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의 남부 경비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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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탈
작품등록일 :
2024.08.0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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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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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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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2)

DUMMY

키에엑! 괴물들은 지축이 울릴 정도로 크게 포효했다. 불협화음이 수천번이나 중첩되자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난 횃불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내 모습을 놈들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일렁이는 횃불의 불꽃 너머에 놈들의 격노한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길길이 날뛰며 포효하더니 모든 적의를 내게 쏟아부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말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따라와라.”


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들은 끔찍한 불협화음을 내지른다. 

난 그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 말을 달렸고, 뒤에선 그들의 허기진 발걸음이 지진이라도 난듯이 땅을 구르고 있었다.


허기가 나를 향한 적의가 되어 쏟아진다. 말발굽이 가도를 밟는 다그닥 소리는 놈들의 괴성과 발구름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잠깐 고개를 들려 놈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내 손에 쥐어진 횃불을 어디로 돌려봐도 놈들뿐이었다.


하나도 빠짐 없이 나를 향해 돌진할 뿐이다. 놈들의 수는 수천을 넘었고, 나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여기 남은 피식자의 수는 그 거대한 수의 포식자를 배불리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않고 오로지 눈 앞의 먹잇감을 향해 달렸다.


대륙의 어느 생물이든 이런 상황에 빠진 적이 있을까. 그들의 행진은 수백의 개미떼가 공통된 의지 로 움직이는 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크기는 사람과 비슷하다는 것이고, 수효 역시 일만에 달한다는 것이다.


가도는 수천을 넘는 그들의 숫자를 감당하기엔 너무나 좁았다. 그들은 가도는 물론이고 부서진 건물과 담벼락, 수풀과 바위, 땅과 그 땅에 담긴 모든 추억을 짓밟고 짓뭉개며 질주했다.


그들의 발바닥과 손바닥엔 당연하게도 돌과 나무 조각 따위가 잔뜩 박혔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숫자 탓에 서로 밟히고 엉키어 팔다리가 꺾인 것들도 있었고, 아예 사지가 떨어져버린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흉한 붉은 안광은 멈추지 않고 먹이를 찾는다. 그 먹잇감은 필시 수천의 괴물들 앞에서 횃불을 흔들며 말을 달리는 나였다.


파도. 그래, 이것은 파도다. 피와 붉은 안광, 그 핏빛 포말을 쏟아내며 모든 지형을 덮어버리는 파도.


놈들의 색채는 분명한 죽음의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죽음은 살아 움직이며 날 죽이려하고 있었다.


“······”


잠깐 돌아본 그들의 표정엔, 미약한 횃불의 불빛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감정이 가득했다. 분노, 허기, 갈망, 그 모든 것을 끌어모아 토해내듯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그게 네놈들의 패인이다. 제 허기짐에 목이 묶여 행동의 다양성 따윈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슬슬 와야지.”


달리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매섭게 할퀸다. 그리고 내 시야에 하나 둘 불빛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대장!”


잭이 어느새 나타나 횃불을 들고 내 옆에서 달리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하나 둘씩 횃불을 들고 나타나 말을 달리고 있었다.

잭은 특히나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이게 말이 되는 거요! 너무 많잖아!”


잭은 마치 전재산을 사기당한 것 같이 억울하게 소리쳤지만 그마저도 수천의 괴성과 발구름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직접 눈으로 봐놓고 왜 그러지!”

“가까이 오니까 말이 안돼서 이러는 거요!”


일만이라는 수는 멀리서 보아도 지평선의 한켠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수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일만은 차원이 다른 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에 일어나는 흙먼지는 하늘에 닿을만큼 치솟고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공명되어 천둥처럼 울려퍼지고 있었다.


잭은 괴물들만큼이나 분노하며 소리쳤다.


“이대로 계속 달려야하는 거잖수!”

“그래!”

“대체 작전 누가 짠 거요!”

“나!”


잔해가 흩날린다. 밤하늘 아래를 질주하는 말들은 어둠에게 쫓기고 있었다.


