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이드(Dec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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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미소
작품등록일 :
2024.08.04 21:47
최근연재일 :
2024.09.0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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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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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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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안전 귀가

DUMMY

해가 저무는 시간이라면 아직 좀 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사소한 이유로는 괴물들, 특히 아까 전 마주쳤던 백귀같은 놈들이 싫어하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인 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놈들은 낮에는 어두운 건물 안이나 지하에 숨죽이고 있다가 밤이 되면 미쳐 날뛴다.

내가 놈을 간단한 유인과 기습으로 잡을 수 있던 게 놈들은 햇빛 아래에선 인지 능력과 운동능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원인은 모른다.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한 건 결과다.

계속 목숨 붙들고 싶다면 밤에는 나다니지 말자.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시.....바... 길이.. 변했다?”


안개는 접촉한 대상을 변질시킨다.

그게 음식이라면 성질이 변한 건지 시간이 멈춘 건지 썩지 않게 되었고

사람이라면... 백귀라는 괴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 안개는 모든 걸 덮고 있다.


길이 변한다. 같은 거리, 같은 경로를 오고 가더라도 짧게는 몇 분 심지어 길게는 시간 단위로 도착 시간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물론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한다면 말이다.


“진짜 난이도 좆 같네. 낮에도 변한다고? 아.. 어쩐지 오늘 유독 짙더라니..”


안개는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농도의 변화는 일어난다.

오늘은 유독 가시거리가 짧았다. 멀리 보는 날에는 300m 넘어까지도 윤곽이 보였지만 오늘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거 같다.

하늘을 보니 떠오른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타오르는 붉은 원의 흔적이 보였다.

끔찍하게 변한 세상에선 든든한 아군 하나가 안개에 납치당했다.


“침착.. 침착하고 생각하자. 아직 낮이고 시간은 여유있어. 후.. 좋아.”


‘변질’되었다고 하지만 갑자기 없던 건물이 생기고 길의 방향이 말도 안 되게 변하는 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길게 혹은 조금 더 짧게 변한 것뿐일 거다. 추측이다.

원인에 대한 판단이 우리 둘은 달랐다.

난 길 자체가 변화했다는 쪽이었고 태창이 형은 사람의 인지, 즉 느낌에 안개가 영향을 미쳐 같은 거리인데 다르게 느끼게 만든다고 추측했다.

어쨋든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만 중요하지.


“외웠던 대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야.”


지형의 완전히 달라졌다면 모를까 사소한 길이의 변화는 괜찮다.

어느 특징의 건물에서 어느 방향으로 꺽는다. 오른쪽으로 돌고 신호등의 빨간불이 박살 난 교차로에서 2번째 골목으로 들어서 직진. 이런 식으로만 간다면 문제는 없어야 했다.


“큰 길이 나오고 길게 걸어서 나오는 두 번째 골목에서 넝쿨로 덮힌 세탁소가... 세탁소가.. 없다?”


문제가 생겼다. 길게 걸어서란 부분이 확실하지 않게 돼버렸다. 나와야 하는 특징적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부터 사람 돌아버리게 만든다.

사소한 길이의 변화가 안개라는 제한된 가시성과 합쳐진다면 세상은 거대한 미로가 되어버린다.

등에서 식은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 시바.. 거지같은 동네. 진짜 어떻게 못 사는 동네는 죄다 이렇지? 비슷한 건물들이 왜이리 많아. 똑같이 생긴 놀이터만 도대체 몇 번째나고!”


짜증이 솟구치며 작은 소리로 분노했다.

노원이란 서울 외곽동네는 놀러 온 적도 없다. 우리 집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다면 평생 쳐다도 안 볼 동네였다. 왜 하필 이사하고 세상이 망했을까. 강남 쪽이었다면 눈 감고도 길을 찾았을 텐데..


[거 시발새끼. 노원구 주민이 듣기에 좆 같은 말을 하시네. 나 거기서 10년 살았어. 시방새야.]

“형! 길 좀 봐줘요. 낮인데도 변했어요.”

[일단 사과부터 쳐 박으세요. 양아치 새끼야.]

“헤헤.. 죄송.”

[..후우... 원숭이 새끼. 나한테 욕하는 기분이라서 화낼수록 짜증이 나네. 넌 사람 새끼 되는 게 나보다는 시간이 더 거릴 거 같다.]

“죄송합니다. 화가나서.. 아니 게임 난이도가 엄마... 아니 어이 없잖아요.”

[별로 안 미안해 하는 거 아니까 죄송한 척 그만해라 징그럽다. 입 닥치고 주변을 봐봐. 아 그래 청수목욕탕 보이네 니가 보는 방향 정면으로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


다행히도 나에겐 10년을 자랑하는 노원 토박이 네비게이션이 있었다.

