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우스가 멸망하는 로마를 집어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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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맨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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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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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편. 희망의 등불.

DUMMY

전투가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리우비길드는 가장 먼저 전장을 수습하기로 했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전사자는 히다티우스, 티치아노, 올리시포에서 올라온 네오브리다오 주교 및 여러 사제들이 합동으로 장례를 치렀다.


적 포로들을 수습하여 감금하고, 전리품을 수거했다.


그리고 기병대에게 지시를 내려서 패주 중인 적 무리들을 뒤쫓는 것과 동시에 수에비 부족의 상황까지 정찰했다.


그런 식으로 일련의 조치가 취해진 다음 로마 연합군(?)은 자신의 본거지로 할 수 있는 스칼라비스로 되돌아갔다.


스칼라비스에 도착하자마자 켄소리우스는 가장 먼저 아에티우스에게 이번 전투에 대한 상세한 보고 및 앞으로의 요구 사항을 꼭꼭 적은 편지를 보냈고.


며칠 뒤 아에티우스는 그 편지를 받아 펼쳤다.


“흐음···.”


사실 아에티우스가 바란 건 수에비 부족의 지도자 헤르메리크가 자신의 이름에 겁을 먹어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헤르메리크는 전쟁을 골랐고, 전투가 벌어졌다.


다행히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고, 수에비 부족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젠장. 수에비 놈들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아에티우스는 이번 승리에 기쁘기보다는 난감한 감정을 느꼈다.


수에비 부족은 이번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당분간 잠잠해 질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가 수습되는 대로 또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뭉개진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미친 개처럼 갈레이키아, 루시타니아 일대를 휩쓸어버릴 게 분명했다.


‘일단 시간을 벌었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겠어.’


아에티우스는 한숨을 내쉬며 보고서의 글귀를 읽어나갔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것들을 바라봤다.


‘흐음. 석궁? 사냥용으로 쓰던 걸 전투에 써먹었다고? 그 석궁과 창을 적절히 활용해 정면 돌격하는 적 기병대를 깨부쉈다고?’


루키우스가 거둔 놀라운 성과.


안 그래도 폼페이우스 일족에게서 받아먹은 것이 어느 정도 있는 아에티우스는 한치의 눈도 떼지 않은 채 루키우스의 성과를 낱낱이 살펴봤다.


‘그 일족의 선조와 같은 성과를 거뒀다라···.’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턱을 긁으며 생각했다.


보고서를 다 읽고, 이번엔 켄소리우스의 요청 사항을 살펴봤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냐고? 어림도 없지.’


이미 켄소리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내보냈을 때부터 마음을 정했다.


켄소리우스와 몇몇 장교들을 히스파니아에 박아버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켄소리우스는 그런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 편지에 이런 말을 적었다.


‘마기스테르께서 우리를 히스파니아에 주둔시키겠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곳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 이 맹랑한 녀석.’


아에티우스는 켄소리우스의 요청 사항을 쭉 읽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실리아에서 고용된 병사들을 이곳 히스파니아에 주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은대지 제도를 적용한다고 통보했다.


‘그러니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그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주겠다고 미리 약속을 했다? 이걸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음과 동시에 그들을 주둔시키는 근거가 되겠군. 흥미로워. 그리고···.’


켄소리우스의 요구 사항들은 여기에 병사들을 보내달라 혹여 보낼 수 없다면 돈이라도 달라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병사는 보낼 수 없지. 내가 그토록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겨우 양성한 녀석들인데. 또 병사들을 그곳에 보내면 고트 놈들이 지랄을 할 테고, 그럼 남은 건···.’


결국 돈밖에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아에티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돈도 얼마 없는데. 여기저기 아기 새처럼 돈 달라 하는 곳이 많아.’


돈 나올 구석은 없는데, 돈 나갈 사항은 많은 이 조옷같은 현실.


아에티우스는 켄소리우스에게


‘그곳에서 뿌리박고, 스스로 독립하며 강하게 살아렴. 옛날 스파르타 인들은 7살 때부터 부모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강인하게 살아간다!’


라고 대답하며 관심을 끊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말을 전하면 켄소리우스는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원한을 가질 것이고, 그 다음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너희라고 버림받지 않을 거 같아?’


이런 말이 병사들 사이에서 돈다면 당연히 아에티우스에게 어마어마한 손해로 다가올 터.


