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이드(Dec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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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미소
작품등록일 :
2024.08.04 21:47
최근연재일 :
2024.09.0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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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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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창 속 정화

DUMMY

아마도 2012년 12월 겨울이었을 거다.

세상이 변하기 며칠 전이었겠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사업 때문에 아빠 얼굴보다 수행비서 얼굴이 더 익숙했던 아버지와

내가 뭘 원하는지보다는 뭘 입고 있는지 더 신경 썼던 엄마,

의대 간다면서 온라인 게임 만렙 찍고 합격증 가져왔던 친형,

그리고 자격지심에 가득 차서 같잖은 반항이나 해대던 나.


그런 가족이 호수를 옆에 낀 별장에 누구도 반기지 않은 가족여행이란 걸 갔었다.

당연하게도 난 같이 있는 것조차 숨이 막혀 밤에 몰래 빠져나와 호숫가 주변을 맴돌았었다.


이 다음은?

그래. 호수 한 가운데서 이상한 걸 봤었다.

색동 저고리를 입고 온몸에 부적을 한가득 붙인 채 장단에 맞춰 널뛰는 소녀를 보았었다.


아니야. 그런 건 없었어.


겨울이라도 호수가 얼기엔 이른 시기라 당연하게도 그 아이는 호수에 빠졌었지.


아니. 그저 치기어린 반항심에 같잖게 죽음을 생각하며 깝치려고 호수 중앙에 접근했었다.


그리고 난 홀린 듯이 그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갔다가 나도 빠졌지.


아니. 난 혼자 빠졌었다.


죽을 뻔 했다.

죽을 뻔 했지.


그런데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


“크헉... 쿨럭.. 쿨럭....으으으.. 추워..”


춥다. 그리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

바람이 칼같이 불어와 몸을 할퀴는 거 같다.

다행히 내 몸은 무언가 두터운 것에 감싸여 있어 추위를 버틸 수 있었다.

이건? 솜 이불? 근데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밤인가?


찰박.

“응?? 바닥에 뭐가? 물? 으히익!”


주변에 불빛 한 점 없어 구분하긴 힘들었지만 윤곽은 보였다.

내 주위로 촘촘한 쇠창살이 가득했고 난 작은 공간 안에 플라스틱 의자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발목이 물에 잠겨 찰박거리고 있다.

다시금 공포가 올라온다.

죽는다. 빠져 죽는다. 다시... 또 어두운 곳에 끌려.....


“으힉...으....허억,,,,커헉,,,,”


숨이 안 쉬어지고 머리가 어지럽다, 손,발에 힘이 풀리며 여며있던 이불이 흘러내려 다 젖을 판이었다.


“사.,..살려줘... 사람 살려!”

“네 이름은 이진우, 공수증이 있어. 그리고 넌 살려고 자원해서 철창에 들어왔지.”


내 비명에 대답은 바로 옆에서 들려 왔다.

나와 같은 철창에 사람이 앉아 있다. 벌벌 떠는 여성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여온다.

누구?? 아.. 나랑 자진해서 들어왔던 사람 중 한 명.

최미래였던가?


“내 이름은 최미래. 너와 같이 백귀에게 손이 물려서 들어왔어. 그래서 ‘담겨’지는걸 택했지.

이제 기억나지? 다음엔 니 차례야.”


잠에서 깨고 서서히 기억이 돌아온다. 추위에 겨우 눈을 붙였는데 자다가 깨서 눈 떠보니 강 수면에 띄워놓은 철창 안이라면 누구라도 정신을 못 차렸을 거다.

이제 이틀째인가? 하루 남았다. 정화 작업은 3일 동안 지켜본다고 했으니까.

그래 난 여기에 자발적으로 들어왔다. 살아서 나오겠다고.


삼일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날이 추웠지만 그래도 겨울이 지난 봄의 시작이었으니까.

강 표면을 따라 불어오는 찬 바람만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깨달았다.

열 명 중 하나가 살아서 나온다고? 하루 만에 한밤중에 철창 붙잡고 울부짖었다.

제발 꺼내달라고.


“정신 차렸지? 다음에 내가 정신 줄 놓으면 너도 날 도와야 해.”


무슨 말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머리까지 얼어붙었는지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서로 돕는다? 아 그래. 생각난다. 여기 들어와 강 표면까지 내려지자마자 누나가 내게 했던 말들이.


‘여기서 살아 나간 사람을 알아. 이건 고문이 아니야. 오히려 살라고 기회를 주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살려면 뭐든 붙잡아야 해. 우린 서로를 붙잡아 줄 수 있어’


잠기지 않은 철창에 들어와 다리 아래에 매달려 침식을 씻어낸다.

