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이 좋은 사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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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w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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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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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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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DUMMY

상대의 단검에서 녹색의 칼날이 돋아났다.

오러, 마력 칼날, 검기, 힘의 발현 등 여러 이름이 붙은 그것.


마빈의 눈이 반짝였다.


겉보기로는 싱그러운 느낌만 간직한 녹색 빛이었지만 그 안쪽에는 심히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지키고자 하는 마음, 신실한 태도, 숲에서 살면서 느꼈던 즐거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 깊디깊은 절망, 진한 권태까지.


평화롭기 그지없는 숲에서의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거기서 자라난 잎사귀와 열매는 슬픔과 고통을 머금고 있었다.


‘무슨 사정으로 여기 있는 걸까?’


마빈은 호기심이 목 바로 밑까지 차오르는 걸 느끼며 몸을 비틀었다.


쐐액!


날카로운 오러가 일렁이는 단검이 공기를 가르며 마빈을 토막 내기 위해 찔러 들어왔다.


날카로운 금속 부딪히는 소리는 없었다. 오러에 칼이 잘릴 걸 우려해 마빈은 철저히 회피 위주로 들어갔다.


손가락 몇 마디 정도만을 남기고 피해대는 효율적인 몸놀림에 활잡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힘을 발현하지 않는구나. 다룰 줄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숨기는 것이냐.’


의심 많은 활잡이의 검술이 바뀌었다.


‘자, 네 본 실력을 꺼내 보거라.’


기존의 거친 나뭇가지 같은 찌르기 대신 숲을 도망 다니는 짐승을 몰이꾼들이 쫓아가듯, 점점 좁혀 들어가는 궤적의 비율이 많아졌다.


상대방은 서서히 다가오는 칼날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상대는 소리를 지른다고 화들짝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겁 많은 초식동물이 아니었다.


밀려나던 마빈의 눈이 번득였다.


파캉!


돌연 잽싸게 움직인 마빈의 검이 단검의 궤적을 뚫고 들어왔다. 두 금속 도구가 서로를 스치면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


활잡이가 다급히 고개를 젖히면서 서늘한 검의 첨단을 피해냈다.


몰이꾼에게 쫓기던 늑대가 역으로 풀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튀어나와 코앞에서 이빨을 따닥 맞부딪친 것만 같았다.


“저기요, 그냥 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저 흑마법사 아니면 악마 잡으러 왔는데......”


그러면서도 여유가 있다는 듯 태연하게 물어보는 상대. 그 모습에 활잡이는 왠지 약이 올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짜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나름 세게 밀어붙인 건데......


활잡이가 뒤로 물러났다.


“흑마법사나 악마를 잡으러 왔다?”

“네. 원래는 그냥 구경하러 왔는데, 숲에 들어가니까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있나 했죠.”


활잡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떻게 그걸 느낄 수 있는 거지?


‘혹시 성직자인가?’


같은 경지라면 일반적인 기사나 마법사보단 성직자들이 악마의 기운에 더 예민하다.


활잡이는 눈앞의 인간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기만 한 눈에는 그 어떤 음흉한 속셈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 요소를 고려한 끝에, 그는 이 소년이 악한 목적으로 온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행하는 견습 성기사려나.


하지만 이대로 숲을 누비게 둘 순 없었다.


‘빨리 설명하고 보내버려야겠어.’


악몽을 꾸어서일까, 그는 현재 몸이 축축 늘어지고 의욕도 열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얼른 일과를 끝내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온통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뮬레타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활잡이의 말투가 바뀌었다.

정중하게 같은 업계 사람을 대한다는 투로.


“악마가 쳐들어왔다는 말은 들었어요.”

“그게 제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마수를 이끌고 지옥문에서 튀어나온 악마는 뮬레타를 멸망시키고 강을 넘어 진출하려 했으나, 주위의 지원으로 인해 이곳에서 격퇴 당했다.


그러나 사후조치가 미비한 게 문제였다.


악마가 소멸당하면 주변에 흑마력을 흩뿌리고 사라진다. 원래라면 성직자들이 그걸 정화해야 하는데, 대재앙 당시는 워낙 엉망이었는지라 그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악마의 기운을 급한 대로 마법진으로 봉인해 억누르고 있지요.”


