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
맛있는 요리? 그거야 뭐 왕께서 해달라고 하시면 하루든 일주일이든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
전속 요리사가 되서 궁전에 평생 눌러앉으라는 것도 아니고, 보상만 좋다면야 한 끼 정도 만드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어차피 내 일이 부자들한테 음식 만들어서 파는 건데.
사실 목적지가 왕궁이란 걸 알았을 때 이러리라곤 예상했다. 나처럼 직위 없는 평민을 초호화 마차에 태워 온 것만 해도 폐하께서 통 크게 인심 쓰신 거다.
기분 상하지 말라고 시종장까지 보냈지, 최고급 옷도 챙겨줬지, 애초에 왕의 초청장을 계속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부터 문제였다고. 생각해 보니 거의 삼고초려인데?
그리고 이 새 구두, 광택이 기깔나는게 진짜 최고급이었다. 헨리 씨 말론 이런 거 한 짝에 보통 5파운드에서 10파운드 정도 한다더만? 그럼 나는 지금 소버린 금화 열 닢 위에 올라탄 셈이었다. 기분 나쁠 이유가 전혀 없지.
게다가 군주에게 맛난 요리를 대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십년은 충분히 자랑할 수 있는 시대였다. 폐하의 싸인을 내 레스토랑에 전시만 해도 평판이 두 배는 뛰어 오를걸?
하지만 문제는 폐하께서 내게 '대관식' 요리를 주문하셨다는 점!
무려 '대관식'이라고! 엄청나게 중요한 행사처럼 안 들려? 군악대가 웨스트민스턴 거리에서 퍼레이드까지 한다니까?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걸, 고작 16세의ㅡ물론 속은 아니지만ㅡ미검증 요리사한테 맡기겠다고? 아니, 나 런던에서 데뷔한 지 고작 반년밖에 안 됐는데?
궁전에 날고 기는 요리사들이 널렸는데, 왜 하필 나야?
나도 런던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하면서 들은 게 많다. 당연하겠지만 왕실 요리사는 아무나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현대에서도 청와대 요리사는 엄청난 경력이 필요하잖아. 20세기 대영제국에서도 똑같았다.
영국 귀족들이 프랑스라면 질겁하면서 싫어하지만 그래도 딱 하나 인정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프랑스의 미식 문화.
현대에선 유럽 요리의 삼대장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이라고 하는데, 지금 시대에선 완전히 달랐다. 그냥 프랑스 혼자서 요리계를 죄다 독점하는 중이었다.
최고급 요리를 뜻하는 프랑스어, 오트 퀴진(Haute Cuisine).
비싸디비싼 향신료와 마더 소스, 버터, 크림 등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프랑스 전통 레시피들을 그렇게 부르는데, 이걸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느냐가 실력파 요리사를 판단하는 척도였다.
그래서 궁정 요리사들도 프랑스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도제식으로 레시피를 익히거나, 몇 년 전 파리에 설립된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 고급 요리학교)에서 교육받은 경력이 필수라고 하더라고.
바로 저 놈들 말이야.
"뭘 꼬나봐? 문제 있어?"
"예? 뒤랑 경, 그거 혹시 프랑스 방언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여기 참 시설 좋다는 감탄사였습니다."
저 놈들이 지금 내게 함부로 덤비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는 내 이름 때문에 날 진짜 프랑스 출신 특급 요리사로 착각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만드는 게 대관식 요리 샘플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며, 셋째는 나를 진짜 '나이트'로 오해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야, 이거 나이트 작위 효과 좋은데? 평민들이 내 한마디에 쩔쩔 매는데?
물론 이건 오해가 맞다. 시종장인 로드 프레데릭께서 나를 여기로 데려오며 '뒤랑 경'이라고 호칭한 게 이런 스노우볼을 만들었다. 아마 주도권을 잡아 보라고 일부러 그러신 것 같은데···
하하, 기분 째지네.
나는 어느 순간 긴장감을 완전히 날려 버리고, 그야말로 왕실 요리사들을 마치 하인처럼 부리기 시작했다.
"거기, 마늘 좀 갖다 주시고, 생강도 좀 빻아 와요. 후추도 좀 부드럽게 갈고. 이거 너무 덜 갈리지 않았습니까? 다시 해 오십쇼."