물린 부위에서 올라오는 정신 공격을 스스로 버텨서 정화하는 이 작업은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이틀 전 세 개의 철창이 드리워졌고 그중 하나는 강바닥에 처박혔다.

청소 중 손을 물린 남자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눈이 붉어진 채 수장됐다.

누구도 도울 수 없는 내부의 정신력 줄다리기였지만 같이 내려온 미래 누나가 제안했다.


‘서로 정신이 나갈 거 같으면 깨워주자. 그 남자도 이렇게 버틸 수 있었다고 했어. 효과가 있었다고.’


추위에 떨며 간신히 잠들었다가 깨어나자마자 정신 놓을 뻔했다.

내겐 동기화가 있어 물린 것 쯤이야 버틸 수 있었지만 공수증이 발목을 잡았다.

달빛조차 가려진 다리 아래 청계천 수면은 마치 심연 같아서 내 오랜 공포를 수시로 일깨워 주었다. 그러니 오랜만에 꾸기 싫은 꿈까지 꾸었지.

응? 꿈? 무슨 꿈이었지?


“너 정말 토템 같은 거 없어? 가족 사진이나 아니면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 말이야. 정신을 붙들어 놓는데 도움되는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어.”

“....가족 사진이라.. 내 몸땡이보다 큰 걸 어떻게 가져 다녀요. 없어요. 그런 거. ”


우리 집 거실에 걸린 화려하고 웅장한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방패로 써도 되겠네.

미래 누나의 손엔 붉은 목도리가 꼭 쥐어져 있었다.

할머니가 직접 짜주신 추억이 깃든 물품이라고.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정신이상을 초래하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대책을 만들었다.

술을 마신다던가 약을 만들어 먹는다던가 그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며 부작용이 없는 방식이 개인 토템을 만드는 거다.

유명한 영화에서 나온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상징적 물건.


“토템이라... 집 이사한지 얼마 안 돼서 남은 게 없을 텐데...”


그렇게 화목했던 가정도 아니었고.. 정신을 지탱해 줄 물건이라...


[몇 신데. 일어나서 지랄이냐.]


찾을 필요가 없었네.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나의 토템이 말을 걸어온다.


[잠 좀 자자. 잠이 안 오면 입 닥치고 명상이라도 해라. 침식까지 감당해 가며 나 내일 출근해야 한다. 응? 좀 부탁한다. 살려주라.]

“...죄.. 죄송.”


태창이 형은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절절하게 부탁해 왔다.

미약하게 물렸던 오른손엔 감각이 없었다.

오른손만을 통째로 동기화를 높여 주도권을 넘겼고 침식했던 부위를 다른 세상의 태창이 형에게 넘겨 형이 감당하고 있었다.


백귀에게 물리면 생사를 건 도박을 해야 한다.

물린 부위와 정도에 따라 생존율이 널뛰기를 하지만 우리가 가진 동기화라는 능력, 너무 사기다.


옆에서 침식과 싸우는 미래 누나는 나와 비슷하게 물린 정도였다.

옷 위에 물려 상태가 양호한 우리 둘을 보고 경비대는 살 확률이 높다며 격려해 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틀 동안 누나는 몇 번이고 발작하며 차가운 강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살의 색이 변할 정도로 차가운 강물에 손을 넣은 누나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었다.


나? 나는 뭐 침식은 태창이 형이 대신 감당해 줘서 견뎌야 할 건 추위와 물에 대한 공포심

뿐이었다. 그저 자다 일어나서 발 밑에 물을 보고 기겁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내 고통을 대신 짊어지는 형에게 미안해서 물었지만 형의 대답은 걱정 말라고 했다.

태창이 형은 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환경 조건이 비교할 수 없이 좋다고 한다.

안개가 자욱한 야밤에 강변 위를 철창 안에 들어간 채 버티는 미래 누나와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서 내키면 공원으로 걸어가 햇살 아래에서 올라오는 광증을 버티는 건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그래도 평범하게 사회생활 하는 건 어렵다. 언제든 긴장을 놓으면 사고 치는 건 순간이니까.

그럼에도 난 자발적으로 여기 들어왔다.

전투의 뒷정리가 끝나고 모든 인원들이 서로를 검사하기 시작했었다.

내가 물린 부위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내겐 동기화라는 사기능력이 있었고.

숨기고 모른척하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고 실제로 날 검사하던 경비병도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넘어가시죠. 어차피 얘 변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위험해지는데 같은 팀인 우리가 책임 질게요.’


의외로 나와 눈이 여러 번 마주쳤던 상철이 형이 날 두둔하고 나섰다.

그 왜 있지 않은가. 주인공과 불화가 일어난 등장인물이 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모함하고 막 하는 거. 그래서 상철이 형이 물린 걸 봤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같은 팀이 죽으면 점수를 잃는다. 하지만 이 경우엔 그럴 이유가 없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인 부주의로 재수 없게 물린 거니까. 버려도 상관없었는데.

