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분노라는 감정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창단 후 136년의 역사 동안 총 네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그 마지막 우승이 1984년, 그러니까 무려 44년 전인 팀이다. 아니, 우승은 고사하고 가을야구에 나가본 것 자체가 14년이 넘는다.
흔히 알중, 혹은 농어촌이라 불리는, 메이저리그에서 야구 제일 못하는 팀들이 모인 아메리칸 리그 중부지구에서도 또 매년 하위권을 전전하는 팀,
팀을 목숨처럼 아꼈던 구단주의 지원 하에 2010년대 초반 마지막 전성기를 보낸 그 팀은 그 구단주가 사망한 후 수없이 많은 투자자들이 지분을 나눠가진 채 10년 넘게 탱킹과 리빌딩을 반복 중인 팀이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몰락과 함께 사망판정을 받은 도시, 그 도시와 함께 침몰해버린 야구단.
그런 구단 사정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내가 프로에 입단하게 될 2030년 즈음에는 우승은커녕 생존과 매각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단순한 예측이 아니다. 직접 보고 와서 하는 말이다.
메이저리그에서만 세 번의 인생을 살아본 경험상, 디트로이트가 그 운명에서 벗어나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중 한 번은 중국 자본에 팀이 넘어가는 것까지 보았다.
그런데 그런 팀을 우승시키라고? 그것도 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런 시발,
열세 번의 회귀, 열네 번의 삶, 살아온 횟수만 200년이 넘고 그 중 절반 이상의 시간을 야구선수로 살아온 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야구는 선수 한 명이 팀에 미치는 영향이 극도로 제한되는 스포츠다. 역대 최고의 선수라 불렸던 레전드들 중에도 챔피언 반지 하나 없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메이저리그는 전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놈들이 모인 리그이며 미국의 자본이 집중되는 곳이다. 4할이니 70홈런이니 20승이니,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일개 선수 하나가 끼어들어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팀을 사서 처음부터 싹 갈아엎으면 모를까.
그 팀을 사서...
사서...
미친...
가만,
“설마... 내가 프런트 직원으로 삽질하는 걸 지켜본 이유가... 나보고 그 구단을 사라고? 그거 튜토리얼 같은 거였어?”
대답은 없지만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거 같다.
누군지 모를 빌어먹을 그 개자식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우승시키기 위해 내게 야구단 경험까지 쌓게 하고, 메이저리그를 박살낼 실력을 만들라고 KBO 밑바닥에서부터 데굴데굴 구르게 만든 게 분명하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튜토리얼을 깨는 데만 200년을 쓴 셈이다.
“후...”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단 생각부터 해보자.
대기업이 구단을 소유하고 있어 개인이 지분을 매입하는 게 불가능한 KBO와 달리 메이저리그 구단은 돈만 있으면 어느 정도 비벼볼 여지가 있다.
내게는 당첨이 확실한 파워볼 번호가 있다. 그 돈을 불려 자금을 만들고, 지분을 사들여 구단주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생각해본다.
만약 그 팀을 싹 갈아엎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 팀의 선수로 뛴다면,
우승시킬 수 있을까?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하아, 시발...”
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맨몸으로 가시밭길에 뛰어드는 건 확정이다.
돈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야구는 축구와 다르다. 오일 머니가 투입되면 몇 년 내에 곧바로 우승권으로 튀어 오르는 그런 스포츠가 아니다.
단순히 돈만으로 우승을 살 수 있다면 뉴욕의 두 팀이나 다저스같은 놈들이 번갈아가며 우승을 독식했겠지. 메이저리그 최고 부자 구단 양키스조차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 20년 전이다.
특정 구단의 독주를 막기 위한 제도들 때문이다. 골치 아픈 제약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어줍잖은 놈들 말고 진짜 최고들, 그러니까 타이거즈라는 허접스러운 팀을 우승으로 이끌 만큼 대단한 선수들은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다. 돈은 기본이고 그보다 많은 게 필요하다.
팀의 역사, 자부심, 긍지, 소속감, 동료선수들과의 케미, 연고 도시의 환경, 가족들의 의견, 은퇴 후 미래 등등 세상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줘야 간신히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미국 최악의 범죄율을 자랑하는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타이거즈는 언제나 불리할 수밖에 없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구단 선호도에서 언제나 바닥을 벅벅 기는 팀이 타이거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나 역시 그 팀의 오퍼를 받은 적이 있었고, 계약을 권유하는 에이전트에게 이렇게 대답했으니까.
