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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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초리初理
그림/삽화
퐌베어
작품등록일 :
2024.07.08 11:48
최근연재일 :
2024.09.04 14:00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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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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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글자수 :
175,431

작성
24.07.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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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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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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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3 장 망명(4) -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세상을 바꾸다.

DUMMY

장순 아저씨와 동민 형은 사 년제 중학 과정에 정식으로 입학하였다.

아직 어린 나와 몸이 불편한 환이 아저씨는 홍 할아버지와 함께 당분간 농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식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작년에 우리는 뼈저리게 느꼈다.

배움도 독립 투쟁도 먹어야 할 수 있다.

학교에 간 둘이 아무 걱정 없이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내정을 튼실히 다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뭐 벼농사를 지어보자고?”

“네. 조선에서 벼농사를 많이 지어 봤잖아요. 그 경험을 기반으로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요?”


다소 황당한 내 제안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네 푸석푸석한 만주 쌀 말고 조선 쌀을 경작해서 밥을 지으면 모두들 좋아할 거예요. 어르신들이 항상 말했잖아요. 조선 사람은 윤기가 흐르는 조선 쌀을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고요.”


난 내 의견을 굽히지 않고 계속 어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여기는 기후도 다르고 토양도 달라서 조선하고는 다를 거다. 여기선 조선 벼가 잘 자라기 힘들 거야.”


홍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먼저 우리가 가진 땅의 아주 일부를 이용해서 시험해 봐요. 농사 방법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 동시에 여러 개를 시험하면 이, 삼 년 안에는 정확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평생 벼농사를 지어봤으니 그 경험이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어차피 여기서 하는 일 중에 쉬운 일이 어딨겠수. 까짓것 한번 해봅시다.”

“꼬마 니 말대로만 된다면 모두들 좋아할 거다.”


다소 황당한 내 의견에도 아저씨들은 찬성해 줬다.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어차피 일부에서만 수확이 안 되는 것이고 일 년에 여러 방식을 한꺼번에 시험해 볼 수도 있으니 금방 답을 찾을 수도 있겠구나. 기발한 생각이야.”


홍 할아버지도 결국엔 내 편을 들어줬다.


우린 대부분의 땅에서 옥수수 농사를 시작하였지만 그중 십분의 일은 벼농사 시험을 위한 땅으로 쓰기로 했다.

홍 할아버지의 주도하에 그 땅에 여섯 개의 다른 방식의 농사를 지었다.

같은 땅을 여섯 개로 나누었기 때문에 비슷한 방식에서 조금씩 변수를 바꾸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내 삶의 첫 번째 도전이었다.

누가 시켜서 정해진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한 그런 도전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우린 정성을 다해서 농사를 지었고 정확한 방법을 찾기 위해 난 모든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장순 아저씨와 동민 형이 다니는 중학 과정은 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와 같은 언어 교육과 수학, 과학, 경제, 정치 등의 신학문뿐 아니라 역사, 지리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교실 창문 밖에서 몰래 수업을 듣다가 나중에는 선생님들의 배려로 교실 한구석에 자리 잡기도 하였다.

경성에 있을 때부터 상동학원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덕분이었는지 여러 언어를 빠르게 배웠고 수학, 과학 같은 신학문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공부하러 간 사이 다른 어른들이 내 몫까지 일을 해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순탄하게 흘렀고 나는 성장하였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벼농사는 꽤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못했지만 홍 할아버지의 경험과 나의 꼼꼼한 기록 덕에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 방법을 도출해 냈다.

점점 벼가 잘 자라게 되었고 어느 순간 옥수수 밭보다 벼를 위한 논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근방의 한인들에게 농사법을 전수하여 어느새 합니하의 한인들은 고슬고슬한 쌀밥으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가장 그리운 고향의 음식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다들 우리에게 고마워했다.

한인뿐 아니라 근방의 현지인들까지 조선의 쌀밥 맛에 푹 빠져들었고 우리 민족의 음식 문화에 감탄을 하여 서로 벼농사를 배워가겠다고 앞다퉈 우리를 찾아왔다.

막연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도전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니 너무나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나 자신이 대견하고 뿌듯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우당 선생이 우리를 찾아왔다.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이 근방 사람들을 배불리 먹인다 들었네.”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선생이 운을 띄웠다.


“옥수수와 콩으로만 식사를 하는 게 너무 물려서 생각해 봤어요. 게다가 만주 쌀은 너무 푸석해서 밥같이 느껴지지가 않아서요. 나라를 위해서 한 몸 바친다고 와서 밥투정이나 하는 철없는 절 용서하세요.”


밥투정이나 하는 철없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아니다. 넌 아주 큰일을 해낸 거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먹으니 모두가 더 살기 좋아지지 않았느냐. 그렇게 살거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 계속 도전하거라. 성장한 네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것은 선생에게 받은 첫 번째이자 마지막 칭찬이었다.


그렇게 칭찬을 남기고 우당 선생은 떠났다.

그날은 미처 몰랐으나 얼마 후 선생은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마지막으로 우리를 보러 온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성에서 가져온 자금은 점점 떨어져 갔고 학교 운영 자금을 구하기 위해 선생은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도 모른 채 내 인생의 가장 큰 은인과 평생 이별을 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도전하라는 선생의 마지막 말은 평생 내 가슴속에서 맴돌았다.


그 사이 중학 과정을 마친 장순 아저씨와 동민 형은 특별과에 입과하였고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우리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나도 15살이 되자 중학 과정에 정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원래는 18살이 돼야 입학이 가능했지만 그동안 동냥 삼아 미리 배운 것들이 있었기에 특별히 입학이 허가되었다.

