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이드(Dec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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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미소
작품등록일 :
2024.08.04 21:47
최근연재일 :
2024.09.0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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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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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DUMMY

2024년 8월 초. 마포구 하늘 공원, 새벽 1시.


한여름의 밤이었다. 덥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가득 내려앉은 공원 안.

잠 못 이루는 시민들이 저마다의 고민과 함께 늦은 밤 공원 안을 거닐고 있었다.

가로등과 LED 전광판으로 물든 조용하고 은은한 풍경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선다.


늘어진 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양손은 물론 등에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는

산발이 된 머리가 땀으로 젖어 노숙자로 오해받을 만한 몰골이었다.


풍화되어 녹이 슨 운동기구를 이용하는 노부부, 풀숲을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 끝없는 아이의 조잘거리는 질문에 답하는 아버지,

공원에 들어선 남자는 이러한 일상적인 풍경과 어울리지 못했다.


“훅...훅... 공원 북서쪽 입구에서 동남 방향... 아냐 내 위치 말한거야.”


그는 평범하게 지명이나 장소로 위치를 가늠하지 않았다.

그는 방위와 지형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하루 종일 서울 시내를 뛰어다닌 그의 체력은 한계에 다 달았고 후덥지근한 밤공기마저 남자의 호흡을 방해하는거 같았다.


-속보입니다. 방금 전 서울 시내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두 명은 위중한....범인은... 아직...


운동기구를 이용하던 노인의 허리춤에 달린 라디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숨을 고르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노인은 흠칫하며 부인의 손을 잡아끌고 서둘러 멀어져 갔다.


“.... 살짝 억울한데.”


자신이 봐도 이 공원 안에서 용의자란 말에 가장 어울리긴 했다.

늘어나는 이유 모를 중범죄가 오늘 밤에도 역시 바쁘기만 하다.

혹자는 생계가 어려워 생기는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다른 이유가 더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벗어나던 그는 문득 가건물로 세워진 매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과 마주쳤다.

추레한 몰골과 긴장으로 굳어버린 턱, 한쪽 눈을 감은 거울 속 그는 잠시라도 긴장을 풀어버린다면 다음 보도되는 뉴스의 주인공은 자신의 차례라고 확신했다.


“이진우의 꼴이 말이 아니네. 저쪽도 그리고 나도.”


거울 속 노숙자가 그의 말에 동의하듯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조금씩 변질시키는 현상이 그의 감은 한쪽 눈에 흐릿하게 펼쳐 보여졌다.

그는 잠시 정신을 집중하고 양쪽 눈을 다 감았다.


두 눈을 모두 감자 검었던 시야에 명암이 생기며 뿌옇게 일렁거린다.

저화질의 동영상처럼 서서히 상이 생기고 초점이 잡히면서 점차 시야가 선명해져 간다.

시야가 뚜렷해질수록 초조함과 두려움 같은 감정이 흘러들어오며 그가 있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이쪽이 새벽 1시이니 저쪽 세상 또한 같은 시간대이긴 했으나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다른 세상의 하늘 공원은 어두웠다.

안개에 휩싸인 음산한 갈대밭을 미약한 달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그가 공유하는 시선의 주인은 미친 듯이 갈대를 쳐내며 달리고 있었고 그가 있는 공원과는 다르게 새하얀 입김과 비슷한 것이 언뜻언뜻 시야에 잡히며 사라져갔다.

간간이 돌아보는 시야의 뒤편으로 멀리서 갈대들이 쓰러지는 게 보였다.

위아래로 극심하게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언뜻 비쳐 보인듯하다. 창백하고 소름끼치는 회색의 피부를 가진 무언가 갈대 속에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시야의 주인인 소년은 달리는데 집중력이 흐트러져서인지 시야에 잡혔지만 인식하지 못한 듯 일자로 내달리기만 했다.


“네 뒤에 백귀다! 왼쪽으로 꺾어서 따돌려라! 네가 달리는 왼편이 강이 있는 방향이야!”


지난 두 달 동안 지겹게 봐와서인지 눈을 감고 집중하는 그는 멀미를 유발하는 1인칭 시점에도 냉정함을 유지했다.


‘초고해상도 VR 게임을 하는 느낌이 이럴까?’


먹고 사는 게 바빠 VR게임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아마 지금 그가 겪는 경험과 크게 다를거 같지는 않았다.

차이점은 전자는 플레이어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했지만 자신이 감은 두 눈에 공유되는 시야는 그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정도.


처음에는 이런 1인칭 시야에 몇 분 버티지 못하고 멀미 때문에 고생했었다.