"···예, 뒤랑 경."
이들을 서브로 부려도 아무도 감히 반항하지 못한다.
그럴 수가 없지. 저 멀리 로드 프레데릭이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뒤랑 경, 혹시 그 만드시는 요리가··· 저희는 처음 보는 방식인데···."
"비밀입니다."
"아···."
열 명도 넘는 요리사들이 내 뒤에서 시립한 채, 내가 하는 모든 걸 하나하나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인 대관식 요리 샘플을 만들어 오라니, 제정신이신가. 집중 하나도 안 되는데.
물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왕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도, 이 떡두꺼비같은 놈들에게 레시피가 유출되어도 괜찮은, 적당한 한식이 몇 가지 생각났으니까.
창의적인 요리를 요청하신 거 아니냐고? 미쳤어? 요리에 창의성을 담게? 그건 검증된 레시피와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역사를 무시하는 행위지. 양날의 검이라고.
창의적인 요리를 만들었다가 입맛에 안 맞으면 누굴 원망하려고?
이 경우는 '내가 아직 안 먹어 봤지만, 먹었을 때 진심으로 감탄할 만한 요리를 대령하라'는 문장을 그냥 고상하게 돌려 말했을 뿐이었다.
아주 잠깐 민트 초코를 고민하긴 했는데··· 아니야, 그건 엘리자베스 2세 여왕님께서 좋아하셨던 거잖아. 육식파인 에드워드 7세 폐하께는 당연히 고기 요리를 대접해야겠지.
퍽!
나는 썰어낸 고기를 칼 등으로 힘차게 두드렸다. 전동 그라인더가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 없으니 손수 하는 수밖에.
"얼음 좀 더 가져와 주세요. 재료를 신선하게 하려면 차갑게 둬야 하니까."
"네, 네넵!"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속 고기를 다졌다. 아직 중요한 재료가 도착하지 않았기에, 시간을 최대한 끌 작정이었다.
뒤에 부동자세로 시립해 있던 요리사들이 얼굴에 피가 쏠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주방 문이 세차게 열리며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탕!
"뒤, 뒤랑 경! 부탁하신 재료를 가져왔습니다!"
"오! 빨리 왔네요!"
숨을 헐떡이며 내게 유리병을 내미는 궁전의 호위병.
이게 뭐냐고? 간장이랑 참기름.
어디서 구했냐고? 일본놈들 대사관. 거기라면 확실히 있을 것 같아서 말 타고 다녀오라고 심부름 시켰지.
왜 리머 가의 중국인 상점에서 안 구하고 굳이 일본 대사관으로 보냈냐고?
그 정도 난이도는 있어야 이 놈들이 내 레시피를 밖에서 함부로 재현하지 못할 거 아냐. 생각난 김에 일본놈들 식재료도 좀 축내려 했지.
일본 대사관에서 안 내주면 어쩔 거였냐고? 영국 왕실에서 달라고 하는데 절대 거절 못하지. 아마 이거도 부들대면서 공짜로 그냥 줬을걸? 많이도 줬다. 머나먼 이국 만리에서 이만큼 퍼줬으면 걔네 몇 끼는 반찬 없이 굶겠는데?
나는 간장병을 받아들고 바로 뚜껑을 열어 재꼈다.
킁킁.
"우웩."
시큼해! 짜! 하지만 성능은 확실했다. 이거, 씨간장이 꽤 많이 섞인 것 같은데?
살짝 맛을 보니 달기까지! 설탕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흠··· 이거 괜찮을까? 뭐 이 시대 일본 간장이라 맛이 좀 너프되겠지만, 어쩌겠어. 그냥 드셔야지."
그래서 뭘 만들 거냐고? 떡갈비.
송정식 떡갈비.
그게 내가 이번에 새롭게 시도할 한식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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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비.
한식의 정수가 가득 담긴 레시피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걸 베스트 10에 올린다.
원래 궁중 요리로 시작했기 때문에 역사도 깊고, 간장, 마늘, 참기름 등 한식에서 빠지지 않는 식재료도 듬뿍 들어가지.