길이가 변하는 사소한 변화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성능 좋은 길잡이가.


[나머진 알지? 외운 대로 돌아가. 가다가 모르겠으면 어디 숨어서 날 불러라. 길 한복판에서 애새끼처럼 징징대지 말라고.]

“확인. 감사.”

[... 에휴... 매일 매일 흑역사를 4K로 돌려보는 기분이다. 마감 시간이니까 조금 있으면 나 퇴근이다. 그때까지 사고 치지 말고 사고가 날 거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라.]

“뉘에~ 뉘에........... 갔음? 안 보심? (소근) 개꼰대?”

[....]


히히. 태창이 형이 있어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우린 같은 이진우라서 형은 나를 너무 잘 안다.

뭘 두려워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말로 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다.

하지만 가끔은 낯설 때가 있다. 방금처럼 잔소리가 길어질 때.

어른이 되어서 그런가? 회사에 다니고 군대에 다녀오면 나도 저렇게 변할까?

하지만 나에게 그런 기회는 안 올 거 같은데?


“아~ 나이 먹기 싫다. 늙기 시러. 시러 시러... 아이 시러~~”


방향이 잡혔고 눈에 익은 길이 보인다. 집까지 얼마 안 남았다.

시각은 17시 45분.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가자.

대로를 피하고 건물 벽에 붙어서 언제든 은,엄폐 할 수 있게 걸었다.


대부분의 유리창이 박살이 나고 길거리엔 버려진 차량들에 녹이 슬어있다. 그리고 건물 외벽마다 담쟁이덩쿨 같은 게 건물들을 휘감고 있는데 그 크기가 상당하다. 식물들도 변했나 보다.

그리고 이런 풍경에 안개를 한 스푼 첨가하면 분위기 작살난다.

영화나 소설에서 봐왔던 멸망한 세계에 한복판을 걷고 있는 기분이 뼈저리게 다가온다.


두 달 전. 혼자서 모든 걸 견뎌내야하는 말 그대로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던 반 죽어가던 그때에는 이 모든 것이 두려웠었다.

하지만 목소리뿐이지만 조력자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자 이 풍경들이 마치 영화를 보듯 새롭게 다가온다. 분위기 개 쩐다. 진짜.


쿵!


“이쪽으로 백귀가 몰려 옵니다!”

- 이쪽이 어디야! 이 시발 새끼야!

“서... 서쪽!! 서쪽 방면 입니다!”


분위기에 취해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걷던 중 아파트 단지를 구분 짓는 담 너머로 소란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다급한 외침과 분노에 가득 찬 그보다 더 큰 무전 소리.

육성의 주인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무전기 안의 남자는 아는 목소리다.


“벌집? 김호철 아저씨 목소린데?”


호기심이 일어난다.

벽만 넘으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태창이 형이 사고 날 거 같으면 도망치라 했는데?

음... 아 갑자기 길이 헷갈리네. 벽 너머를 봐야 길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애. 살짝만 봐보자.


주변을 확인하고 최대한 감각을 끌어올려 ‘감지’해 본다. 근처에 백귀는 커녕 괴물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벽은 내 키보다 높았지만 지금은 동기화를 30% 끌어올린 상태다. 충분히 넘을 수 있음에도 난 돌고 돌아 몇 미터 앞에 구멍 난 벽면으로 걸었다.


태창이 형한테 또 욕먹긴 싫었다. 이 동기화라는 거 내가 느끼는 부담을 태창이 형도 실시간으로 느낀다. 내가 쓰는 몸의 과부화를 태창이 형은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벽을 타는데 쓰는 근육의 힘을 형은 실시간으로 느낄 거고 이상함을 감지하고 내 ‘눈’으로 연결할 수 있다. 그럼 잔소리의 시작이고.

엿보기 구멍으로 살짝만 위치를 확인하는 거임.


“....벌집 사람들이네? 근데 왜 아파트 단지에?”


구멍 너머 아주 멀리 안개로 인해 실루엣만 간신히 보이는 대규모 무리들이 단지 내를 점거하고 있었다.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형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차량을 운용하고 규모가 크며 사람들의 체격이 윤곽만 봐도 튼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녀 성비가 비슷한 느낌이다. 노원에서 저 정도 되는 집단은 ‘벌집’ 밖에 없다.

청계천 옆 고등학교에 터를 잡은 노원구 토박이들의 생존자 집단.

나도 몇 번 가서 물물교환을 할 정도로 호전적이지 않은 곳이다. 내가 합류하고 싶은 곳이기도 했고.