관찰자의 배려 따윈 개나 줘버린 급박한 달리기 중 그의 머릿속으로 음성이 들려온다.


[헉....헉... 강 근처라서 더 이상 안쫓아 오나 본데? 형 보고 있어요?]

“그래. 지금 나도 공원에 도착했다. 지랄 맞게 긴 하루의 끝을 보자.”


앳된 목소리. 시선의 주인공은 변성기가 이제 막 온 소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답한 그의 목소리와 상당히 비슷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정신 없이 도망쳐서. 어디로 가요?]

“아 잠깐만. 그래. 거기 운동기구 내가 방금 지나왔던 곳이다. 산책로 따라서 좀 더 뛰어.”


감은 눈에 펼쳐진 다른 세상에서 방금 전에 노부부가 이용하던 운동기구가 눈에 띄었다.

아니 조금 달랐다. 노부부가 이용하던 낡고 녹슨 것이 아닌 페인트칠도 벗겨지지 않았고 나무의 재질 또한 세월의 풍파를 겪지 않은 듯 반질반질하다.

마치 10년 전의 새것처럼.


잠시 감상에 빠져있던 그는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다.

공유하는 시야의 주인인 소년은 곧 있으면 그가 있는 현실의 장소와 같은 곳에 도착한다.

준비가 필요했다.


탁 탁 탁.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양쪽 세계를 연결하던 중 다가오는 발소리에 긴장해 있던 그는 터져나가듯 돌아서며 허리춤에 걸려있던 야접삽을 들어 올렸다.


“꺄아아아!!”


뒤돌아선 그의 뜨여진 눈에 보인 것은 트레이닝 차림의 젊은 여성이 주저앉은 장면이었다.

순간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다른 세상인지 헷갈리던 그는 조심스레 삽에서 손을 떼었다.


“죄송합니다. 순간 놀래서.”


놀람과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따지려던 여자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두말없이 되돌아 달려갔다. 마치 도망치는 그녀의 뒷모습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형! 방향이 어디라고요? 죄다 갈대밭이라 헷갈려요!]

“...닥쳐봐. 나 방금 뉴스 나올 뻔했어.”


방안에서 조용히 누워서 연결하는 것도 힘든데 야외 활동까지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놓아버리면 사고치겠다란 생각에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진짜로 사람을 향해 삽을 내려 찍을려고 했었다.

하지만 오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저쪽의 소년에게도 그에게도 필요한 일이다.


“목격자가 생겼다. 어쩌면 그 여자가 신고할 수도 있겠어. 사람들 오기 전에 끝내야 해. 시간이 없다.”

[목격자?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어요? ]

“시발놈이... 하... 내가 봐도 수상한 말이네. 됐고. 오다 보면 매점 하나 나올 거야 보이면 오른쪽으로 틀어.”

[확인.]


그는 한쪽 눈만을 감은 채 양쪽 세상을 비교하며 갈대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리 봐둔 위치다. 적당한 공터가 갈대로 인해 외부의 시선이 가려져 있다.

잠시 기다리자 다른 세상의 소년이 자신과 같은 공터에 도착했다.


끌고 왔던 여행용 케리어를 조심히 세워두고 매고 있던 가방을 풀어 도구들을 꺼내었다.

방수포, 줄자, 휘발유 한 통, 뜰채, 고무장갑, 그리고 생수 한 병.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낸 결과물로 입가의 작은 만족이 걸린다.


“공터 중앙에 바위 보여? 아니 좀 더 오른쪽 그래. 그거. 거기가 시작 점이다. 거기에 삽을 꽃아.”


저쪽 세상의 소년과 그가 있는 위치는 정확하게 같은 자리였다.

다른 두 세상에 같은 위도와 같은 경도의 공간.

지금부터가 중요한 부분이다. 정확하게 거의 완벽에 가깝게 같은 구덩이를 파야 한다.

두 눈을 감고 몰입한다.

지금보다 높이가 낮은 다른 시야에 집중한다. 숨소리가 가까워지고 여름 뜨거운 밤공기가

멀어져간다. 서늘함이 몰려오며 피부를 타고 끈적한 악의가 느껴진다.


동기화. 소년은 퓨전 또는 합체 또는 신검 합일. 제멋대로 부르는 현상.

그의 뜻에 따라 그가 움직이는 대로 소년의 손 또한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완벽하게 같은 움직임은 아니지만 이것도 소년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온전한 느낌. 되돌아온 충만감을 애써 밀어내며 양쪽 세상에 똑같은 구덩이를 파는데 집중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끌고 온 여행용 케리어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로 잡고 주먹 하나 들어갈 만한 깊이로 파내었다.