죽음의 빛깔은 붉은 눈을 부릅뜨고서 사방을 가득 메우며 달려왔다.


내 주위엔 수 개의 횃불이 모여있었다. 성문으로부터는 충분히 멀어졌고, 이젠 계획을 천천히 실행할 차례였다.


“흩어져라!”


내 외침에 대원들의 말이 점차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잭은 또다시 멀어지며 소리쳤다.


“대장!”

“왜!”

“이 뒤에가 더 무식한 걸로 기억하는데, 대장 정말 할 수 있는 거요?”

“그래!”

“믿겠수! 대장 존나 세니까!”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흩어지는 대원들에게 외쳤다.


“죽지 마라!”

“““옙!”””


각각의 횃불이 다시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일만의 괴물이 전부 좁은 성문으로, 혹은 성벽을 넘어 들어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전까진 괴물들을 유인하며 수를 어느정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횃불들이 흩어지자 괴물들은 자연스레 끌리는 먹잇감을 향해 흩어진다.


그러나 그 수는 여전히 천 단위이다. 나를 쫓아오는 놈들은


낙마하면 죽는다. 순간 길을 헷갈려도 죽는다. 망설이면 죽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과 나의 간격은 가까웠고, 그들은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나와의 간격에 매몰되어 끝없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말은 괴물보다 빠르다.


“가자.”


말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전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순간 얼굴을 바람이 할퀴고 지나갈 정도로 급가속한 말은 순식간에 괴물들의 펼쳐진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그들의 붉은 안광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간격을 더 벌린다.


괴물들은 멀어지는 날 바라보며 분노에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날 추격했다.


어느새 내 말은 마을의 고지대인 광장에 올라섰고, 난 줄곧 보초를 서던 성문을 굽어봤다.


“그래, 믿고 있었다.”


처음 괴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 영지의 동쪽 성문. 그곳에 횃불 두개가 신호로 걸려있었다.


그것은 일만의 괴물이 빠짐없이 영지에 들어왔기에 성문을 닫았다는 신호였다.


모든 좀비를 이 영지 안에 들이고 동문마저 닫았다면, 드디어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난 말에서 내렸다. 말은 푸르릉거리며 내 곁에 있었다.


잠시 멀어졌던 괴물들의 발소리는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난 광장에 서서, 이곳을 향해 몰려오는 괴물들을 내려다봤다.


“그래. 빨리 와라.”


난 이제 검을 뽑아들었다. 수천의 괴물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고, 광장의 중앙에서 난 홀로 검을 들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늘씬한 검신을 치켜들어 이마를 기대었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괴물들이 몰려오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난 눈을 감고 내 심장 박동에 집중했다.


괴물들의 괴성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난 명상하듯 내 심장 박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커져가는 심장박동, 조용해져가는 세계. 그 속에서 난 괜히 떠오르는 옛 생각에 중얼거렸다.


“한카르 경. 참 잘 가르치셨습니다.”


소드마스터라고 불리우는 한카르는 날 아꼈다. 아마 재능을 보고 아꼈던 거겠지.


그래서 그는 내 재능을 개화시킨답시고 소년이었던 날 전선에 내밀었고, 언젠간 오크 무리 앞에 던져둔 적도 있었다.


「앞엔 수십의 오크가 있고, 네 뒤엔 수백의 민간인이 있다. 맞서싸울 건가?」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수십이 아니라 수백 수천에 달하는 좀비였지만, 그 상황 속에서 홀로 서있는 것은 똑같았다.


「두렵겠지. 네가 진다면 너는 물론이고 등 뒤의 사람들마저 죄다 죽을 테니까.

그래, 그거다. 공포를 느껴라. 너와 네 주위의 모든 인간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그리고 발버둥쳐라! 살아남으려는 의지야말로 마법사놈들이 계산해낼 수 없는 인간의 의지니까.

그 의지가 바로 기사의 힘이다!」


“······아주 잘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였다. 시도때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대륙 어느곳에서나 절망이 가득하던 아주 오래 전.


