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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초리初理
그림/삽화
퐌베어
작품등록일 :
2024.07.08 11:48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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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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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3 장 망명(2) - 대고산에 울려 퍼진 한민족의 기개

DUMMY

마지막 여정 또한 지난번 횡도촌을 향한 여정 못지않은 고난이었다.

조금이지만 가야 할 거리는 더 멀어졌고 헤쳐 나가야 할 추위는 더 매서워졌다.

마차당 다섯 명씩 타서 이동하였는데 난 홍 할아버지와 다른 노비들과 같은 마차에 배정받았다.


“독립투사가 돼서 어떠한 고통이라도 이겨낼 것이라고 결심했는데 이건 너무 심하군. 차라리 일본 놈들의 고문을 버티는 것이 더 낫겠네.”


노비들 중 가장 밝고 쾌활한 성격의 환이 아저씨가 푸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동안 우당 선생 댁에서 노비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가족같이 지내고 있었다.

사실 말이 노비지 우당 선생 댁에서 노비는 전부 해방되었고 그들도 당당히 임금을 받고 일하는 일꾼들이었기에 나와 완전히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 우린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환이 아저씨는 언제나 밝은 사람이었다.

내가 이 댁에 오기도 전 내 또래의 자식을 돌림병에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특별히 잘해주었고 내 마음속에 나에게 이런 아버지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아픔을 겪고 나서도 아저씨는 긍정적 마음을 잃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어지간히 버티기 힘든 것 같았다.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추위군.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건가. 그리고 이렇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이틀을 쉬지 않고 버텨야 한다니 속이 울렁거려 못 살겠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살살 거리며 이렇게 오랫동안 괴롭히는 것보단 차라리 뼈가 바스러지는 것 같은 한순간의 큰 고통이 낫겠어. 자네 말대로 고문을 받는 것이 차라리 낫겠어.”

환이 아저씨의 단짝인 장순 아저씨 또한 못 견디고 힘들어하였다.

“그만들 하게나. 자네들이 그런데 어르신들은 어떠할 것 같나. 그런데도 한 마디 내색 안 하던 마님과 도련님 보기 부끄럽지 않나. 갓 11살이 된 꼬마도 가만히 있거늘. 쯪쯪쯪.”


홍 할아버지의 핀잔에 아저씨들은 무안해하였다.


“영감님도 참. 너무 힘들어서 한마디 해봤습니다. 꼬마 니가 우리들 중 제일가는 투사가 되겠구나. 이러한 지독한 상황에도 불평 한마디 안 하다니.”

“...!”


환이 아저씨의 칭찬에 난 아저씨들을 보면서 아무 말 없이 살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난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토가 나올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부모도 없이 어느 날 불쑥 같이 지내게 된 나를 어른들은 꼬마라고 불렀다.

어찌 보면 내가 꼬마가 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이 마차 안의 모든 사람은 극한의 환경에서 가족보다 더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 * *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추가 마을에 도착했다.

우당 선생과 형제들은 먼저 추가 마을에 도착하여 임시로 머무를 집을 마련해 놓았다.

경성의 선생의 저택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허름하고 좁은 집이었지만 한 달이 넘는 험란한 여정의 끝에 맞이한 보금자리는 그 어떤 대저택보다 나에겐 소중한 공간이었다.

방 세 칸짜리 허름한 집에 우당 선생 댁과 다른 형제 가족 그리고 같은 마차를 타고 온 우리 다섯에게 방 하나씩 배정이 되었다.


홍 할아버지와 환이, 장순 아저씨 그리고 항상 너무 조용해서 있는지 없는지도 잘 알 수 없는 나보다 열 살이 많던 동민 형은 진짜 가족이 되어 버렸다.

다섯이 다 같이 누워있기에도 좁은 아주 작고 허름한 방이었지만 그 방은 우리를 진정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는 마지막 열쇠였던 것이었다.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도 가족과 함께 국경선을 넘지 못했다.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당 댁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홍 할아버지의 가족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오래전에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되었다고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환이 아저씨는 자식을 잃고 얼마 후 비슷한 병으로 부인까지 잃고 혼자가 되었다.

애당초 결혼에 관심이 없었던 장순 아저씨는 원치 않게 자기와 비슷한 처지가 된 환이 아저씨와 그때부터 급격히 친해지기 시작했다.

동민 형도 나처럼 고아인 것 같았지만 그 누구도 말 없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이란 것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던 다섯 사람이 모였다.


나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길 무렵 전국 곳곳에서 독립 투쟁을 위하여 하나둘씩 만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여러 번 사전 답사를 왔었던 석오, 야은 선생도 다시 돌아왔고 경성, 경기, 충청 지방의 대표들도 도착했다.

그중에서도 우당 선생 일가와 마찬가지로 대가족을 이끌고 도착한 경북 지역 대표들의 행렬은 특히 장관이었다.