한번만 더 그딴 소리를 하면 다른 에이전트를 찾아갈 거라고.
시발,
진짜 장난해?
“하!”
그럼에도 정말 거지같은 건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짓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 기나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인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며 계획을 생각해봤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그 망할 팀을 뿌리부터 갈아엎고, 거기에 다시 나를 더하는 상상을 해봤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였던 나를.
그러면,
그 정도까지 발버둥을 치면,
어찌어찌 가능하지 않을까?
12년이라는 시간 내에 우승 트로피 한 번 정도는 들어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씨발!”
생각할수록 좆같은 상황이지만 딱 하나 긍정적인 건 있었다.
거세되어버린 줄 알았던 내 감정 중 하나가 완전히 살아났다.
“진짜 죽여버릴 거다! 죽여버릴 거라고!”
분노라는 감정 말이다.
**
중력의 법칙에 의해 모래시계에 채워진 모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그렇게 위에 있던 모든 모래가 밑으로 떨어지면 그 사람이 가진 시간은 끝난다.
하지만 내가 가진 시계는 위와 아래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래로 떨어진 모래는 위로 역류하고, 거기서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그렇게 내 삶은 반복된다.
누군가는 내가 가진 무한한 시간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다섯에서 서른 살까지의 삶을 몇 번만 반복해보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갈 것이다.
나는 서른 살 이후의 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부모님, 친구,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가 없어진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 시간은 언제나 열다섯에서 시작해서 서른에서 끝난다. 이것은 마치 통에 갇힌 다람쥐와도 같다.
이제 나는 이 통 속에서의 삶을 끝내려 한다. 누군가 내게 씌운 이 말도 안 되는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걸 쏟아보려 한다. 그걸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거다.
이 좆같은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고등학교부터 졸업해야 한다는 거.
내 인생 열네 번째 고등학교 1학년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 주목! 다들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 어때? 좋아? 아니면 두려워? 어느 쪽이든 참 좋을 때다. 내가 너희 나이였을 때는 말이야. 아, 이게 말을 하자면 좀 긴데... 일단 내 소개부터 해야겠구나. 반갑다. 앞으로 1년 동안 너희들의 담임을 맡게 될 김재덕이다. 가르칠 과목은 영어고, 음, 그러고 보니 이 얘기부터 해야겠구나 이 선생님이 중학교 때 말이다...”
둥글둥글 정감 가는 얼굴을 한 담임선생이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저 사람에 대해 한 마디로 정의하면 좋은 사람이다.
말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벌써 열네 번째 듣는 담임선생의 중학교 배드민턴 선수 시절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몰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관련된 뉴스를 검색해봤다.
<3년 연속 지구 최하위에 머문 타이거즈, 2선발 에드 바에즈를 떠나보내다>
<타이거즈가 노리던 FA 외야수 저스틴 터커, 뉴욕 메츠와 계약 합의!>
<길어지는 부상, 타이거즈의 에이스는 언제 돌아올 것인가?>
<스프링트레이닝에서 발생한 라커룸에서의 난투극, 익명을 요구한 타이거즈 구단 관계자 “루키 그룹과 베테랑 그룹 간의 알력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타이거즈의 최대 주주, 구단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시행하려다 사무국에 덜미>
<2027년 평균관중 순위, 최하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29위 템파베이, 28위...>
<잠시 회복세를 보이던 디트로이트 부동산 시장, 다시 암흑 속으로>
타이틀만 봐도 숨이 턱턱 막혀온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꿈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뉴스들만이 가득하다.
하.
“자, 다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어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쉽네. 그래, 좋아. 나머지는 또 다음 시간에 이어서 말해주는 걸로 하고. 쉬는 시간에 사고 치지 말고, 친구들끼리 인사도 나누고, 다음 수업 잘 받고, 종례시간에 다시 보자. 반장! 아, 아직 반장 없지? 내 정신 좀 봐. 그래,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하하, 자 그럼 선생님은 간다.”
50분 동안 잠시도 입을 쉬지 않던 담임선생이 교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혀 있던 아이들의 입이 그제야 비로소 열렸다.
“갔다.”
“시발, 말 졸라 많네.”
교실 안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는 화장실을 가고, 알던 얼굴을 만나 반가워하고, 어제 잠을 못 잤는지 책상에 엎어져 잠을 청하기도 한다. 회귀 할 때마다 늘상 봐오던 풍경이다.
“저 새끼 봐라. 일부러 이쪽 안 쳐다보는 거 졸라 웃기네.”
