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전하가 주신 권력 (3)
"맥주 한잔 주시오"
"음식은요?"
"필요 없소"
페테부크의 한 주점
풍채가 아주 좋은 한 사내가 맥주만 한 잔 시키고 주점의 구석진 곳에 앉았다.
그는 아드리아 왕국 감찰단장 해리엇이었다.
로빈이 마법으로 얼굴을 바꿔 줬지만, 그의 당당한 덩치는 바꾸지 않았기에 주점의 의자와 식탁 사이에 굵은 허벅지가 잔뜩 껴버리고 말았다.
"키...아.... 여기 맥주 맛은 언제나 합격이군"
발렘 국왕의 목을 따러 왔을 때, 마셔본 페테부크의 맥주는 좋았다.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산악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는데 여기 음식은 빵이며 스튜며 다 엉망이라 해리엇은 그냥 맥주만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야! 주인! 음식 빨리 안가져 오냐?"
"갑니다 가요"
점잖게 맥주를 마시는 해리엇과 다르게 주점이 제 것인 마냥 떠들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에오르친 일당들이었는데, 귀족들이 다 사라진 페테부크에서 새롭게 등장한 지배세력이었기에 이런 주점에서 큰 소리를 쳐도 그 누가 뭐라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주점 주인은 새로 만든 음식들을 낑낑대며 가져와 그들의 테이블에 차렸다.
나름 신경쓴 음식인 듯 했지만, 아드리아에서 넘어온 해리엇이 보기엔 형편없는 음식들이었다.
"영주놈 오늘 결국 출근 못했답니다"
"앓아 누웠어?"
"예. 오늘 의원이 다녀갔답니다. 자리에서 못 일어난답니다"
"목숨은?"
"당장 죽지는 않는데 오래 살진 못할 것 같답니다"
"아우! 씨발!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그건 하지 말라고!"
에오르친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영주가 물리적인 폭력에 굳건히 버티자 급기야 관리들은 독까지 썼다.
독은 발렘에서 오래 전부터 독약으로 쓰이던 키트라 라는 식물의 즙이었는데, 신경을 마비시키고 통증을 못느끼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물론 그 특유의 효능 때문에 아주 소량을 마취약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이런 계열의 물질은 정량을 넘어서 부터는 극독이었다.
"독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 그놈이 쓰러졌습니다. 약해 빠진 아드리아놈 같으니라고.."
"야! 지금 영주놈 몸 상태가 어떤지는 알아? 안그래도 체력이 약한 상태인데 독이 들어갔으니 제대로 해독이 되겠냐"
관리들은 딱 이틀에서 사흘 정도 고생할 정도로만 약을 썼지만, 워낙 체력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의 랜달은 그 정도의 약으로도 의식이 혼미해 질 정도로 큰 데미지를 입었다.
'아주 대놓고 떠드는 구나..'
홀로 맥주를 홀짝 거리고 있던 해리엇은 대놓고 영주를 눕혔다고 떠드는 에오르친 일당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주점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나 주인도 그들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들으며 별 생각없이 자신이 할 일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역시 민족이 다르니 이런 일이 더 생기기 쉽겠지.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까'
발렘인과 아드리아인은 서로 민족이 달랐다.
그랬기에 발렘인들에게 아드리아인은 침략자였다. 언젠가 다시 자신의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무의식에 깔려 있었다.
그랬기에 낙하산처럼 부임해 온 아드리아 출신 영주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고, 에오르친 일당 처럼 적극적으로 표현 하지 않아도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덜컥
그 때, 주점 문을 열고 로빈이 들어왔다.
로빈은 해리엇과 달리 자신의 얼굴 그대로 등장했는데, 페테부크에서 로빈의 얼굴을 아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야? 저 놈"
문이 부서질 듯 활짝 열고 들어온 로빈을 관리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봤다.
이 주점에 자주오는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알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인 자가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 시비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데...?'
