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이드(Dec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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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미소
작품등록일 :
2024.08.04 21:47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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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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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튜토리얼의 끝

DUMMY

눈 떠보니 세상이 망해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조금 힘들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미증유의 재난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민들이 쌓아둔 짐들 사이로.

그 틈을 힘겹게 기어 나온 나를 반긴 건 오직 자욱한 안개뿐이었으니까.


무너진 건물, 버려진 차량, 적막한 서울 도심 속,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고 있는 안개.

내가 정신을 차리고 처음 본 광경이었다.

단 한 문장만이 머리에 맴돌았었다.


결국 좆 됐구나.


텅... 텅!

움찔.


서울시 노원구 주공아파트 13단지에 내가 두드린 현관문 소리가 울려퍼졌다.

시덥잖은 기억 때문에 생각보다 손에 힘이 더 들어 갔나보다.

내가 두드리고 내가 놀랬다.


누가 볼세라 황급히 개방된 아파트 복도 담벽에 붙어 외부를 살폈다.

내 키보다 약간 낮은 담벽 위로 동태를 살폈다.

버려진 차량들로 막혀버린 지상의 주차창 위로 수북히 쌓인 쓰레기들과 내가 모르는 싸움의 흔적만 있을 뿐 조용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덮고 내려앉은 안개. 밖에 있음에도 폐소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짙어서인지 소리가 마치 실내에서 울려 퍼지는 것같이 느껴져 더욱 식겁했다.

어디를 가도 갇혀있는 기분이라서 끔찍하다. 아니지 세상이 갇혔다는 게 더 정확하려나?


지금으로부터 대략 1년 전, 2012년 12월의 ‘그 날’ 저건 눈과 함께 세상에 내려왔다.

저게 평범한 안개가 아닌 건 확실하다. 나라를 집어삼킬 정도로 (어쩌면 온 세상을) 큰 범위와 그리고 그 안을 돌아다니는 괴물까지 말할 필요도 없다.

저건 없어지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태풍이 불어도 마치 잘못 인화된 사진처럼 세상에 콱 박혀 희뿌연 시점만을 만들어 낸다. 이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담벽 너머로 허공으로 얇고 매마른 손을 뻗어 보았다.

시각은 12시 21분. 정오임에도 햇볕의 따스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3월이고 이제 막 봄의 시작이라지만 그래도 날씨는 서럽게 춥기만 하다.

제한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좌절과 무력감이 몰려온다.

... 몰려 온다?


“크흠... 후우... 들이 쉬고.. 내쉬고... 진정해.. 내 생각이 아니야.”


안개가 충동질을 하는 거다. 공격... 그래 이건 공격으로 봐야 한다.

저건 날 공격하는 적이다. 도망칠 수도 상대할 수도 없는 적.

어떻게 할 수 없다면 무시가 답이겠지.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고 내가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 남의 집 현관문을 향해 돌아섰다.


노크와 ‘감각’으로 내부에 아무도 없음을 확신하고 주머니에서 얇은 핀과 철사를 꺼내 문을 따기 시작했다.

10년 후 미래엔 전자식 도어락이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다던데 내겐 다행히도 이 동네는 못 사는 동네라 대부분이 철사 하나로 해결이 가능하다.


철컥. 탁.


오랫동안 연습해서인지 속도가 빨라짐을 느끼며 재빨리 안을 살피고 들어섰다.


“씁.. 베란다 창이 다 깨져서 밖이나 다를 바 없네... 아니지 좋은 건가?”


내부는 안개로 들어차 있어 음산한 분위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완전히 붙어버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습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퇴로는? 여긴 3층이다 여차하면 베란다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 현관문, 작은 방 창문, 베란다 3곳 확인.

내부의 잠긴 방이나 공간은? 없다. 문은 전부 열려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남의 집을 털어보자. 신들이시어.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게 해주세요.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모든 서랍이 제멋대로 열려 있고 바닥에 미처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와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급함이 잘 보존된 형태를 보아 아마도 이 집은 사태가 터지자 마자 도망칠 준비를 했던 부지런한 사람들이 살았었나 보다.


제일 먼저 주방을 살펴봤다. 20평짜리 작은 아파트라 둘러볼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꼴에 주방이라고 바닥에 떨어진 과일이며 깨진 통에서 흘러나온 김치 국물이 흥건하다.


“조낸 급했나 보네. 쏟은 게 반이네. 냉장고 안에 남은 게... 우욱!!”