그 끝없는 고난을 겪으며 자연스레 생겨난 기사의 힘이, 이 시대에 다다라 사라져간다고 혀를 차던 노인네였다. 


「전쟁은 그래봐야 한 두번 벌어지고 마는, 인구수가 늘어만 가는 평화로운 시대다.

흡혈귀니 오크니 떠들어대도 내가 살아온 시대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이지.

용의 분노가 하늘을 나누고 거인이 땅을 가르던 시대에 비하면 말이야.


고난과 전쟁 속에서 깎이고 날카로워지는 기사의 검, 오러라는 힘은 사라지고 있는 거다.


그래, 기사의 시대는 저물어간다!

마법사놈들은 사라져가는 기사의 힘을 분석하고 되살려 양산해내려고 하지. 

하지만 놈들은 틀렸다. 인간의 의지란 그리 쉽게 계산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진정 기사가 되겠다면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져라.

그렇다면 네겐 마탑에서 따라하는 삼류 오러 따위가 아닌, 네 뒤의 사람들을 지켜낼 오러가 주어질테니까.

너에겐 그럴 재능이 있다. 은휼, 넌 기사가 될 수 있다! 내 이백년의 세월을 걸고 보증하지.」


“참 개같은 시대가 돌아왔습니다.”


난 검을 쥐었고, 내 심장박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심장은 고동치며 내 몸이 받아들이는 마나를 또다시 전신에 흘려보낸다.


한없이 고요해진 세상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심장의 고동과 내 손아귀에 쥐어진 검자루의 감각이었다.


한카르가 말한 용과 거인이 날뛰던 시대는 역사서로만 경험해 잘 모르지만, 지금은 확실히 그때와 비견되지 않을까.


난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여기서 이 괴물들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내 시체를 넘어, 이곳을 피난해 떠나간 인간들에게 다다를 것이 분명했다.


무너진 제국의 시체 위에 괴물들은 인간의 시체를 쌓아올릴 것이고, 인류가 쌓아온 위업은 무로 돌아가리라.


그런 멸망에 비하면 난 미약하고 나약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이 영지에서 많은 것을 받았기에 더없이 발버둥치고 싶었다.


설령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시대가 멸망해가고 인류가 멸종되는 흐름을 막을 수 없더라도, 끝없이 발버둥칠 생각이다.


난 경비대장이니까. 최소한 이 영지의 영지민들만큼은 지켜야하는 사람이니까.


눈을 감은 내겐 이 영지의 옛 모습이 보이는듯 했다. 대원들의 욕지거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술취한 주정뱅이와 화난 부녀자의 외침이 가득했던 영지가.


난 또다시 추억 속을 날고 있었고, 돌아갈 수 없을 추억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각오를 다졌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땐, 짓밟힌 영지와 처죽일 적, 그리고 내 검이 보였다.


“······아주 잘 가르치셨습니다. 한카르 경.”


그리고 내 검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밤하늘. 가려진 달빛이 밤하늘 아래 하나의 검신에 깃들었다.


내 심장은 폭발하듯이 뛰고 있었다. 다시 시끄러워진 세상 속에서도 선명히 들릴만큼 고동치며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마나를 전부 검을 향해 쏟아붓고 있었다.


이것이 지금의 내 마나하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오러의 극한이겠지. 아직 미약한 경지지만, 지금으로선 충분하다.


키에엑! 갑자기 치솟은 하얀 오러에 그들은 더욱 발광하며 광장을 향해 돌진해왔다.


그들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풍경에 변화가 없다고 생각되리만큼 빽빽하게 영지를 메우고 있었다.


방향감각에 혼란이 생길 정도의 단조로움. 그러나 내겐 놓치지 않을 검이 있었고, 하얗게 빛나는 백색의 검신이 있었다.


난 나직이 물음을 던졌다.


“이제 움직일 수 있나?”


꺄르륵!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불어오는 바람은 검신을 붙잡은 내 손등과 검을 어루만졌다.


