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이 좋은 사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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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wi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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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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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DUMMY

인어 궁전의 심처에는 여느 왕궁처럼 왕좌가 있었다. 그러나 왕좌 하면 떠올리는 말끔하고 아름다운 가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에게 닥친 환란의 시대를 암시하듯, 왕좌는 거무튀튀한 심해의 암석을 깎아 만들어졌다.


연한 피부를 가진 이는 자칫 잘못하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를 정도로 거친 면을 가진 왕좌에는 여왕이 앉아 있었다.


물기 빠진 금발이 대전을 맴도는 미약한 해류에 살랑거리는 모습은 우수에 찬 얼굴과 조합되어 참 아름다웠으나, 여왕의 나머지 외모를 본다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가리라.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이어진 긴 흉터는 분위기를 송두리째 뒤바꾸는 힘이 있었다.


불그스름한 금빛 비늘로 뒤덮인 몸에는 곳곳에 비늘이 뭉그러진 흔적이 역력했다. 이는 큰 상처를 입고 회복했다는 투쟁의 증거였다.


무엇보다 꼬리 끝, 지느러미 바로 위에 선명한 화상자국이 있었다.


노예낙인.

이는 여왕이 과거 인간에게 잡혔다가 탈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대륙 깊숙한 곳에서 탈출해 인간의 추적을 피하여 강을 타고 내려가 마수가 들끓는 바다를 지나쳐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겪은 치열한 여정.


곳곳에 증오심이 얼룩처럼 스며든 처절한 서사시 하나를 써내려가기에는 충분했다.


그러한데.


여왕은 그토록 꼴도 보기 싫은 인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


묘하게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 밑으로 여왕의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실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인간 하나.


그 옆에는 창백한 피부와 푸른 비늘을 가진 인어가 서 있었다.

그는 해룡 이타카니아의 사자이자 인어족의 수호자들 중 하나로, 죽어서도 동족을 지키고자 맹세한 명예로운 이 중 하나였다.


해룡께서는 사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 이 인간은 사도고 우리를 도와줄 터이니 협력하라고.


“그러니까...... 네가 이번 대의 사도라고?”

“그렇대요.”


마빈도 솔직히 실감은 안 났다.

내가 역사책에 적힐 수준의 위인이라고?


-성경에는 주신께서 뭘 시킨다 들었는데. 저는 그런 말을 들은 게 없습니다만.

-그렇느냐? 이례적인 일이구나. 하지만 거룩한 임무에 대해서는 나도 딱히 주신께 말을 들은 바가 없어 말해줄 것은 없구나.

-......혹시 주신님께서 제가 사도라 하셨나요?

-그렇다.


엘프의 말은 옛 기록을 토대로 했으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무려 용이 주신께 직접 들었다는 걸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하여튼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다고 답하는 인간 소년을 보며, 인어 여왕은 아가미에서 물거품을 뿜으면서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댔다.


“음......”


왜 주신께서 내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가.


인간이 아무리 악행을 저지른들 주신을 원망하진 않았다. 죄악은 오롯이 저지른 이들의 탓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조금 원망이 되었다.


왜 이 고생을 겪은 내가 인간을 여기서까지 눈에 담아야 하는가. 몸 곳곳에 새겨진 상처와 꼬리 끝의 흉터가 쑤셔왔다.


“우리를 돕겠다고?”

“넵.”

“하지만 해저의 수압도 못 견디고 물속에서 숨도 못 쉬는 네가 뭘 할 수 있지?”


어, 팝콘이나 가져올까요?

마빈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물속에서의 움직임을 돕는 물건이 없는 건 아니다.”

“정말입니까?”

“하지만 지금은 없지.”


옛날에는 인어가 손수 만든 마법무구를 입혀 바닷속 구경을 시켜주는 관광 사업이 흔했다.


하지만 현재는?

인간과 불구대천의 원수관계다.


그동안 만든 마법무구를 파괴하고 그 제작법도 모조리 파기했다. 인간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앗, 아아......!”


마빈은 여왕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 한 켠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아름다운 바닷속을 구경할 수단이 사라지다니 이런 통탄할 일이!


마빈은 살짝 핏기가 가신 얼굴로 하소연했다.