각종 명절 밥상에 빠지지 않는 상징성, 다진 고기를 석쇠에 구워내는 한국 특유의 구이문화, '단짠'을 강조하는 한국 고유의 풍미까지 가득.
하지만 그중 가장 특별한 요소를 꼽으라면 역시 '궁중 요리'였다는 점. 왕에게 진상하던 음식이라는 말이다. 어떤 요리 레시피도 그만큼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뛰어넘기는 어렵다.
게다가 유럽에도 다진 고기를 활용하는 레시피들이 즐비했기에, 떡갈비라면 백 퍼센트 먹힐 거라 봤다.
21세기에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다진 고기 요리라면 역시 독일의 함부르크 스테이크(Hamburg Steak)를 빼놓을 순 없다. 물론 지금은 아직 유명하지 않은 지역 레시피에 불과해 영국인들은 존재조차 모르겠지만.
요거트에 찍어 먹는 그리스식 미트볼 케프테데스(Keftedes), 이탈리아식 토마토 고기완자 폴페타(Polpette), 덴마크의 고기전 프리카델렌(Frikadellen), 러시아식 돈까스인 코틀레타(Kotleta), 버터로 만든 소스를 끼얹어 먹는 프랑스의 아셰 스테이크(Steak Haché) 등도 모두 떡갈비처럼 다진 고기를 모양내서 굽는 요리들.
영국에는 없냐고? 물론 있지! 패것(Faggots)이라고, 진짜 웩 소리 나오는 고기 경단이 하나 있다!
미들랜드의 미친 놈들이 베이컨이랑 돼지 간, 돼지 내장, 돼지 심장, 돼지 비계를 갈아다가 구워서는 맛있다고 먹더라니까!
맞아, 그거 그냥 돼지 도축할 때 나오는 부산물 버리기 아깝다고 어거지로 만든 요리야.
겁나게 질겨! 그리고 비려! 거기에 얹을 게 없어서 느끼한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으니··· 그 맛은 굳이 설명 안 하련다.
자글자글.
"뒤랑 경, 내가 먼저 맛을 봐도 되겠소?"
다진 고기에 참기름과 간장, 설탕 조금, 후추 등으로 간을 하고, 모양을 내서 그리드아이언(*Gridiron, 서양식 석쇠)에 놓고 굽고 있자니, 갑자기 로드 프레데릭이 내 뒤로 다가왔다.
[프레데릭 제임스 윈체스터: 놀랍군! 다져서 굽기만 했는데도 고기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잖아! / 감정: 흥미 / 만족도: -]
흠, 이제야 이 할아버지 본명을 알아냈군. 윈체스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인데.
"으음, 맛있군. 과연."
당연하지. 내가 이 떡갈비로 요리 대회에서 대상까지 받았다니까? 맛이 없을 리가 있나.
나는 이 깐깐한 노친네가 좀 더 찬사를 늘어놓길 기대했지만, 더 이상 기대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나한테 질문 있소?"
"아니, 아닙니다."
시종장답게 굉장한 포커페이스였다. 이 정도 맛이면 더비 백작님은 눈물을 흘리며 씹어 삼켰을 텐데.
하지만 도일 씨의 가르침대로 시종장의 눈썹을 유심히 관찰한 나는, 그의 얼굴에 잠깐 스친 진실의 미간을 확인했다. 그거면 됐지 뭐.
떡갈비는 한국의 고기 요리 중에서도 풍미가 굉장히 뛰어난 음식이다. 애초에 맛의 베이스를 잡는 참기름과 간장 자체가 감칠맛의 끝판왕과 다름없는 식재료니까.
서양의 다진 고기 요리들이 육즙을 보존해 담백한 맛을 내고, 느끼하고 진한 소스로 풍미를 더하려 애쓰는 반면, 떡갈비는 완전 정반대의 노선으로 진화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결이 다른 음식이었다.
간장의 짭짤함, 설탕의 단맛, 거기에 소량의 후추와 마늘이 고기의 잡내를 잡아주며 따뜻한 맛까지 추가하지. 거기에 참기름의 고소한 향까지 더해지면? 말 그대로 풍미의 향연.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를 보이는 건 식감. 서양식 다진 고기 요리들이 대부분 팬에 구워 촉촉한 식감을 살리는데 치우치지만, 한국식 떡갈비는 직화로 불향과 구이 특유의 바삭한 식감까지 준다고.