영주가 이 정령에 대해 내게 전한 말이 있었다.


- 은휼. 정령은 정령사의 명령을 받고, 정령사가 공급하는 마나를 받아 움직인다. 그러나 앞으로 실행될 최종 작전에 난 그 자리에 없을테지.


영주의 정령은 이 작전의 중요한 요소였다.


- 내가 명령을 내려둘 수는 있다. 허나, 마력을 공급할 수는 없어. 거리가 멀어지면 마력 공급이 불가능하니까.


그는 날 가리키며, 이 작전의 핵심을 맡으라 말했다.


- 그러니 네가 대신해라. 오러란 세계의 마나를 응집시키는 힘. 정령이 네 오러를 받아들여 움직일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가 덧붙인 말이 하나 있었다.


- 물론, 네 오러가 내 마나에 필적한다면 말이지. 기사의 오러로 계산한다면 최소한 3써클 기사만큼의 출력이 필요하다. 너 같은 1써클의 기사에겐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난 가능하다고 답했었다.


- ······하지만, 네가 해낼 수 있다고 했으니 믿어보겠다. 넌 1써클이더라도 순혈 기사이자 최고의 유망주였다고 들었으니까. 내 믿음을 배신하지 말도록.


그리고 난 해냈다. 하얀 오러는 검신에서 빛나며 바람의 정령에게 마나를 공급하고 있었다.


영주가 봤으면 눈을 휘둥그레 떴겠군. 난 나직이 물었다.


“충분한가?”


바람은 그렇다고 대답이라도 하는듯이 부드럽게 내 손등을 쓸었다.


물론 난 그 정령의 형체를 보지 못했다. 바람의 정령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미약한 형체만 어렴풋이 짐작 가능한······


꺄르륵!


“······실프?”


꺄르륵! 난 바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바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은 바람이 되어 내 얼굴 앞에 분명히 날고 있었다.


난 정령의 형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오러인가.”


내 검신에 피어나는 오러의 일렁거림 건너편엔 정령이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오러와 정령의 마나.


평소라면 희미하게 존재만 인지할 수 있었던 정령. 난 장난스러운 바람의 정령과 순간 마나의 흐름으로 맞닿았다.


“실프.”


바람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작고 장난스러운 모습의 정령.


실프, 바람의 정령은 어쩐지 슬퍼보였다.


“너 역시 슬픈가?”


꺄르륵! 실프는 언제나처럼 웃었다. 그러나 난 바람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정령은 무정물이 아니다. 장난스러운 기질을 갖고 있고, 인간이 다루는 정령은 인간의 감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정령에겐 각자의 영토가 있다. 라티온엔 라티온의 정령이 있고, 칼하라엔 칼하라의 정령이 있듯이.


정령사는 어느 지역, 그 이면에 존재하는 정령계에서 살아가는 정령과 계약을 맺어 그것을 현실계에 소환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령사가 라티온을 떠나간 이상, 설령 그가 다시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더라도 그것은 내 앞에 있는 바람의 정령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정령은 더이상 현실계에 소환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 정령은, 지금까지 경험한 인간의 세상을 제 손으로 지워버려야했다.


“그런데도 날 도와줄 건가?”


꺄르륵! 실프는 언제나처럼 웃었다. 꺄르륵, 꺄르륵······ 점점 웃음이 잦아들었다.


난 바람이 천천히, 무언가 거대한 것을 시작하려는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크윽!”


바람의 정령이 내 오러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난 순간 기절해버릴 것만 같은 충격을 겨우 견뎌내고서, 검신에 오러를 집중했다.


최후의 정령이 명령을 이행한다.


후웅······ 주위의 공기가 불길하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공기는 다시금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또다시 추락한다. 그 순환 속에서 공기는 바람이 되어, 전 영지를 향해 퍼져나간다.


나의 검과 검을 붙잡은 손을 지나서, 일만의 괴물들의 몸을 지나, 우리가 밟아온 길 위를 활공하며, 웃음과 울음을 머릿속에 기록하던 우리의 터전을 통과해 우리를 수십년간 지켜온 성벽 아래에 다다른다.