그러니 켄소리우스에게 원한을 사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지원을 덜 보내는 절묘한 균형을 찾아야 했다.


얼마 뒤 생각을 정한 아에티우스는 종이와 필기구를 꺼낸 뒤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전령을 불러 켄소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


며칠 뒤 켄소리우스는 아에티우스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하아···.”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일이 예상대로 돌아가네요.”


켄소리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편지엔 어떻게 적혀있기에 그렇지?”


리우비길드의 물음에 켄소리우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병사는 주지 못한다. 돈은 보내겠으나 여기도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그곳에서 경제적 기반을 세워 군단을 한번 만들어 봐라.”


“내 조카의 예상대로 돌아가는 군.”


리우비길드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루키우스를 쳐다봤다.


“외삼촌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죠?”


루키우스의 물음에 리우비길드는 어깨를 들썩였다.


“폐하의 의중은 잘 모르겠으나 내 생각엔 그리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조건을 붙이겠지만.”


“조건이라면 무엇입니까?”


“뻔하지. 루시타니아에 주둔할 것, 오로지 수에비 부족만 상대할 것, 마지막으로 아에티우스에게 힘을 보태지 말 것.”


리우비길드의 시원한 대답에 켄소리우스는 ‘으음’소리를 냈다.


로마에 충성하는 그의 입장에서 리우비길드의 대답은 거북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부터 살아야지.’


아에티우스로부터 이곳에 유기를 당해버린 시점에선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실 서고트 지원군과 타라코의 자경단이 없었으면 이번 대승을 거두기는커녕 수에비 족속에게 싹 쓸려나갔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따지고 보면 리우비길드의 발언은 오히려 자신을 배려하는 뉘앙스가 강했다.


그렇기에 켄소리우스는 리우비길드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그때, 번쩍이는 전신 갑옷을 입은 티치아노 주교가 켄소리우스에게 물었다.


“마기스테르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다행이지만 코메스(사령관)께선 여기서 어떻게 경제적 기반을 세울 생각이시오?”


“으음···. 그건···.”


켄소리우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일만 마치면 아에티우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지라 이곳에서 경제적 기반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울 리가 있겠는가?


“병사들로 하여금 이 땅에 농사를 지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떠도는 유랑민들을 받아서 그들을 지키는 대신 부리면···.”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결국 이것밖에 없었다.


티치아노는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었고, 켄소리우스는 그 얼굴에 욱하며 이렇게 물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티치아노는 순간 루키우스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정말 권해도 되나?’


‘해도 상관없습니다.’


암묵적으로 루키우스의 동의를 얻은 티치아노는 다시 켄소리우스에게 시선을 줬다.


“본인은 현재 타라코 외곽에서 농민들을 불러 모아 농장을 꾸리고 있소.”


“교회 차원에서 농장을 운영한다고요?”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티치아노는 켄소리우스를 향해 타라코 외곽에서 꾸리고 있는 교회 자작농 연합을 들려줬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티치아노의 설명이 계속 이어질수록 켄소리우스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더 심상치 않았다.


“흠. 교회가 대신 땅을 산 뒤 그걸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대신 농민들은 그 땅값을 몇 년 단위로 분할하여 교회에 납부한 뒤 그 다음엔 십일조를 받는다라···.”


“교회가 농기구들을 구매하여 농민들에게 빌려준다? 흐음···.”


“그냥 인심 좋은 콜로나투스가 아닌가?”


리우비길드만 그런 식으로 교회 자작농 연합을 해석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손으로 턱을 집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특히 켄소리우스는 티치아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니까 주교님 말씀은 저도 그런 식으로 농장을 꾸리라는 소리입니까?”


“이미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땅값을 분할해 받을 필요는 없소. 또 이곳에서 군단을 만들려면 여러 가지 돈이 필요하지 않소?”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오로시우스 사제가 따로 농법을 연구하고 있소. 그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꽤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오.”


“농법?”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티치아노에게 집중됐다.


“흠흠. 뭐 아직 나온지 얼마 안 된 농법이라서 효과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오. 다만···.”


“그러니까 주교님 말씀은 우리 보고, 그 농법대로 한번 지어 보고 그 농법이 맞는지 검증하란 소리입니까?”


그 물음에 티치아노는 고개를 끄덕였고, 켄소리우스는 장고에 들어갔다.


‘으음. 어떻게 하지?’


