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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레
작품등록일 :
2024.07.2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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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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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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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DUMMY

파견이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며 나를 데려간 곳은, 설유진이 갇혀있던 동네 못지 않게 황페한 슬럼가였다.

물론, 우리는 보는 눈을 피해야하는 입장이다 보니 사람이 많은 번잡한 곳을 가지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정도가 심하지 않나?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밤거리를 둘러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다른 의미로 조심해야할 거 같은데.

내가 계속 두리번 거리는 걸 봤는지 앞서가던 파견이, 쓰고 있던 검은색 마스크를 슬쩍 내리며 말했다.

“누가 미행하는지 신경 쓸 필요없어. 어차피 이 거리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그건 척 보면 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만두고 고개만 끄덕였다.

파견은 내 대답을 듣고 나서, 뭐가 그리 즐거운지 총총 튀는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나는 그런 파견의 모습이 술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건지 헷갈린 채로 그 뒤를 따랐다.


여기야, 하고 파견이 가리킨 곳은 락카로 낙서가 가득한 셔터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 어두운 밤에 조명조차 없는 간판을 유심히 살폈다.

‘제임스 철물점’

나는 그 간판을 가리키며 파견에게 말했다.

“여기서 술집이라고요?”

“응, 뭐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지. 여기로 와.”

파견은 그 가게에 옆에 서있는. 먼지가 가득 쌓인 자판기 앞에 서서 내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파견에게 다가가 그 옆에 섰다. 파견은 나를 보고 키득 거렸다.

“이거, 잘 보고 있어.”

나는 파견이 가리키는 자판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건 어디 지나가면 볼수 있는 흔하고 낡은 커피 자판기였다.

제대로 관리가 되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자판기를 보며, 아니 코코아가 뭐 이렇게 비싸냐,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파견이 동전을 넣은 뒤 마구잡이, 아니 유심히 관찰하니 특정한 패턴으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에 거스름돈이 나오는 곳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자판기가 마치 여닫이 문처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아니 자판기가 완전히 열리자,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너비의 지하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야?

파견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놀랄 줄 알았어.”

“아니 이걸 보고 어떻게 안 놀라요? 이게 대체 뭡니까?”

“뭐긴, 술집 입구지. 자, 얼른 따라와. 빨리 안 가면 금방 닫혀버린다고.”

파견은 야구모자를 고쳐쓴 뒤 걸치고 있던 청 자켓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정신을 차린 다음 파견을 따라 조심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턱 마다 낙차가 제멋대로라 자칫하면 발을 헛디디기 쉬웠다. 거기에 조명이 어두운 것도 한 몫했고.

파견이 내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한 손으로 커다란 문을 밀었다. 그러자, 투박하지만 정감있는 종소리가 울러 펴졌다.


가게의 첫인상은, 마치 영화에서나 볼법한 비밀 기지 같았다. 요컨대 무척이나 좁고 어두웠다는 소리다.

바 형태로 되어있는 테이블은 많아야 겨우 다섯이나 않을 정도였으며, 그 외에 원형으로 되어있는 테이블은 두 어개에 불과 했다.

그리고 태양 빛처럼 누런 조명은 안에서 책 조차 읽기 어려울 정도였다.

파견은 성큼성큼 걸어서, 바 테이블 쪽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아, 지미! 나 왔다고!”

그러자 바 테이블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며, 조명 보다 빛나는 머리가 인상적인 서양인 중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미라고 부린 남성은 험악한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찌푸리며 파견에게 삿대질 했다.

“이런 정신나간 년을 봤나. 간 뒤로 일절 연락도 없어서 죽은지 산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를 열라고 띡 문자만 보내?”

“문자 보냈으면 됐지. 뭘 더해? 뭐, 우리 사이에 편지라도 쓸까?”

파견은 쏟아지는 지미의 욕설을 무시하며, 폴짝 뛰어 의자에 앉았다.

내가 주저하다가 그 엉거주춤 그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 파견과 지미는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아직도 안뒤지고 살아 있었네. 징한 년 같으니. 그 빈약한 몸뚱아리는 여전하구나.”

“이미 뒤졌거든. 병신아. 한번만 더 성희롱하면 그때처럼 거시기를 걷어차버릴 테니까 닥치고 술이나 가져와.”

내가 옆자리에 앉자, 타겟이 나에게로 바뀌었다. 지미는 나를 보고 험상궃은 표정으로 쏘아 붙였다.

“그래서 넌 뭐야?”

“아, 전 그 이 사람의 직장 동료입니다.”

“직장 동료? 아, 그 쪽?”

파견은 지미가 능글맞은 표정을 짓자 쓸데없는 소리하면 뒤진다고 윽박지른 다음, 팔꿈치로 나를 툭 치며 속삭였다.

“이 꼰대가 나를 그 회사로 파견 보냈어. 그러니 어느 정도는 편하게 말해도 돼.”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워서 일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의바르게 할 필요없어. 그럴 자격도 없는 병신이니까.”

“이 계집애는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버릇없는 호로새끼인 줄 아네.”

지미는 파견에게 삿대질 한 다음, 내게 술을 잘하는 지 물었다.

나는 전 직장처럼 적당히 마실줄 안다고 말하려다, 저번 회식 때 파견의 주량을 떠올리고는 조금 할줄 고쳐서 말했다.

그러자 지미는 뒤에 진열된 술에서 유명한 위스키를 병째로 가져와 테이블에 쿵, 하고 놓았다.

