 하선 한 뒤에...."
"바로 이동한다"
"아... 예"
잔지르츠는 자신의 말을 끊어 버리는 카시드에게 더 대꾸하지 못하고 그의 명령대로 선박을 몰아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자신의 해적단 모든 인원이 덤벼도 카시드의 손끝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어? 뭐야?'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많은 배들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들 대양으로 나가는 해적들인데?'
자신과 같은 카시드 계열 해적단 이외에도 대양으로 나가는 다른 계열의 해적단의 선박들이 모여있었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카시드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먼저 말을 걸기에는 계급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 용기를 내기 어려웠다.
-지이이잉
다른 배들과 충돌을 줄이기 위해 속도를 줄이려 하는 순간, 강력한 인력이 발생하여 잔지르츠의 선단을 끌어들였다.
끌려 들어가는 방향은 이미 많은 선박들이 모여 있는 좌표상 목적지 였는데 자석이 금속을 끌어당기듯 선박들을 당기고 있었다.
"어어엇! 빨려 들어 갑니다!"
"닻을 내려라! 어서!"
-첨벙
다급하게 외치는 해적들에게 잔지르츠는 닻을 내리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카시드의 눈치를 보려고 그가 서 있던 곳을 바라봤는데 어디를 갔는지 카시드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어! 충돌합니다!"
제동을 걸어 보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잔지르츠의 선단은 속절 없이 빨려들어갔다.
-쿠우웅!
결국 가장 외곽에 있는 선박과 충돌하고 말았는데 다행이 선수상이 부서져 떨어지는 정도에서 끝났고 선체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뭐야 이거! 아니 카시드님은 어디 가신 거야?"
"보이지가 않으십니다"
"나 참... 귀신에 홀린 건가 이거...."
"선장님! 모여 있는 배에 인원이 하나도 없습니다"
"뭐?!"
충돌 직후, 모여 있는 선박을 살핀 해적이 크게 소리쳤다.
목적지에 잔뜩 뭉쳐 있는 선박들에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유령선들이 바다 한가운데 모여 있는 느낌이었다.
"뭐... 뭐야.... 이거"
상황을 확인한 잔지르츠는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어 봤다.
하지만 여전히 유령선의 모습으로 선박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고, 꼬집은 볼은 너무 아팠다.
"하늘에 누가 있습니다!"
해적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치자 모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이 떠 있어서 누군지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사람의 형체를 가진 무엇가가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어어엇! 몸이 떠오른다!"
"으아아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해적들은 자신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고 소리쳤다.
몇몇은 떠오르지 않으려 난간을 잡거나 돛을 잡아 버텨 보려고 했지만 끌어 당기는 강력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하늘로 떠올랐다.
"뭐 얼마나 멀리 나갔다 오길래 이제 오는 것이냐? 귀찮아 죽겠네 정말"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은 로빈이었다.
로빈은 군도로 들어오는 주요 항로에 선박을 이용한 환상 마법진을 펼쳐 두었다.
마법진은 군도로 귀항하는 해적들이 지나가면 활성화 되었고 그들을 이곳으로 모일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잔지르츠가 본 카시드의 모습은 로빈이 만든 환영이었다.
마법진의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 환영 마법이 풀렸고 카시드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었다.
"출발"
-부웅 부웅!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하늘로 높게 해적들을 띄운 로빈은 그들을 서쪽 직선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이곳에서 직선으로 쭉 이동하면 아드리아의 항구 로투스가 나왔다.
로투스에도 마법진을 설치 해뒀기에 날아오는 해적들이 안전하게 착지 하여 이민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로빈은 마법진이 활성화 될 때마다 날아와 이들을 날려 보내고 있던 것이다.
잔지르츠 해적단을 모두 날려 보낸 로빈은 이제는 좀 뜸해지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기에 마법진을 해제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카시드가 해군 조직을 마무리 했을 테니까.... 이제 그에게 맡겨야지'
언제까지 로빈이 일일이 다 할 수는 없었다.
아드리아에서 새로 창설될 카시드의 해군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남은 해적들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맡길 시간이 되었다.
* * *
텅 비었던 군도에 돌아오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 창설될 아드리아 해군의 구성원이 될 자들이었는데, 전투력이 뛰어난 자들 중에서 로빈의 검증을 통과한 인물들이었다.
"자네가 생존 했다니 의외로군"
"마늘과 쑥을 통째로 털어 넣고 인정 받았다고 생각해 주십쇼"
경매장으로 쓰이던 건물에 자리 잡은 임시 사령부에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빌리를 보며 카시드가 말했다.
빌리는 로빈의 검증에서 충성도를 인정 받아 해군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전하의 검증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군"
"낄낄 저도 그렇습니다. 이마에 불덩이를 박아 두셨으면서 저를 이렇게 풀어 주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카시드에게 말대답을 하다가 미간에 천벌이 박혔던 빌리는, 이후 검증이라는 절차에 서 자신이 살아 남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나?"
"그저 묻는 말에 대답만 했습니다"
"뭘 물으셨는데?"
"기회주의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하 그래서?"
"맞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이마에 박힌 불덩이도 빼주시더군요"
"솔직함에 감탄하셨나 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빌리는 군주의눈을 통해 봤을 때 충성도가 60이 넘게 나왔다.
예전의 재무관 경우처럼 극도의 공포심으로 인한 복종의 마음 역시 충성으로 인정되기에 그런 수치가 나왔던 것이다.
로빈 입장에서는 연회장에서 깐족거리긴 했지만, 충성도가 60이 넘는 인재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빌리를 풀어주고 친히 치유마법으로 몸을 회복까지 시켜 주며 카시드의 해군에 합류 시킨 것이다.
"아무튼 환영한다"
"환영합니다"
카시드가 그를 환영하자 임시 사령부에 모여 있던 검증을 통과한 다른 해적들도 손벽을 치며 그를 환영해 줬다.
10명 남짓 되는 해군 간부 후보자들은 모두 빌리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옥타시안은 안보입니다?"
"그 놈은 과거가 화려해서 검증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럼 어디로 갔습니까?"
"구아노 채취장"
"어이구.... 새 똥이나 푸러 갔군요"
"다 업보지"
빌리가 물어본 옥타시안은 전투력이 뛰어난 해적이었다.
하지만 탈타도스처럼 수많은 범죄를 밥 먹듯 저질러온 경력이 있어서 로빈은 검증도 없이 구아노 채취장으로 보내버렸다.
이곳에 모인 구해적 현해군 인원들은 그나마 범죄를 덜 저질렀거나, 남들 시선을 의식하며 저지른 자들이었다.
"그럼 이제 저는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지켜야지."
"군도를 말씀이십니까?"
"아드리아 왕국의 바다를"
카시드의 말에 빌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빌리의 말에 카시드도 옅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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