처남 매부 사이이자 안동 유림의 대표였던 석주, 백하 대감이 일가를 이끌고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험란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부터 만삭의 임산부까지 포함된 그들 일행의 모습은 독립을 향한 우리의 의지를 엄숙하게 보여주었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 땅에서 자손을 낳지 않겠다는 백하 대감의 의지와 그 의지를 받드는 자식들의 강인함은 이런 우리가 일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우리의 사기는 올라갔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일본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삼삼오오 만주로 이주를 하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이렇게 한꺼번에 조직적으로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자기네 땅으로 들어오자 현지 중국인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일본의 첩자로 의심한 그들은 유하현 관청에 신고하여 순경들을 데리고 주도자로 보이는 우당 선생의 집에 들이닥쳤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오해를 풀기 더욱 어려웠으나 한문에 능숙한 선생이 문자로써 필담을 통하여 겨우 오해를 풀었다.

우리가 첩자가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하여 망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응원까지 해주면서 떠난 그들이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땅은 단 한 치도 팔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독립투사로서 새롭게 태어나리라는 결심을 하였다.

몸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버텨낼 거라는 결심을 수 없이도 하였지만 경작을 할 수 있는 땅이 없으니 내 결심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평상시 우당 선생의 교육 신념에 의거해 아저씨들과 동민 형은 글공부를 하고 있었고 겨우 챙겨 온 한두 권의 책을 돌려보면서 지난날 배웠던 것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두어 달이 지날 무렵 망명자 대표 격인 어르신들이 근처 이주 한인 300명을 모아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단군의 자손인 우리 한인은 예로부터 이곳 만주에서 우리의 기상을 발휘하였다.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우리의 선조들은 중원에까지 그 기개를 널리 퍼트렸으며 그 어떤 외세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인 우리는 우리 민족의 시작인 이곳 만주에서 야만스런 일본의 침입에 대항하여 끝까지 독립 투쟁을 할 것이다.”


임시 의장을 맡은 석오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추가 마을 뒤편에 자리한 대고산에 울려 퍼졌다.


“독립을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이다.

첫째, 경학사를 조직한다.

둘째, 전통적인 도의에 의거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한다.

셋째,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한다.

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장교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한다.”


이어서 그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아직 우리의 뜻을 펼치기에 너무나도 많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우리의 지도자들의 결연한 의지와 석오 선생의 영웅스런 기개에 우리는 모두 사기충천하였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받아 그로부터 얼마 후 학교를 설립하였다.

비록 땅을 구하기 어려워 근처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교사를 대신하였으나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교육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신민회의 ‘신’과 다시 일어난다는 ‘흥’ 자를 붙여서 신흥강습소라고 불렀다.

토착민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강습소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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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6 장 학살(2) - 할아버지와 다섯 아이! 24.07.26 48 2 7쪽
23 제6 장 학살(1) - 와룡동의 비극 24.07.25 59 2 7쪽
22 제5 장 전쟁(8)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1 24.07.24 64 3 9쪽
21 제5 장 전쟁(7) - 독립군 3대 대첩, 봉오동 전쟁 24.07.23 58 3 9쪽
20 제5 장 전쟁(6) - 전쟁의 시작, 삼둔자 전투 +1 24.07.22 60 3 8쪽
19 제5 장 전쟁(5) - 형님. 행복하십니까? 24.07.21 61 3 8쪽
18 제5 장 전쟁(4) - 전투의 시작, 사람을 죽이다. 24.07.20 66 4 8쪽
17 제5 장 전쟁(3) - 봉오동 저격수의 탄생 24.07.19 78 4 8쪽
16 제5 장 전쟁(2) - 무술을 배우다. 24.07.18 70 4 7쪽
15 제5 장 전쟁(1) - 슬픈 운명의 소녀 24.07.17 67 4 7쪽
14 제4 장 운산(3) - 동민 형의 결심 24.07.16 64 4 8쪽
13 제4 장 운산(2) - 봉오동 독립군 기지와 정예 독립군 ‘독군부’ 24.07.15 73 3 8쪽
12 제4 장 운산(1) - 북간도의 사 형제 24.07.14 82 4 8쪽
11 제3 장 망명(4) -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세상을 바꾸다. +2 24.07.13 112 4 9쪽
10 제3 장 망명(3) - 신흥 무관 학교 24.07.12 105 4 8쪽
» 제3 장 망명(2) - 대고산에 울려 퍼진 한민족의 기개 24.07.11 109 4 9쪽
8 제3 장 망명(1) - 서간도로 가는 길 24.07.10 108 5 9쪽
7 제2 장 대항(4) -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수치 24.07.09 128 4 10쪽
6 제2 장 대항(3) - 그리고 그곳엔 충정한 군인의 유서가 있었다. 24.07.09 239 3 7쪽
5 제2 장 대항(2) - 헤이그의 영웅들 24.07.09 188 6 12쪽
4 제2 장 대항(1) - 백악관의 밀약 24.07.09 217 6 9쪽
3 제1 장 우당(2) - 을사늑약 24.07.08 284 4 8쪽
2 제1 장 우당(1) - 괜찮습니까? 24.07.08 425 9 12쪽
1 프롤로그 +1 24.07.08 608 1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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