바닥의 음식물들을 피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쏟아져 나오는 악취들이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1년만에 외부 공기와 만나서인지 숙성된 썩은 내가 진동을 한다.

냄새를 참아가며 냉장고 안에서 건질만한 것들에게 손을 뻗었다.


참치캔, 복숭아 통조림. 골뱅이 통조림, 밀폐 되어있고 보존기간이 긴 음식들. 결국 ‘상식’적인 선택만이 남았다.

한 참을 고르고 고르다 바닥에 쏟아진 ‘비상식’적인 것들에 눈이 갔다.


아직도 붉은빛을 유지하는 사과와 바닥에 쏟아진 김치통의 국물은 흥건하다. 마치 방금 전에 쏟을 것들처럼.

1년 동안 외부와 단절되어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들은 모두 썩어서 악취마저 흘리는데 바닥에 음식들은 아직도 신선해 보인다.

안개다. 안개에 쌓인 것들은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박혀있다.


“알면 알수록 소름 끼치게 끔찍하네. 안개에 접촉된 건 변질된다는 건 알았지만 시간마저도 영향을 주는 건가?”


모든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부패한다. 하지만 안개에 닿은 것들은 시간이 멈춘 듯 변하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진 사과가 먹음직스럽게 보여 챙기고 싶지만...

저건 못 먹는다. 독이 들어있다.

안개라는 독. 내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변한 걸까?


모두에게 끔찍하게 느껴지는 비상식이었지만 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왜냐면 내가 짐 더미들 사이에서 기어 나온 게 두 달 전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난 1년 동안 그 짐들 사이에서 기절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처음에 멋모르고 먹었다가 죽을 뻔 했지... 내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던 걸까? 내 몸에도 안개라는 독이 스며들어 있나?”


끔찍한 가정에 진저리를 치며 뒷걸음으로 주방에서 벗어나려 했다.


탁.

“음? 사진?”


내 발에 채인 그것은 바닥에 떨어진 가족사진이었다.

싸구려 액자 속엔 중년의 부부와 내 또래로 보이는 고등학생 소녀 그리고 눈매가 사나운 남동생이 찍혀있었다. 이들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갈 때가 있었을까? 회장님 소리 들었던 아빠가 있는 나도 지금 이 꼴인데... 이 동네 사람들이 갈데가 어딧겠어. 다 죽었겠지.


퍽. 휘윅~~ 탁.

발질길에 날아가던 액자가 벽에 맞고 금이 갔다.


“에이 썅. 거지같은 동네. 좀 만한 집 구석이라 볼데도 없네.”


투입되는 노동력 대비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직도 잠겨있는 수많은 아파트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조용히 멸망한 세상에서 버티고 버티다 버려진 것들일 것이다.

아니면 나같이 나중에 침입한 사람들에 의해 이미 털렸거나.

의욕이 꺾이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뭐 건질 것 없나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는 건데...

아니지.. 난 혼자가 아니다.


[원숭이 새끼. 또 지랄하고 있네. 회의 갔다 온 그 잠깐을 못 참아서 질질짜는 거냐?]

“개솔. 즐 처드셈. 짜증 난 거랑 우는 거랑 구분 안되심?”

[말 했잖냐. 니 생각까진 공유가 안 된다고. 그래도 느껴지는 감정이랑 호흡 신체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봤을 때? 가족사진 보고 울컥했냐?]

“에이씨... 진짜. 놀리지 마요.”


갑작스럽게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다.

반파된 도심 속에서 안개에 둘러 쌓여 홀로 남은 내게 다가온 건 괴물들만이 아니었다.

절망을 끌어안고 도시를 배회하며 죽어갈 때 기적처럼 저 목소리가 다가왔었다.


“근데 형 회사라면서요? 일 안해요?”

[점심시간이라 잠깐 나와서 연결한 거야. 원숭이 새끼 잘하나 확인했다.]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이제 16살... 아니지 1년 지났으니 17살인데.”

[니 꼬라지 봐라. 1년 동안 냉동돼서 키가 중학생 시절에 멈췄잖아. 그러니까 미친 듯이 먹을거 찾아라. 내가 키가 큰 게 고딩때였으니까. 딱 니 시점이다.]

“알았어요. 그래도 미래를 아는 게 다행이네. 중학생때 맨날 앞자리였는데 진짜로 나 키 미친 듯이 크는 거 맞죠? 180이라고 했나?”

[정확히는 179다. 넌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더 작아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알지?]

“알았어요. 열심히 돌아볼께요.”