······딱봐도 절대 도수가 낮은 술이 아닌데?

내가 병 라벨에 적힌 알코올 도수를 살피는 사이, 지미는 유리로 된 크리스탈 잔을 꺼낸 뒤 거기에 얼음을 담아 나와 파견에게 하나씩 주었다.

파견은 잔을 보고 으엑,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거 몰라?”

“모두가 다 너처럼 술고래인 줄 알아? 다른 사람과 같이 왔으면 좀 보조를 맞춰. 네가 그렇게 센스랑 눈치가 없으니 아직도 솔로지. 아, 그게 아니라 가슴이 작아서 그런 거였나?”

지미의 말에 얼음을 으적으적 씹고 있던 파견이 퉤, 하고 얼음을 지미에게 뱉었다.

지미는 고개를 틀어 피한 뒤 웃엇다.

“이 늙은 곰, 아직 감 안 뒤졌다.”

“총알이나 그렇게 피했으면 다리 병신되서 은퇴 안 했을텐데.”

“그 걸레 물은 주둥아리도 원인이었네.”

지미는 두 번째 얼음을 피해서, 안주를 내오겠다며 사라졌다.

파견은 위스키 병을 열고, 내 잔에 절반 정도 따라 준 뒤에 자기 잔에 거의 가득 찰 정도로 부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좀 거친 사람이라도 이해해줘. 좀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회사에 대헤서 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좋을거 같아서.”

“아뇨, 뭐. 괜찮아요! 마음에 들어요. 조용하잖아요. 다른 사람도 없고.”

“그럼 다행이고.” 하고 말하며, 파견은 잔을 들었다.

아니, 아직 안주도 하나 안나왔는데 벌써?

나도 당황하며 보조를 맞춰 잔을 들었다. 파견이 잔을 내쪽에 가져다 대며 짠, 하고 부딪혔다. 그리고는 마치 그 도수 높은 위스키를 물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안 마실 수 없어서 한모금 들이켰다. 그러자 은은한 향과 은은하지 않은 열기가 목에서부터 확 올라왔다.

파견이 말했다.

“나쁘지 않은 술이네. 어때? 괜찮아?”

“아, 예. 괜찮네요. 처음 마셔보는데 향이 좋은데요?”

“나 따라서 너무 무리해서 마실 필요 없어. 천천히 마시라고 천천히.”

파견은 그렇게 말하며, 이미 두 번째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는데 어떻게 천천히 마시냐고.

나는 한 번 더 마셔 잔을 완전히 비운 뒤, 잔을 내밀었다. 파견은 그런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잔을 채워주었다.

파견이 말했다.

“뭘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는 파견의 질문이 순간,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 내가 회사에서 생각할게 있었다고 둘러대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잔 안에 들어있는. 호박색 액체를 보며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요.”

“개인적인 거면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돼. 회사 일하는데 직원끼리 서로 모든걸 오픈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개인적인 일이 아니에요. 중요한 일입니다.”

내 말에, 파견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술을 홀짝였다.

“말해봐.”


나는 알코올의 기운을 빌어, 파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장미가 김 철의 손목과, 열 두자리의 패스워드를 보낸 것.

그 행위의 의미. 그리고 그 의도를.


파견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말없이 계속해서 술만 마셨다. 그동안 지미가 갓튀긴 감자튀김과 땅콩을 내놓았지만,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긴 이야기를 끝낸 뒤, 바싹 마른 목과 혀를 술로 축였다. 잔을 내려놓자마자, 내 입가에 뭔가 불쑥 내밀어왔다.

파견은 내 입에 감자튀김을 내밀며 말했다.

“술 그리 안 세다며, 안주도 먹으라고.”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입을 열어 파견이 주는 감자튀김을 받아먹었다. 파견이 말했다.

“너는 너무 머리가 좋아서 문제야.”

“······에?”

입에 감자튀김이 든채로 말하자 이상한 발음이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파견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는 내가 봤던 사람 중에, 내가 뭐 사람을 많이 봐왔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가장 기억력이 좋고 머리회전이 빨라. 덕분에 많은 위기를 해쳐나왔지. 하지만 때로는 그게 독이 될 수도 있어.”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것.

파견은 그렇게 말하며, 바 테이블 한쪽 구석에 놓인 체스말을 가리켰다.

“체스는 결국 상대방의 수를 읽는 게임이지. 하지만 상대도 그런 내 수를 읽을 거고, 결국은 그렇게 따지면 끝없는 수읽기 싸움이 되는 거야. 그리고 격투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럼 결국 수읽기만 잘하는 사람이 체스도 잘하고 격투도 잘할까? 그렇게 생각해?”

“······그건 아닐거 같습니다.”

“때로는. 단순하게 생각할 줄도 알아야해. 정보를 무시해도 된다가 아니라. 무시해도 될 정보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정보는 중요하지만 정보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우리 동료잖아요.”

내 말에 파견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하는 그녀가, 설유진을 뜻하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라.

“저는 동료에 대한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처럼 위험한 일을 한다면 더더욱더요.”


“걔가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파견의 말이 나를 관통했다.

뭔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말과 생각이 취기처럼 목구멍에서 한동안 빙빙 돌았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잔을 붙잡고 고해성사를 했다.

“생각하지 않지만, 걱정스러워요. 그리고 그런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합리화하고 있어요.”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위스키의 향이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한동안 침묵이 가게 안에 맴돈 후에, 파견이 말했다.

“나, 솔직히 걔 마음에 안들어.”


작가의말

잘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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