관리들의 말에 로빈을 바라본 에오르친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 얼굴인 로빈이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날 듯 말듯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로빈은 페테부크 왕실 금고와 고위 귀족들의 금고를 포인트로 바꾸러 왔을 때 잠시 이곳에 들렀는데 그 때 스치듯 로빈의 얼굴을 봤었다.
물론 카시드와 해리엇을 포함한 기사들의 삼엄한 경계가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가 아드리아의 국왕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먼저 한잔 하고 있었나?"
"그렇습니다.....도련...님"
"하하 자연스럽게 불러야지. 이것도 나름 위장 작전인데"
"죄송합니다"
로빈과 해리엇은 젊은 귀족과 수행원으로 위장했다.
그래서 로빈은 해리엇에게 자신을 도련님이라 부르게 시켰고 해리엇은 한사코 거부하다가 명령이라는 그의 말에 마지못해 따랐다.
"랜달은 거의 죽기 직전 이더군"
"심하게 당했나 봅니다"
"그래.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더라고. 몸 외부와 내부 모두 엉망이었다"
로빈은 페테부크에 도착하자 마자 랜달의 숙소로 향했다.
마법을 이용해 잠입하여 랜달의 숙소에 들어간 로빈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랜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치유마법으로 그를 회복시켰고, 의식이 돌아온 랜달은 로빈의 얼굴을 알아보고 오체투지를 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딱히 노린 것도 아닌데, 저 놈들이 여기 모여 있었습니다"
"아. 저 놈들이야?"
"그렇습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놈이 재무관 에오르친입니다."
"딱 그렇게 생겼네"
로빈은 신나게 떠들고 있는 에오르친 일당을 바라보았다.
에오르친의 얼굴은 지구에서도 많이 본 관상이었다.
티비 속에 등장하는 갑질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의 인상이었는데 그런 부류의 인간들 중에서 속을 알 수 없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자들이 가진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뭐야. 저 새끼 지금 우리 쳐다보는 건가?"
"이잉? 허... 그런 것 같습니다. 들어올 때부터 마음에 안들더니"
"외지인인것 같은데 겁을 상실했구만"
로빈의 시선을 느낀 관리들이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로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어 저새끼 웃는 데요?"
"아오... 열받게 하네. 내가 다녀오지"
관리들 중 에오르친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림스키가 일어섰다.
그는 랜달을 괴롭히는 데도 가장 앞장섰고, 최근에 독약을 쓰게 지시한 것도 그였다.
관리들 중에 가장 악랄하고 강성이었으며 다혈질 이었기에 로빈의 도발을 참을 수 없었다.
"야. 너 씨발 뭐하는 새끼야? 어?"
로빈과 해리엇의 테이블로 다가온 림스키가 으르렁대며 말했다.
"나? 아니면 얘?"
로빈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해리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림스키의 분노가 더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너 이새끼야!"
결국 림스키의 솥뚜껑 같은 손이 로빈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탁!
"............!!!"
분명 사람의 뺨을 때려야 했는데, 림스키의 손은 마치 건물의 벽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냈고 그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도 사람의 부드러운 뺨이 아니라 단단한 벽의 느낌이었다.
왜 그런가 싶어 손을 바라보니 로빈의 얼굴을 향하던 손바닥이 무형의 벽에 막혀 있었다.
"뭐....뭐야 .. 이거?"
"내가 누군지 물어 봤던 거구만?"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림스키의 몸도 자리에서 살짝 떠올랐는데 로빈이 마법으로 마비 시킴과 동시에 그의 몸을 살짝 하늘에 띄운 것이었다.
"나는 아드리아 로빈. 아드리아 왕국의 국왕이다"
"................!!!"
로빈의 말에 주점 안의 사람들은 모두 동작을 멈췄다.
물론 그들의 머리속에는 '뭔 개소리야?' 하는 생각이 대부분이었지만, 에오르친은 달랐다.
'아! 이제 기억난다! 그 대단한 해적왕 카시드가 굽신거리던 놈이 바로 저놈이었어!'
에오르친은 가물가물하던 기억 속에서 로빈을 떠올렸다.