완전히 새로운 맛의 경험일 텐데, 폐하께서 버티시려나? 아이씨, 햇반이랑 김치 땡기네.
하지만 이 떡갈비만으로 폐하의 입맛을 완벽하게 사로잡기엔 조금 부족해 보였다. 뭔가 보완해줄 서브 디시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뒤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던 요리사 한 놈이 용기있게 손을 들었다.
"로, 로드 프레데릭! 이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오, 뉴 빌런의 등장인가? 이제 클리셰 시작인 거지?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낙하산 때문에 자존심이 구겨진 이들이 들고 일어나는?
나는 신나서 서둘러 팝콘 뜯을 태세를 갖췄다.
어디 한 번 로드 프레데릭이 이 빌런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진압하는지 구경이나 해볼ㅡ
"저희도 같이 맛보고 싶습니다! 프랑스의 최신 요리를 시식할 기회를 저희에게도 주십시오!"
"맞습니다! 저희도 궁중 요리사입니다! 제발 저분의 뛰어난 오트 퀴진을 배우게 허락해 주십시오!"
에엥?! 뭐라고? 도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오냐?! 그리고 내가 언제 이게 프랑스 요리라고 했어?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입이 딱 벌어졌다. 이건 약속된 전개가 아니잖아! 여기선 굴러온 돌을 내쫓아 달라고 항의하는 게 맞지 않아? 너희들,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다 팔아치운 거야?!
물론, 이번엔 진짜 설렁설렁하지 않고 실력의 절반쯤은 보여줬다. 그러니까 내 비장의 무기인 떡갈비까지 꺼냈지.
폐하께서 대가로 내건 보상이 너무 탐났기 때문이었다.
장원(Manor). 템스 강 서쪽 리치먼드 지역에 위치한 조그만 장원.
요리로 폐하를 감탄시킨다면 그 장원의 임대료 징수권을 나에게 주겠다고 하시더라.
말하자면, 일종의 봉신 계약을 맺자는 소리였다.
- 작가의말
1. 다들 아시겠지만 떡갈비는 송정식 떡갈비와 담양식 떡갈비가 있습니다. 맛의 우위는 솔직히 개인 취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둘 다 맛있거든요. 하지만 가격은 송정식 떡갈비가 더 쌉니다. 담양식은 100% 소갈비로만 하는데 송정식은 소고기랑 돼지고기를 섞어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고기보다 돼지고기의 맛과 풍미를 더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아서 우열이 안 가려지는 거죠. 근데 왜 비싼 담양식이 아니고 송정식 떡갈비냐고요? 무협에서도 실력의 절반은 숨기라는 말이..
2. 현대에는 유럽 요리의 삼대장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꼽지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프랑스 요리가 미식계를 지배했다고 합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된 궁정 요리들이 끊임없이 발전한 덕분이었죠. 오트 퀴진으로 시작된 프랑스 미식 문화는 이후 누벨 퀴진 운동으로 이어지며 재료 본연의 맛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지만, 1901년은 여전히 오트 퀴진의 시대였습니다.
3. 하지만 자존심이 드쎈 영국 귀족들은 프랑스인 요리사를 고용하지 않고 영국인을 프랑스로 보내서 요리를 배워 오게 했다네요. 주인공 쟝은? 주인공도 영국인! 사실 영국에 프랑스계 이름을 가진 영국인들이 많아서 프랑스 이름을 가진 영국인을 봐도 이상한 건 아니었습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에 영국으로 이주한 위그노(Huguenots) 후손들이 많았거든요. 이들은 다양한 일을 하면서 영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고 합니다.
4. 패것(Faggots)은 영국의 전통 괴식 중 하나입니다. 변형 레시피 중에는 돼지 고환을 갈아 넣는 것도 있다고..우웩. 이유는 모르겠는데 미국에선 이 단어를 욕설로 쓴다고 하네요. 맛 때문이었을까요?
5. 아직 9년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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