마빈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악마가 죽으면 기운을 뿌린다고? 성당에선 안 그랬는데.


“그나저나 용케도 교단에서 여길 알았군요. 봉인은 우리 쪽에서 독단적으로 하고 있던 거라 모를 줄 알았는데. 어쨌건 여기에 악마 같은 건 없으니까 이만 떠나시죠. 봉인을 잘못 건드리면 악마의 기운이 다시 퍼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마빈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런데 왜 교단에 정화해달라고 알리지 않았나요?”

“......그건 알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대재앙도 끝났고 하니까 사제님들도 여유가 있을 거예요.”

“필요 없다 했어요.”

“저 사제님 한 분 아는데, 도와달라고 해드릴까요? 악마 봉인도 지키시던 착한 분이세요.”


어디까지나 선의였지만, 만사 귀찮은 상태였던 활잡이의 입장에서는 혀를 차게 만드는 성가신 상황일 뿐이었다.


“세계수도 통탄할 일이군. 제발 좀......”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 그러나 마빈은 상대방의 입가에서만 맴돈 작은 중얼거림을 용케 알아들었다.


“세계수? 혹시 엘프인가요?”


활잡이, 엘프 프레야난은 멈칫했다.


‘아뿔싸.’


그는 속으로 자책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악몽 때문에 머리가 멍해진 탓일까?


자신의 종족을 노출한 건 실수가 아니었다. 입 무거운 성직자끼리(?)의 대화니 실수라 할 것도 아니었다.


그의 실수는 엘프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혼잣말을 내뱉었단 것이었다.


‘너무 숲을 떠나 있었나.’


프레야난은 한숨을 쉬며 후드를 벗었다.


남자다운 턱선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와, 짧게 자른 금발 양쪽으로 비쭉 튀어나온 귀가 드러났다.


“오오!”


난생 처음 보는 인간 아닌 종족을 담은 마빈의 호수 같은 눈이 반짝였다. 대재앙이 터지기 얼마 전부터 코빼기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신비한 종족을 보게 될 줄이야!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수림에서 주신을 섬기는 성기사, 프레야난이라 합니다.”


엘프는 주신의 상징이 새겨진 목걸이를 내보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 증거로 단검에 오러를 피워내면서 동시에 신성력도 발출했다. 싱그러운 초록빛이 연둣빛으로 변했다. 이처럼 엘프는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었다.


그때, 프레야난의 오러가 강하게 꿈틀거리며 마빈을 향해 고무줄 당기듯 주욱 늘어졌다.


‘이건?’


이건 신성력의 이끌림이었다.


마력과 신성력이 섞일 경우, 강력한 신성력에 민감하게 반응해 자석을 만난 쇳가루처럼 주욱 늘어지는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가장 신실한(신성력이 강한) 자여야 하는 교황을 선출할 때 엘프가 심사위원으로 자주 참가했었다.


‘이 정도의 이끌림이면, 만만치 않은 신성력이란 얘긴데.’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소량의 흑마력이 봉인진 밖으로 새어 나온 걸 느끼고 따라왔다는 말에 신빙성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꽤 강한 신성력을 지니셨군요. 혹시 교단에서 어느 정도 되는 지위입니까?”

“네? 저 성직자 아닌데요?”

“......?”


엘프는 어리둥절했다.

성직자가 아니라고? 그럼 흑마력은 어떻게 느낀 거고 신성력 공명은 왜 일어나는 건데?


그는 복잡한 눈으로 마빈을 보다가 무기를 집어넣고 등을 돌렸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들어오세요.”




***




밝게 빛나는 두 달이 서로를 스치면서 밤하늘 가운데에서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밤에도 그 짙기가 동일한 물안개는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한 빛을 뿌렸다. 그런 몽환적인 모습을 오두막에서 바라보며 풀어내는 엘프의 이야기.


세상에는 지맥이란 것이 있다.


숲과 산, 초원은 물론이고 바다 밑이나 땅 밑에도. 단단한 지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세상의 기운이 응집되어 흘러가는 물길이 있다.