그럼에도 의리있게 팀원인 나를 감싸주는 걸 보고 살짝 감동했었다.


[재밌는 새끼네.]


태창이 형의 평가를 듣기 전까진.

의리 있는, 또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이런 표현이 아니라 애매한 재밌는 새끼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태창이 형은 사람들과 합류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에 대한 평가나 생각을 잘 말해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우리의 장점을 잃고 싶지 않다면서.


우린 둘이면서 하나다. 같은 ‘이진우’이지만 완전히 같진 않다. 그렇다면 같은 시선 같은 상황을 바라봐도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걸 태창이 형이 설명하고 판단한다면 내 주체성은 사라지고 게임 케릭터 같이 시키는 데로 움직이는 아바타만 남게 될 거라며 형은 자신의 생각을 쉽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 결정과 내 판단으로 여기 들어왔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검문소 사람들에게 나의 안전성을 증명한다.

숨김없이 위기를 받아들이고 극복해서 증명한다면 신뢰도를 쌓을 수 있겠지.


그리고 남은 하나는 태창이 형 때문이다.

침식을 감당하면서 동기화까지 끌어올려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저 형도 휴먼이다. 휴식이 필요하고 한계가 있는 휴먼.

그렇기에 3일간 오히려 안전이 확보된 이 철창 안에서 침식을 이겨내는 게 우리에겐 더 좋은 조건이다. 라고 믿고 싶다.


“이게 잘한 결정이었을까요?”

[정하고 후회하지 마. 그냥 감당하는 거다.]

“더 나은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근데 나도 이진우라 그런가? 이 선택이 마음에 든다.]

“헤.. 처음으로 칭찬 들은 거 같네.”

[쪼개기는. 아직도 물 보면 질질 짜는 새끼가.]

“아니 형도 이랬다면서 나도 시간만 지나면 극복할 수 있음. 존나 치사하네.”

[존나 어처구니 없게 얼어 죽지나 마라. 이불 싸매고 버텨.]


10년 후의 나는 언제나처럼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10년 전인 나에게서 가져간 광증이 올라오는 오른손을 품고.


“아악! 할머니! 가지마! 제발! 미안해!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집에 못 갔어!

집에 가면 할머니가 내게 뛰어 올까봐... 붉은 눈으로 나타날까봐...”

“.....”


어느새 잠들었던 미래 누님이 발작을 시작했다.

이번엔 내 차례인가 보다 난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자상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당신 이름은 최미래에요. 할머니와의 마지막 통화를 기억해 보세요.”

“..... 도움은 고마운데. 그 재수 없는 말투로 하지 말아줄래?”

“히히.. 살았으면 됐죠 뭐.”

“...그래. 살았으면 됐지. 우린 살 거야.”


누나의 말대로 우린 3일 후 무사히 철창을 나올 수 있었다.

새치 아저씨가 아침 일찍 마중 나와줬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예.”

“너에 대해... 대충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상관없어요.”


정확한 사실도 아니고 뭐. 누가 다른 세상과 연결된 능력이라고 예상하겠어?

그냥 다중인격에 미친 놈이라 생각하지.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해서인지 사람들과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외부 임무 나갔다 온 1 대장이 벌집에 복귀했어. 그녀가 내일 검문소 임무로 2 대장이랑 교대한단다.”

“....”


가까워진 건 나뿐인가 보다.

제 1 경비대장. 정지영. 내가 쫒기듯 벌집에서 도망쳐 나온 날. 가장 앞장서서 원칙과 규칙대로 벌집에 피해를 준 내 팔이라도 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여기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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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둥지에서의 하룻밤 24.08.29 3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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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능력과 경험치 24.08.26 37 2 14쪽
16 출항과 옆집 늑대들 24.08.25 35 2 13쪽
15 어른의 사정 +2 24.08.23 44 2 12쪽
14 바뀐 대가리 +1 24.08.22 40 2 12쪽
» 철창 속 정화 24.08.20 41 2 12쪽
12 정리와 침식 24.08.19 46 2 12쪽
11 야간 전투 24.08.18 46 2 13쪽
10 마석 24.08.16 46 1 13쪽
9 첫 번째 임무 24.08.16 54 2 12쪽
8 합류 24.08.13 57 3 12쪽
7 다중이 24.08.12 60 3 12쪽
6 검문소 24.08.10 64 2 13쪽
5 우리 집 24.08.09 71 2 14쪽
4 안전 귀가 24.08.06 85 3 12쪽
3 동기화 24.08.05 104 6 13쪽
2 튜토리얼의 끝 24.08.04 130 5 12쪽
1 삼위일체 24.08.04 180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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