“이 근처는 이제 다 털린 건가?”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나는 말이 있다. 풍요 속에 빈곤. 원래는 다른 의미가 있지만 내 세상은 진짜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라져서 서울에는 엄청난 물자가 남아있다.

지금 당장도 내 뒤편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면 옷이며 공구따위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문제는 필수 소모품들. 음식, 약품 같은 중요한 자원은 사태가 터지고 1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게 부족해졌다.


“이제는 아파트까지 털어야 할 정도로 물자가 부족한가?”


혼자서 돌며 아파트는 파밍 장소로 적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근데 그게 나 혼자였을 때는 감수 할 만한 단점이지만 저 정도 규모의 무리에겐 치명적이 단점이 더 생긴다.

파밍의 구역이 수평적으로 넓어지는 게 아니라 수직적으로 길어진다.

만약에 일정 인원을 아파트에 올려보냈는데 괴물들의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각층에 퍼져 버려서 집단의 이점이 사라지고 개인으로서 각개격파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고 태창이 형이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벌집 사람들이 아파트 단지를 돌고 있다.

저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는 듯 위험한 도박을 시도하는 거 같은데...

잠깐만 그렇다면 내가 거길 파고들 기회가 오지 않을까?


“위기를 기회로.... 내일 한 번 벌집을 들려야겠는데? 이젠 몸도 어느정도 회복했고. 보자 내일 태창이 형 세상은 토요일 이니까.... 괜찮을지도?”

[괜찮을지도 같은 소리하네. 이 시발 원숭이 새끼가. 난 주말도 없냐? 닥치고 그만 구경하고 집에나 가라.]

“히익... 언제부터..??”

[니 새끼 혼잣말도 안 중얼거리고 조용한 거 보면 뻔하지. 벌집이 그나마 괜찮은 놈들이 모인건 맞는데 거기도 주변에 떨거지들 받아들이면서 거시기해졌다. 지금도 봐라 쟤들 명령채계가 뻐걱거리는 게 니 눈에도 보이잖냐.]

“그... 그래도 기회를 위기로.. 내가 합류할 기회가 있잖슴?”

[반대고 새끼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고 지금 니가 해야 할 우선 순위가 뭐지?]

“... 안전 귀가.”

[그래. 예상치 못한 사고 나기 전에....]


..,, 영광 ,,,영광 .,영광~ 주님께 모든 영광~~

아아~ 길 잃은 어린 양들이여, 우리와 함께 하세. 모두가 신의 품에서 하나 되세.


갑작스럽게 멀리서 확성기를 통해 찬송가가 들려 온다. 친숙해야 할 음색이 변한 세상에 분위기와 섞여 을씨년하게 들려왔다. 나와 마찬가지로 벌집 사람들도 들은 걸까? 그들의 움직임이 더욱 다급해졌다.


“시발 광신도 새끼들! 그렇게 처 잡았는데 아직도 남아서 지랄이네!”

“야 판 접어! 위에 애들 다 내려오라 그래! 복귀한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광신도 집단.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일원교라 불리는 종교집단이 이곳 외곽까지 출몰했다.

저들에겐 타협도 협상도 없다.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괴물들을 몰고 다니며 전도한다.

원래 저랬는지 아니면 안개로 인해 더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끄어어어어어!!!! 크아아아아아!!


도시가 울부짓는다. 사방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하나,둘 가까워져 온다.


[뛰어! 병신아!]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내 두 다리와 머릿속 목소리 뿐.

그렇기에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안개 속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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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그로 +1 24.08.30 40 2 13쪽
19 둥지에서의 하룻밤 24.08.29 33 3 13쪽
18 꿀벌들의 일과 24.08.27 35 3 12쪽
17 능력과 경험치 24.08.26 36 2 14쪽
16 출항과 옆집 늑대들 24.08.25 34 2 13쪽
15 어른의 사정 +2 24.08.23 43 2 12쪽
14 바뀐 대가리 +1 24.08.22 39 2 12쪽
13 철창 속 정화 24.08.20 40 2 12쪽
12 정리와 침식 24.08.19 45 2 12쪽
11 야간 전투 24.08.18 45 2 13쪽
10 마석 24.08.16 45 1 13쪽
9 첫 번째 임무 24.08.16 54 2 12쪽
8 합류 24.08.13 56 3 12쪽
7 다중이 24.08.12 59 3 12쪽
6 검문소 24.08.10 63 2 13쪽
5 우리 집 24.08.09 71 2 14쪽
» 안전 귀가 24.08.06 85 3 12쪽
3 동기화 24.08.05 104 6 13쪽
2 튜토리얼의 끝 24.08.04 129 5 12쪽
1 삼위일체 24.08.04 179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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