티치아노의 제안을 거부할 순 없었다.


타라코의 자경단이 자신들을 살려 준 걸 생각하면 절대 거부할 수가 없다.


“아. 우리가 알려 준 농법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실패할 까봐 그런 것이오?”


“······.”


“뭐 이해하오. 하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 농법으로 지었다가 실패하면 그 실패한 양만큼의 곡물을 주도록 하겠소.”


티치아노의 제안에 켄소리우스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받지 않으면 바보다.


얼른 그 제안을 수락한 켄소리우스는 문득 목이 메었다.


이곳에 버림받은 자신과 부하들을 이토록 도와주는 사람들이라니.


고마웠다. 너무나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모두들···.”


켄소리우스는 그 말을 내뱉으며 눈물을 뚝뚝 흘렀다.


“여러분들 덕분에 우리는 여기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됐습니다. 같이 싸워줘서 또 우리를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그 말에 루키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운 전우이지 않습니까? 서로 등을 맞대며 목숨을 맡겼던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다고 생각하면 제 마음이 불편해 질 것 같습니다.”


‘전우’라는 단어에 켄소리우스뿐만 아니라 장교들도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순간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은 서서히 옅어졌다.


이곳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저 전우들만 있으면 자신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이 보인다.


그토록 원했던 희망과 빛이 보인다.


‘그때의 병사들이 왜 폼페이우스를 따랐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들은 희망의 등불을 쫓아간 것이었어.’


켄소리우스는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켄소리우스의 군단은 전우들의 도움을 받아 스칼라비스에 순조롭게 정착할 수 있었다.


*****


수에비 왕국 수도 브라카라 아우구스타(현재 포르투갈 브라가).


전 총독궁 현 왕궁이 눈앞에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왕궁으로 다가갈 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발이 무거웠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게는 점점 늘어난다.


발을 떼기가 무섭다.


발만 무거운 게 아니었다.


고개는 왜 이리도 무거운지 시선은 땅만 바라보고 있었고, 등은 바닥을 향해 굽었다.


족쇄를 차서 무거운 것인가?


아니었다. 손과 발, 등에는 무게가 나가는 그 어떤 물건도 차지 않았다.


그런데도 온 몸이 무거웠다.


‘그 기억이 계속 떠올라···.’


자신의 몸을 이토록 무겁게 한 원흉 그 기억.


그 누구보다 자신만만했고, 강인했으며 충성스러웠던 그 전사들이 약하디약한 로마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그 기억.


아직도 귓가엔 그 전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도 눈앞에 그 전사들이 바닥에 눕는 모습이 보인다.


그 누구보다 용감무쌍했던 이들은 전세가 기울자 로마군보다 더 추하게 도망쳤고, 로마군은 웃으면서 도망치는 전사들의 목숨을 거뒀다.


그 생각을 하니, 입에서 쇳냄새가 올라온다.


입술에서 분수처럼 퐁퐁 솟아나오는 핏방울이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진다.


그저 억울했다.


상대는 이기는 게 당연한 로마군이건만 암만 고트 놈들이 반절을 차지했지만 전력 면에선 자신이 훨씬 더 우월했다.


질 이유가 없는데, 졌다.


차라리 상대방에게 큰 피해라도 안겼다면 납득하겠지만.


상대방에겐 극히 미미한 피해를 안겼을 뿐이다.


그저 모든 면에서 압도당했다.


‘대패···.’


그 단어를 떠올리니, 무거웠던 몸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마치 물을 잔뜩 흡수한 옷을 입은 것처럼.


쇠사슬로 온 몸을 칭칭 감은 것처럼.


‘이게 책임감.’


왜 아버지가 이토록 책임을 두려워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이 몸을 가릴 쥐구멍이 있다면 그 쥐구멍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그렇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왕궁으로 향하니.


한 사람이 오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로 이 수에비 왕국의 왕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헤르메리크’였다.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가 천근처럼 무거웠지만 레칠라는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본 헤르메리크의 표정은 분노에 차지도 반대로 다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물건을 보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레칠라에게 뚜벅뚜벅 다가가 물었다.


“왜 졌지?”


“······.”


“난 너에게 침묵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 졌지?”


대답할 말이 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머릿속에선 글귀들이 순식간에 만들어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제···. 제가···..”


“네가 뭐?”


“제가 다 부족했기에 그렇습니다.”