예전보다는 상황이 좋아졌지만 춥고 배고픈 만주에서의 생활은 여전하였다.

지독한 만주의 열병까지도 그대로였지만 점점 이런 환경에서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우당 선생의 마지막 말을 되뇌며 몸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배움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또다시 삼 년이 흘렀고 난 조금 빨리 중학 과정을 마치고 18살이 되던 해 특별과에 입학해서 군사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특별과는 독립군을 이끌 수 있는 군관을 키워내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장순 아저씨나 동민 형처럼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다.

사실 군인으로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한 규칙적이고 제한적인 생활을 하는 곳이었기에 학교 기숙사라기보다는 군대의 내무반에 더 가까웠다.

우리는 새벽 여섯 시까지 연병장에 모여 웃통을 벗고 한 시간가량 산속을 달렸다.

그 후 아침 식사를 한 뒤 군사 기술에 대하여 배웠다.

보병, 기병, 포병, 공병 등의 기본 과목뿐 아니라 전술, 전략, 편제학, 측도학 같은 장교로서 필요한 기술을 배웠다.

오후에는 20킬로그램이 넘는 무거운 군장을 메고 나무로 만든 총을 들고서 이 고지 저 고지에서 가상의 적에게 공격전, 방어전, 도강, 상륙 작전 등 실전 연습을 하였다.

비록 제대로 된 무기가 없어서 나무로 만든 총으로 대신 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그 어떤 정규군보다 높은 기개를 온 만주 벌판에 떨쳤다.


또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역사 교육을 중시하였다.

교재로 쓰인 대동역사는 석주 선생이 직접 편찬한 역사서로써 우리 민족의 웅장한 고대사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만주는 고대 조선의 뿌리가 되는 땅이며 단군의 정통은 고구려 발해로 이어졌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한사군의 위치를 반도의 서북부가 아닌 만주라고 밝히고 기자 조선은 성리학적 정치 이념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대적인 성향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축소하고 중원을 대국으로 받들던 잘못된 사관을 제대로 잡는 책으로 우리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치 얼마 뒤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하여 만들어질 조선사 편수회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신흥 무관 학교의 역사 교육은 선구적이고 훌륭했다.

올바른 민족정신을 위하여 역사와 함께 윤리 과목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어떤 군대나 학교보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독립을 위한 염원으로 열심히 배웠다.

독립군으로서 가장 중요한 강인한 체력과 올바른 민족의식을 체득할 수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나 학생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독립군으로서 세상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 * *



그리고 이제 그때의 약속을 위하여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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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5 k7******..
    작성일
    24.07.13 18:14
    No. 1

    벼농사가 잘되여 참다행 입니다.~!

    잼나게 가슴 뭉클하게 잘 읽고있어요.
    독립운동가 고뇌와 희생을 생각케 하는
    이시대의 큰작품 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cl******..
    작성일
    24.07.13 22:28
    No. 2

    재밌게 잘읽고있습니다
    이런작품 좋습니다
    다시한번 그시대를 생각하며 ~~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까요
    눈물이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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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6 장 학살(2) - 할아버지와 다섯 아이! 24.07.26 48 2 7쪽
23 제6 장 학살(1) - 와룡동의 비극 24.07.25 59 2 7쪽
22 제5 장 전쟁(8)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1 24.07.24 64 3 9쪽
21 제5 장 전쟁(7) - 독립군 3대 대첩, 봉오동 전쟁 24.07.23 58 3 9쪽
20 제5 장 전쟁(6) - 전쟁의 시작, 삼둔자 전투 +1 24.07.22 59 3 8쪽
19 제5 장 전쟁(5) - 형님. 행복하십니까? 24.07.21 61 3 8쪽
18 제5 장 전쟁(4) - 전투의 시작, 사람을 죽이다. 24.07.20 66 4 8쪽
17 제5 장 전쟁(3) - 봉오동 저격수의 탄생 24.07.19 78 4 8쪽
16 제5 장 전쟁(2) - 무술을 배우다. 24.07.18 70 4 7쪽
15 제5 장 전쟁(1) - 슬픈 운명의 소녀 24.07.17 67 4 7쪽
14 제4 장 운산(3) - 동민 형의 결심 24.07.16 64 4 8쪽
13 제4 장 운산(2) - 봉오동 독립군 기지와 정예 독립군 ‘독군부’ 24.07.15 73 3 8쪽
12 제4 장 운산(1) - 북간도의 사 형제 24.07.14 82 4 8쪽
» 제3 장 망명(4) -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세상을 바꾸다. +2 24.07.13 112 4 9쪽
10 제3 장 망명(3) - 신흥 무관 학교 24.07.12 105 4 8쪽
9 제3 장 망명(2) - 대고산에 울려 퍼진 한민족의 기개 24.07.11 108 4 9쪽
8 제3 장 망명(1) - 서간도로 가는 길 24.07.10 108 5 9쪽
7 제2 장 대항(4) -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수치 24.07.09 128 4 10쪽
6 제2 장 대항(3) - 그리고 그곳엔 충정한 군인의 유서가 있었다. 24.07.09 239 3 7쪽
5 제2 장 대항(2) - 헤이그의 영웅들 24.07.09 188 6 12쪽
4 제2 장 대항(1) - 백악관의 밀약 24.07.09 216 6 9쪽
3 제1 장 우당(2) - 을사늑약 24.07.08 284 4 8쪽
2 제1 장 우당(1) - 괜찮습니까? 24.07.08 425 9 12쪽
1 프롤로그 +1 24.07.08 607 1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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