그곳엔 불꽃이 있었다.


바람의 신호에 불꽃의 정령이 응답한다. 성벽 아래에 군데군데 설치해둔 목탑에 불씨가 싹튼다.


바람은 양분이 되어 불씨를 키워내고 결국 한없이 붉은 꽃이 피어나게 만든다.


정령의 불꽃.


화염의 정령은 그 자신이 불꽃이 되어 광원 하나 없던 밤하늘을 밝힌다.


목탑을 집어삼킬만큼 순식간에 거대해진 불꽃은 차차 옮겨붙는다.


무너뜨린 건물, 흩날리는 분진, 불꽃이 퍼질 수 있게 흩뿌려둔 장작과 기름 따위에. 


불꽃은 점점 커지며 모든 추억의 잔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 작전의 최종 목표는, 저 불길이 이 영지를 전부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저 모든 괴물들과 함께 말이다.


화르륵! 하늘에 닿을만큼 치솟는 불길에 괴물들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내게 일제히 달려오던 괴물들이 동시에 돌진을 멈추고 혼란스럽게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는 것은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었다.


난 그들이 다시 내게로 고개 돌리기 전까지의 찰나, 그 잠깐의 시간에 커다란 불길이 밝히는 영지를 눈에 담았다.


이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아두리라. 내 눈에 담은 모든 것은 불태워질 테니.


꺄르륵! 나를 줄곧 바라보던 정령은 괜찮다는듯 웃음을 남기고 흩어졌다. 그래, 바람은 흘러가지 않고 말 그대로 흩어졌다.


나는 바람이 흩어진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정령들이 소멸되어감을 느꼈다. 왜인지 불어온 한줄기의 바람은 내 손을 붙잡다가 놓쳐버린듯이 흩어져버렸다.


그 순간 느려졌던 시간은 돌아와 불꽃은 다시 춤추기 시작했다.


케에엑! 일만의 괴물은 일제히 날 바라보며 괴성을 내질렀다.


“왜, 예상 밖이었나?”


키에엑! 괴물의 혼란은 아주 찰나였고, 그들은 내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며 다시 내게로 달려왔다.


이제 작전은 최종장이다. 저 불꽃이 영지를 둘러싸고 이 모든 것을 통째로 화장시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했다.


정령들은 고맙게도 제 몫을 다했고, 이젠 남은 인간들이 끝을 낼 차례였다.


난 씁쓸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검끝으로 정령들이 피워낸 불꽃을 가리켰다.

그들이 마지막 생명을 불태워 꽃피운 불꽃은 격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네놈들이 결코 넘을 수 없는 성벽이다.”


우리가 살아온 영지를 저 괴물들과 함께 통째로 화장시킨다.


“우리 모두 여기서 뼈를 묻는 거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남은 것은 전부 이곳에 남겨두고, 난 살아서 이 영지를 탈출할 것이다.


“성문은 열리지 않을테니까.”


횃불로 시작한 작전은 성대한 불꽃이 되어 대미를 장식한다.

그 끝에 남는 것은 잿더미 뿐일 것이다.


“그러니 와봐라. 네놈들에게 허락된 먹잇감은 여기 있는 자들 뿐이니.”


해도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을 직접 피워낸 불꽃으로 밝힌다.

이게 바로 내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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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4. 성문은 열리지 않는다(1) 24.08.23 48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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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 아이, 소년, 어른(6) 24.08.21 54 2 17쪽
10 3. 아이, 소년, 어른(5) 24.08.20 60 2 22쪽
9 3. 아이, 소년, 어른(4) 24.08.19 69 2 19쪽
8 3. 아이, 소년, 어른(3) 24.08.18 72 2 20쪽
7 3. 아이, 소년, 어른(2) 24.08.17 88 3 22쪽
6 3. 아이, 소년, 어른(1) 24.08.15 96 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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