지맥은 주변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쳐 생물의 번성에 간접적으로 관여한다.


세계수는 그런 세상의 힘이 흐르는 줄기에 뿌리를 뻗어 성장하고, 자신의 주변에 그 기운을 흩뿌린다. 세계수가 자리 잡은 엘프의 대수림이 식생의 풍성함으로 유명한 이유다.


하지만 지맥이란 게 늘 똑같진 않다. 오염되기도 하며 끊기거나 새로이 생기기도 한다.


원래라면 세계수의 뿌리는 그런 변질된 지맥에서 뿌리를 거두어 순수를 유지한다. 그러나 지금 세계수는 그렇지 못했다.


현재의 세계수는 전대 세계수가 남긴 씨앗을 애써 틔운 어린 묘목.


대재앙이 막 끝난 대륙은 어린 나무에게 좋지 않았다. 대지가 오염된 곳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이곳 뮬레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악마의 기운을 억누르는 봉인진을 설치한 이유가 오염된 지맥에 어린 세계수의 뿌리가 상처입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 왜 교단에 지원요청은 안 하셨나요?”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변절하여 배교자가 된 이들이 있는 마당이고 흑마법사들이 사방에서 활개를 치는 시대다. 언제 어디서 정보가 새 사특한 존재들이 사악한 의식을 행하러 이곳으로 몰려들지 몰랐다.


교단도 교단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니 요청을 들어줄 여유도 없었을 거고.


“지금이야 대재앙 때보단 나아졌을 테지만, 종족이 결정한 일에 일개 개인이 함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요.”


아까도 원칙대로라면 봉인진에 접근하는 이를 모조리 사살해야 했으나, 프레야난은 그러지 않고 제압을 우선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 나름의 일탈이자 융통성이었다.


“자, 제 얘기는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형제님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성직자가 아닌데도 억눌린 미약한 흑마력을 느낄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성력을 품고 있는지요.”


프레야난의 물음에 마빈은 다소 난처하게 웃었다. 종교인에게 종교 얘기는 쉽게 친해지는 수단이 될 수 있으나 동시에 역린이 될 수도 있다.


‘천사를 만났단 얘기를 해도 되려나.’


카트라그에서 성경을 죄다 탐독했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현실이건 꿈이건 ‘천사를 보았다’는 현상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메이헌 사제에게 은근슬쩍 신의 사자나 주신은 어떤 모습이냐 물어봤지만 사제는 고개만 저었다.


그의 말로는 신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이는 없다고 했다.


꿈이나 기현상 등으로 계시를 내리는 게 주이고 심지어 사도에게조차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인색하다고 한다. 뭐 세상은 작은 유리병 같아서 그렇다나?


성당에 있는 석상의 경우도 옛날 유명한 성녀의 모습이라 했으니, 신이나 천사가 모습을 보인 경우는 공식적으로 없는 셈.


그런 면에서 천사를 만난 건 이례적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마빈은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다른 세상에서 살다 환생했다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을 이미 겪은 마당인지라.


기껏해야 갓 이사 온 세입자 방문해서 잘 지내고 있나 살피러 온 정도가 아닐까,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여러 소설에서 마음대로 이세계에 던져놓곤 코빼기도 안 비추는 것보단 훨씬 낫고 말고.


하여튼 천사를 만났단 말을 했다가 이단 취급 받는 게 아닐까 하고 고민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입을 다물긴 뭐했다.


‘저쪽이 날 믿고 먼저 뒷사정을 얘기해줬는데 모른척하면 도리가 아니잖아.’


엘프고 성직자라니까 입은 무겁겠지? 마빈이 프레야난의 재촉하는 시선에 입을 열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천사님이 저랑 함께하시는 거 같아서요.”

“......천사? 그게 뭡니까?”

“음. 머리카락이랑 눈동자가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는 분인데요. 빛으로 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분이세요.”


그 말에 프레야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할 때의 행동이었다.


몇 초 정도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확신을 품고 마빈에게 다시 내려왔다.


“설마 형제님, 사도십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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