“호, 혹시 하나라도 남은 게 있을까요?”

“있긴 하지만 그건 꺼내올 수 없다.”


왜냐면 그건 고대의 유물이었기 때문. 그것도 전투를 목적으로 한 게 아니라서 함부로 밖에 내돌릴 수 없는 물건이다.


“네가 저 거대하고 강인한 해양 마수들과의 전투에서 흠집 하나 내지 않을 수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




여왕과의 면담을 끝내고 궁전에 마련된 숙소로 향하는 길.


“괜찮냐?”


해룡의 사자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푸른 비늘과 창백한 안색을 지닌 그는 강건한 육체와 수많은 흉터를 가지고 있어 여러 고난을 헤쳐 온 강인한 전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근엄한 표정을 슥 풀며 괜찮냐고 물어오는 표정에서 다소 가벼운 성격이라는 것이 보였다.


“아뇨.”


마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라 잃은 표정 그대로.


‘다큐멘터리 속으로 빠져들 수 없다니!’


마빈이 본 다큐멘터리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바닷속이었다.


푸른 물속에서 양옆은 물론이고 위아래로까지 마음껏 헤엄을 쳐대는 수많은 해양생물들.


다리 없던 청년에겐 어찌나 그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던지, 저 생태계도 비정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라는 걸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절망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해양에서 괴물들과 싸울 수 없다니!!’


모험가들이 말하길, 새로운 지역에 왔으면 그곳의 악당이나 괴물들과 교전하는 게 모험가의 일상이라 했다.


물론 농담조였지만 마빈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산꼭대기에서 도시락을 먹고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하듯, 치안이 불안하고 괴물이 들끓는 이 세상에서는 응당 험악한 적을 상대하는 게 관례 아니겠어?


그런데 헤엄을 칠 수 없어 불가능해졌다.


인어를 잡아다 팔던 나쁜 사람들을 향한 욕이 스물스물 턱밑까지 차올랐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마수랑 싸워보고 싶었는데.......”

“너도 참 별나구나. 그냥 해양 괴수들도 강하지만 지옥문의 영향을 받은 마수들이 얼마나 흉폭한데.”

“지옥문이요?”

“그래. 왜 그냥 괴물, 괴수가 아니라 마수겠어. 지옥의 영향을 받아서 괴상하게 변해버린 것들이라서 그렇지.”


그 말에 마빈이 입술을 꽉 씹었다.

그러면 신성력과 상극이라 때려잡을 맛이 있을 텐데!


‘......결심했어.’


마빈이 주먹을 꾸욱 쥐었다.


-네가 저 거대하고 강인한 해양 마수들과의 전투에서 흠집 하나 내지 않을 수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겠다?


‘좋아. 여기서 진심으로 수련해 본다.’


여왕마저 실력을 인정해 바닷속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마법 물품을 내줄 수 있도록 말이다.


아, 일단은 궁전 구경부터 하고 나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아.’




***




해룡의 사자, 다룰마와 함께 마빈은 인어 도시의 중심인 궁전을 구경했다.


마빈이 사도라는 사실은 비밀이었지만 해룡의 사자와 함께 다니는 해룡의 손님이었기에 힐끔거리는 시선은 있어도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아. 보람찼다.’


그렇게 궁전 내부를 서너 바퀴 정도 돌은 마빈은 배부른 사자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숙소에 누울 수 있었다.


터전을 잃고 해저로 도피한 상태인 인어들인지라 그다지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의 심미안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구경을 했으니, 수련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궁전 구경을 하면서 이것저것 대화해 마빈에 대한 걸 대충 파악한 다룰마가 다음 계획을 말했다.


“아직 마력 각성을 못 했다 했으니까, 도시를 한 바퀴 쭉 둘러볼 거야.”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안 그래도 인어 도시 구경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마력 각성 못한 거랑 도시 둘러보는 거랑 상관이 있나요?”

“네가 물 밖 도시에서 기사한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지? 마력 각성에 뭐가 중요하다고 하던?”

“그냥 다요. 뭐가 나한테 맞는지 모르니까 이것저것 해보라던데요.”

“이것도 그 이것저것 하는 것의 일환이야. 네가 밖으로 나가면 온갖 험한 기세가 몰려들 거다.”