“그럼 우리가 가야지. 야, 찐따. 얼굴 좋아졌다? 이게 몇 달 만이야?”
그 모습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디트로이트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또 하나의 익숙한 광경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등교 첫날부터 교실 공기를 탁하게 만드는 양아치들의 일진 놀이였다.
“이것 봐라. 우리 재윤이 감 잃은 거 봐. 몇 달 안 봐서 그런가?”
“...하지 마.”
“이야, 이제 고등학생 됐다고 반항도 하네? 와, 진짜 이거 존나 신선한데?”
일진 놀이를 하는 놈들이라고 해서 아무나 건드리는 건 아니다.
건드려도 될 것 같은 만만한 놈들, 혹은 중학교 때부터 이미 건드려왔던 놈들이 주 타깃이다. 지금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인 저 꼬맹이는 후자에 속한다. 중학교 때부터 저놈들의 밥이었다는 뜻이다.
“자, 어쨌든 새 학년이 됐으니 신고식부터 해야지. 어디 보자. 오늘은 무슨 놀이를 할까... 아, 그거 어때? 야, 찐따. 이따 여자 선생 수업 들어오면 교탁 옆에 나가서 누워. 그리고 자는 척해봐. 어때, 할 수 있겠지? 크크, 이거 졸라 재밌겠네.”
“...싫어. 그런 걸 어떻게 해.”
“하기 싫어? 그래? 그럼 하지 마. 대신 수업 끝나고 다 같이 너희 집 놀러 가면 되겠네. 할머니가 참 좋아하시겠다. 그치?”
“집까지는 안 찾아오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잘 하라고, 시발 놈아. 확 다 불질러버리기 전에.”
놈들이 목소리를 높이자 시끄럽던 교실 안이 썰렁해졌다.
양아치 하나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왕따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무 생각 없이 그 꼬라지를 지켜보고 있는데, 더러운 슬리퍼에서 튕겨 나온 먼지가 바람을 타고 내 쪽으로 날아왔다.
순간 심장 근처 어딘가가 꿈틀거렸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러니까 이 회귀가 시작되기 전 진짜 열다섯 시절의 나는 저런 모습을 보고 그냥 넘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덕분에 매일 싸움이 붙었고, 아버지는 내게 무술을 가르친 걸 후회하기도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모두 잃은 지 오래다.
그러니 지금 이건 알량한 정의감 같은 건 아닐 거다.
아마도 그 타이거즈가 저 타이거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 살아난 감정,
분노,
그것 때문일 거다.
“뭘 봐? 눈 안 깔아, 이 새끼들아!”
“개념 상실한 새끼들이 한 둘이 아니네. 방금 나랑 눈 마주친 새끼들, 각오해라. 응? 오늘 수업 끝나고 보자.”
인간은 언제부터 감정이라는 걸 갖게 되는 걸까?
아마 태어나면서부터겠지? 눈도 못 뜬 신생아가 엄마 품을 찾아 울어대는 것 역시 그 아이가 가진 감정에서 기반한 것일 테니까. 외로움, 공포, 배고픔,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어쩌면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보다 못할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분노, 단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하나의 감정이 깨어났으니 이제 곧 다른 감정들도 살아날 것이다. 누군가 가르쳐준 건 아니지만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도 다시 재미라는 게 생겨날 거다.
“자, 그럼 우리 약속한 거다? 이따 수업 시작되면 앞에 나가서...”
“못 한다니까...”
“그래? 그럼 너희 집에 가서 할머니 좀 봬야겠네.”
“하지 마... 제발...”
그렇기에 나는 지금 내 감정에 충실하려 한다. 감히 내 코에 먼지를 집어넣은 저 쓰레기들을 치우려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에나 떼를 향해 다가갔다.
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왕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놈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재윤이라고 한 것 같은데.
관심 밖의 존재였는지라 매번 듣고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단 톰슨가젤이라고 해두자.
“먼지 날리니까 좀 작작해라. 톰슨가젤도 그만 괴롭히고.”
“뭐?”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톰슨가젤도, 하이에나들도 모두 놀랐다.
일진 놈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중 가장 덩치가 큰 놈이 잔뜩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시발, 이 새끼는 뭔데, 야! 너 어느 중학... 컥!”
말을 섞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멱살을 잡고 앞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칠판 한 가운데 대가리를 박아버렸다.
꽈앙!
“먼지 날린다고 했잖아, 이 새끼야.”
“끄륵...”
그래, 역시 이게 정답이었나보다.
답답하던 속이 이제 좀 시원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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