두 달 전 괴물들과 사람들을 피해서 반송장 상태로 도망 다니다가 결국 건물 옥상에 올라섰었다. 난간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기적처럼 그가 말을 걸어왔었다.


그의 이름은 이 진우. 나와 같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과 4살 터울의 친형이 있다. 나와 같다.

강남 8학군에서 명문 사립 중학교에서 꼴통 소리 들으면서 다니가가 아빠의 사업 부도로 이곳 노원에 이사오게 되었다.


... 나와 같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나는 17살이고 그는 27살이다.

나는 고등학생이고 그는 군필자에 회사 다니는 어른이다.

그리고 내 세상은 안개에 휩싸여 망해가는 아포칼립스상태이지만 그의 세상은 여전히 자본주의든 국가든 존재하는 멀쩡한 세상이라는 거다.


다중 우주. 우리는 그걸로 합의를 봤다.

영화에서 나오는 멀티버스 세상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세계의 우리가 이어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믿을 수 없게 변해 버린 내 세상에서 이것보다 신기한 건 아직 보질 못했다.


[뭐 찾은 거 있냐?]

“그냥 뭐 통조림 몇 개 정도. 보고 있어요?”

[기다려봐. 시각은 연결하는데 시간이 걸려. 잠시만 그래 보인다. 흠... 성장기에 도움이 될 만한 영양소가 부족한 듯 한데..]

“필요하면 벌집에 가서 교환하죠. 뭐.”

[... 본래라면 말렸어야 하지만. 그래 언제까지 혼자 다닐 순 없지. 부딪힐 때가 됐다.]

“몸을 회복하는 튜토리얼 끝났으니 본 게임이라는 거죠?”

[뭐 쉽게 말하자면 그렇지. 하지만 알지? 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하는 거.]

“에이...내가 바보도 아니고 나도 2개월을 혼자 버텼어요.”

[다른 놈들은 1년 2개월을 버텼지. 살아남은 놈들중에 어설픈 놈은 이미 다 죽었다고 봐야 해.]

“....근데 정말일까요? 이렇게 된 지 1년이 넘었다는 게?”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사람들 상태를 봐라 저게 하루 이틀 만에 변한 모습들 같냐?]

“궁금한 건 많은데. 알 방법조차 모르겠네요.”

[하나는 확실히 알잖아.]

“살아남는다는 것.”

[그래. 살아남아야. 궁금한 걸 풀 수 있다. 우리가 연결된 이유도, 니 세상이 씹창난 이유도. 그러니까 중꺽마다.]

“중꺽마. 확인.”


10년 후 유행할 유행어를 끝으로 더 이상 형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형이라... 우린 서로 부를 호칭부터가 애매한 사이였다.

같은 이진우라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부를 호칭이 생겼다.

난 형을 태창이 형이라 부른다. 목소리만 들리는 상태창 같아서.

태창이 형은 나를 원숭이 새끼라 부른다.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다.


“... 1년이 지났다라...”


내 기억엔 공백이 있었고 이걸 얼마 전에 알았었다. 거실 벽면에 붙어있는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두텁게 껴입은 옷으로도 야윈 몸이 눈에 들어온다. 길어서 묶은 머리, 움푹들어간 볼, 퀭한 눈.


“많이 좋아졌네.”


거의 굶어 죽어가던 반 시체 상태에서 이만큼이나 회복했다.

각오를 다지며 거울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렸다.


“넌 할 수 있어. 살아 남아...”

[아 그리고 혼잣말을 좀 늘려봐라. 시각은 연결이 힘들지만 목소리는 상시로 들릴 수 있게 연습 중이니까 평소에도... 너 뭐하냐?]

“.....에이 썅. ”


무안하게 뻗은 주먹을 급히 내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언제나처럼 자욱한 안개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다.

내 세상은 조용히 멸망했었고.

난 조용히 멸망한 세상에서 뒤늦게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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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철창 속 정화 24.08.20 42 2 12쪽
12 정리와 침식 24.08.19 48 2 12쪽
11 야간 전투 24.08.18 46 2 13쪽
10 마석 24.08.16 47 1 13쪽
9 첫 번째 임무 24.08.16 55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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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중이 24.08.12 61 3 12쪽
6 검문소 24.08.10 65 2 13쪽
5 우리 집 24.08.09 73 2 14쪽
4 안전 귀가 24.08.06 86 3 12쪽
3 동기화 24.08.05 104 6 13쪽
» 튜토리얼의 끝 24.08.04 131 5 12쪽
1 삼위일체 24.08.04 181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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