인어는 인간을 증오하니까. 그게 해룡의 손님일지라도 감정을 쉬이 숨기긴 힘들 것이다.


“인간이 잡아간 가족들 때문에 아가미 번쩍 열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인간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

“화나겠죠?”

“그래. 그런 사람들 중에는 제법 실력 있는 전사도 있을 거야. 걔들이 네게 살기를 대놓고 보내겠지. 그걸 노리는 거다.”


마력을 각성하는 사례 중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눈을 뜨는 경우도 있었다. 온 몸의 감각이 곤두서면서 마력을 느끼는 감각도 같이 눈을 뜬다는 개념.


이와 비슷하게 마빈도 그런 기세를 동시다발적으로 겪어봄으로써 감각을 일깨워 보자는 시도였다.


“무조건 효과가 있단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실마리는 잡겠지. 벌써부터 흑마력을 느꼈을 정도로 네 신체감각이 민감하니까 가능성은 있어.”


궁전에는 바깥과 연결되는 수로가 있었다.


폐호흡을 하는 생물도 숨을 쉴 수 있는 기이한 물로 가득 찬 도시에서 물이 찰랑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물속에 또 물이 있네요?”

“일반적인 물보다 더 차갑고 무거운 물이지.”


육지처럼 다량의 물건을 옮기기 위해서 조성된 곳이었다. 아무리 헤엄을 잘 치는 인어라 하더라도 그 힘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와. 신기하네.”


참방참방


마빈이 물속에서 또 물이 만져지는 진귀한 경험을 하는 동안 다룰마가 조각배를 가지고 왔다.


“제가 저을게요.”


마빈은 헤헤거리며 좋다고 노를 양손으로 잡고 열심히 움직였다. 카트라그에서 어부들 조업 돕던 일이 생각났다.


궁전 밖으로 나오자 인어의 해저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무지개색으로 반짝거리는 빗해파리가 결계 안팎으로 떼를 지어 다니는 모습 너머, 창백한 푸른 색감의 돌과 죽은 산호로 지어진 집들이 해류에 넘실거렸다.


색다른 외형을 가진 집들 외부에는 머리에 불빛을 달고 다니는 초롱아귀가 줄에 묶인 채로 둥둥 떠다녔다.


초롱아귀 말고도 여러 발광생물들이 어두운 해저도시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불빛이 가득한 야시장 같았다.


도시 곳곳에선 검은 연기를 울컥울컥 뿜어내는 드높은 열수구가 있어 깊은 심해인데도 물 온도는 제법 따스했다.


연기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면 도시를 둘러친 결계 안에서, 돌고래나 거대한 새치류 물고기들이 인어와 함께 새처럼 물속을 누비는 광경이 여럿 보였다.


“와. 인어의 바닷속 도시라니.”


비록 얕은 푸른 바다가 아니라 심해의 검은 바다라 결계 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어둠과 불빛이 어우러져 결계 내부를 더욱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엇, 인간이다.”


수로 주변에 삽시간에 인파가 몰렸다.


“웬 인간이람?”

“설마 노예로 쓰려 잡아온 건가?”

“바닷속에서 어디다 쓰게?”


“와 나 인간 처음 봐.”

“얼른 집에 가자. 저런 거 보면 안 돼.”

“엥, 왜요?”


“해룡께서 데려온 인간인가?”

“사자께서 같이 계시니 사고는 못 치겠군.”

“인간이라면 꼴도 보기 싫지만...... 사자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목소리들.


인간과 교류가 끊긴 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불쾌감이 가득한 눈으로 마빈을 보았다.


개중엔 다룰마의 말대로 노골적인 살기도 몇몇 섞여 있었다. 해룡의 사자가 곁에 있으니 일단 참는단 느낌이었지만, 함부로 돌아다니면 봉변을 당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마빈은 흐름이 변한 것을 느꼈다.


‘이게 마력의 움직임인가?’


기세나 살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밖까지 표출된 감정이나 의지에 마력이 반응해 요동치는 것이라 했다.


날카로운 증오로 가득 찬 살기의 따끔함 속에서도 피부를 간질이는 특이한 촉감이 느껴졌다.


피부 바깥 말고도 보다 한 층 더 아래도 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확실히 평범한 감각은 아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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