눈을 뜨자 다른 세상의 소년이 파 놓은 구덩이와 정확히 같은 구덩이가 앞에 놓여있다.


“됐다. 자로 정확하게 재봐. 1mm까지 확실히.”

[알았어요. 가로 45.6 세로 26.4]


평소 갑옷처럼 두르던 장난기마저 걷어낸 대답이 들려온다.

소년도 이번 일이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기에 진지하게 임한다.


“이쪽도 같다. 이제 생수 1L 부어. 괜찮아 새끼야. 그냥 물 한병이잖아.”


틀은 만들어 졌다. 이제는 ‘문’을 만들 차례다.

들고 온 생수통을 향하는 그의 손길에도 잠시 망설임이 있었으나 단호하게 구덩이에 쏟았다.

소년도 같은 양의 물을 부어 넣고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낸다.

둘 다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고 피를 내어 물웅덩이에 흘려 넣었다.

문이 완성됐다.


[던질까요?]


감은 한쪽 눈의 시야에 어느새 꺼내어진 작은 철제 상자가 소년의 손에 들려있었다.

상자 안에는 고체 같으면서도 표면이 끊임없이 일렁거려 액체 같기도 한 검은색 돌이 담겨있다.


“던져. 양쪽 문을 잇는다.”


소년이 던진 돌이 만들어 둔 물웅덩이에 빠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가 없자 그의 입에서 실망감이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실패인가.. 응? 됐다!”


변화는 남자가 파둔 웅덩이에서 일어났다.

물안개처럼 회색 안개가 수면 위로 피어오른다.


“이런 시발. 좆 같은 안개 넘어온다. 빨리!”


다급히 케리어를 들어 물웅덩이를 타고 넘어오는 안개를 도로 돌려보내듯이 구덩이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성인 몸통만한 케리어가 발목도 잠기지 않을 물구덩이 속으로 전부 빨려 들어갔다.


감은 쪽 눈의 시야에서 작은 손이 다급하게 그가 보낸 케리어를 끌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사전에 계획해 둔 대로 케리어를 열고 안에 짐을 모두 빼낸 후 자신이 들고 온 배낭에서 물건들을 꺼내어 케리어에 담기 시작했다.


만원권 지폐 다발, 오만원권 뭉치, 금목걸이, 금반지.

종말이 도래한 소년의 세상에선 휴지 조각이나 마찬가지인 물품들이 케리어에 담겼다.

반의 반도 채우지 못했지만 흥분에 손이 떨려 금품들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침착해. 잘하고 있어. 확실히 밀봉해. 통로에서 침식되면 건드리지도 못한다.”

[이런 시발! 도대체 왜 안쪽까지 랩으로 칭칭 감아놓은 거야!]

“병신아! 칼로 뜯어!”

[으아아아! 칼이 어디 있더라!]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자 움츠렸던 장난기가 돌아오는지 둘의 목소리가 커졌다.

서로의 입이 거칠어졌지만 반대로 기분은 좋았다.

오랫동안 겪은 고생의 보상이 뒤늦게라도 찾아왔으니까.


종말의 세상을 살아가는 소년에겐 필요한 물품을.

자본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에겐 필요한 자금을.

서로 필요한 걸 충족시킬 방법을 마침내 찾아내었다.


“아 뉴스에 나오는 그놈은 벌써 잡혔다니까. 아가씨.”

“진짜라구요! 어떤 미친놈이 삽을 휘두르려 했다니까요!”


멀리서 고음의 언성이 들려온다.


“너도 나도 둘 다 빨리 튀자.”


회색 안개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물웅덩이에 삐져나온 케리어를 끌어올리는 그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작가의말

예전에 썼던건데 다시 쓰려고 해봅니다.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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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출항과 옆집 늑대들 24.08.25 35 2 13쪽
15 어른의 사정 +2 24.08.23 43 2 12쪽
14 바뀐 대가리 +1 24.08.22 39 2 12쪽
13 철창 속 정화 24.08.20 40 2 12쪽
12 정리와 침식 24.08.19 45 2 12쪽
11 야간 전투 24.08.18 45 2 13쪽
10 마석 24.08.16 46 1 13쪽
9 첫 번째 임무 24.08.16 54 2 12쪽
8 합류 24.08.13 56 3 12쪽
7 다중이 24.08.12 59 3 12쪽
6 검문소 24.08.10 63 2 13쪽
5 우리 집 24.08.09 71 2 14쪽
4 안전 귀가 24.08.06 85 3 12쪽
3 동기화 24.08.05 104 6 13쪽
2 튜토리얼의 끝 24.08.04 129 5 12쪽
» 삼위일체 24.08.04 180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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