아스타나한의 목을 장신구처럼 함부로 취급하던 카시드가 고개를 조아리며 친히 왕실의 금고로 안내하던 그 젊은 사내!
그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저 자였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마도사라는 소문이 무성한 아드리아의 절대자 로빈 국왕이 친히 페테부크로 온 것이다.
"그럼 너는 누구냐?"
로빈은 림스키에게 물었다.
온 몸이 마비되고 몸이 하늘에 붕 떠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림스키는 본능적으로 로빈이 진짜 아드리아의 국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주점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림스키가 하늘에 붕 떠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눈 앞에 보이는 젊은 남성이 정말로 아드리아의 국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림..스키라고 합니다. 페테부크의 내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오호... 자네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구만. 그렇다면 내가 보낸 영주인 랜달을 잘 알고 있겠지?"
"그...그렇습니다"
"그를 잘 보필했는가?"
"..... 영주님이 지시하는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림스키는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기에 과감히 거짓을 말했다. 나중에 어떻게 되던 간에 일단 지금 살아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랜달이 요구하는 각종 사업에 대한 보고서를 정확히 올렸어?"
"물...물론입니다 영주님"
"아드리아 정부로 부터 배급된 지원 물품의 사용 내역도 정확하게?"
'씨발! 다 알고 왔어!'
첫번째 물음 까지는 정확히 느끼지 못하던 림스키는 로빈의 두번째 물음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공포감이 느껴졌다.
비록 몸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맞은 사람 처럼 흘러내렸고 얼굴 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흐흐흐 그랬구만. 최선을 다한 것이었어 그렇지?"
"예... 전하"
"그런데 말이야... 내가 여기 오기전에 랜달을 만나고 왔거든? 그의 몸상태가 말이 아니던데... 왜 그런지 혹시 알고 있는가? 자네가 내무관이니 영주를 자주 봤을 것 같아 묻는 것일세"
"그....그게..."
로빈의 물음에 림스키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랜달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나?"
"어엇!"
로빈이 랜달의 몸상태에 대하여 림스키에게 물어본 순간, 에오르친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주점의 출구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도망쳐야 한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에오르친은 어떠한 수단으로도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고, 오직 도망쳐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고 외딴 곳에 숨어지내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걸어 출입구에 도착했지만 그곳엔 이미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는 해리엇이 지키고 있었다.
"비켜주시오."
에오르친은 속삭이듯 말했다.
행여 로빈의 시선이 이쪽으로 끌릴까봐 조마조마 하며 해리엇에게 애원하는 표정으로 나와달라고 손짓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허리춤에 걸린 검에 눈길이 갔고, 그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났다.
"감찰단장... 해리엇...?"
"허허 얼굴을 바꿔도 알아 보는 구만"
해리엇은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거대한 손으로 에오르친의 얼굴을 꽉 쥐었다.
"으아아아악!"
난데 없이 터진 비명에 사람들의 시선이 해리엇에게 쏠렸다.
해리엇은 에오르친의 얼굴을 오른손에 딱 쥐고 별 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로빈을 향해 웃어보였다.
"에피타이저 드시고 있으신데, 메인 디쉬가 도망가려고 해서 말입니다 전하"
"오오 자네 방금 그 말 아주 유머러스해 보이고 지적인 느낌이 나는데?"
"하하하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교수님도 되고 해야 하니까"
"하하 그래. 교수님이면 그 정도 말재주는 있어야지. 안그러면 학생들한테 수면제 소리 들어"
로빈과 해리엇은 서로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해리엇이 메인 디쉬를 잘 잡고 있으니 로빈은 다시 에피타이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오랜만에 이걸 다시 쓰는 구나..."
로빈은 품 속에서 '천벌'을 꺼내 들었다.
천벌의 악명은 이미 발렘인들의 머리속에도 모두 각인이 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천벌이 유유히 하늘을 날아 림스키의 이마에 박히는 순간.
림스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는 물론이고 주점안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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