겨우 이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네 부족함이 아니다! 왜 졌냐는 거지!”


“제가···. 적을···. 깔보아서···. 그렇기에···.”


“방심해서 졌다? 정말로?”


헤르메리크의 물음에 레칠라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로마군을 깔보았지? 왜 방심을 했지?”


“우리가 그놈들을 쉽게 이겼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겨서 방심했다. 그럼 이번엔 왜 그런 쉬운 상대에게 패배했지? 그저 방심했다는 소리를 하는 순간-”


헤르메리크는 검집에서 검을 뽑더니 그대로 레칠라의 목에 겨누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네 목을 직접 베어버리리라.”


“아버지···. 아니 폐하···.”


“그 전투를 자세히 말해! 처음 만날 때, 적은 어떤 포진을 취했는지! 적은 기존보다 상대했던 녀석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헤르메리크의 물음에 레칠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엇 때문에 졌는지 네 실수가 무엇인지 낱낱이 토해내라! 한니발에게 주구장창 당했던 로마인들조차 왜 졌는지를 계속 깨우치며 결국엔 한니발을 패배시키고, 카르타고를 무너뜨렸다! 그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서 그냥 넘겨버리면···. 너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전사들은 억울해서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리라.”


“알겠습니다. 폐하···. 상세히···.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레칠라는 그 악몽같은 기억을 더듬거리며 천천히 문장을 조합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헤르메리크의 칼이 자신의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자랑스러운 수에비 왕국에 겁쟁이는 필요 없으니까.


그게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라 할지라도.


살고 싶어서 발설하는 게 아니었다.


헤르메리크의 강압 때문에 발설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는 방심하다가 이런 참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


발설하는 거다.


그래야 다음 번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니까.


이 마음의 상처가 다시는 적을 얕보게 하지 않을 테니까.


레칠라는 그 누구보다 참패의 과정을 상세하게 말했다.


모든 서러움과 억울함, 그리고 처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토해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들은 헤르메리크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늙은 사자의 이빨과 발톱은 아직 상해있지 않구나.”


“······.”


“너에게 근신을 명하겠다. 집에 가서···.”


“감옥에 집어넣어 주십시오. 이런 참패를 겪고 편안하게 집에서 휴식하면 그 빌어먹을 곳에서 죽어나간 전사의 유족들이 절 어떻게 보겠습니까?”


“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감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헤르메리크는 무서운 눈으로 레칠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옥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한들 네 마음이 편안해 질 것 같으냐? 이건 벌이다. 그 어떤 곳보다 편안한 곳에서 너는 그 어떤 고통보다 더 날카롭고, 아픈 고통을 받으리라.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네 나쁜 버릇을 한번에 날려버리겠지.”


“폐···. 폐하···.”


“들어가라.”


그 말에 레칠라는 고개를 푹 숙이며 헤르메리크에게서 멀어졌다.


*****


올리시포(현재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리우비길드가 이끄는 서고트 지원군과 티치아노가 이끄는 타라코의 자경단은 차례차례 선박에 탑승하고 있었다.


올리시포의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우리를 지켜줘서!”


“그 황충 같은 수에비 놈들을 쫓아 내줘서 감사해요!”


선상에 오르는 병사들은 그런 환호를 들을 때마다 미소를 지었지만 유독 한 사람만큼은 달랐다.


바로 리우비길드였다.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조카 루키우스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자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웠으나 동시에 경계심이 들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저 녀석이 크면 클수록 나에겐 좋지만···.’


루키우스의 역량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웃돌고 있었다.


자칫하면 주군의 대계를 아주 확실하게 망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평생 따르던 주군을 고르는가? 아니면 내 가족을 고르는가?’


둘 다 소중했기에 한쪽을 고르기 힘들었다.


자신을 토사구팽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주군이라면 응당 가족을 고르고.


남보다 훨씬 더 못한 가족이라면 주군을 고르겠지만.


지금은 둘 다 나쁜 사이가 아니기에 문제였다.


리우비길드는 퀸투스와 루키우스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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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편. 희망의 등불. +32 24.08.28 4,041 200 18쪽
36 36편. 로마 인빅타. (무너지지 않는 로마) +38 24.08.27 4,200 221 18쪽
35 35편. 루키우스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38 24.08.26 4,018 209 18쪽
34 34편. 싸울 마음을 품게 하는 방법. +32 24.08.25 3,958 18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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