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천재투수가 메이저리그를 찢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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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빵소년
작품등록일 :
2024.08.1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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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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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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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015화. 기대, 그리고 두려움

DUMMY

“자, 다들 집중해서 이 문맥에 가장 적합한 단어를 골라보자. When Johann, a curious...”


로또당첨금과 관련된 일들이 대충 정리되었다.


실수령금 18억8천만 원 중 7억 정도가 주택 구입비로 사용되었고, 추가로 1억 원이 아버지의 도장 새 승합차와 승용차 구입비로 빠졌다. 좀 더 좋은 차로 사드리고 싶었는데, 워낙 고집을 부리시는 터라 그 정도 선에서 타협을 했다.


남은 돈은 주식에 넣어놓을 생각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안정적이면서도 파격적으로 성장할 미국 주식에 말이다. 내가 십 수번 회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종목이니 충분히 안심할 만하다.


그렇게 불어난 돈은 내 디트로이트 인수 계획의 시드머니가 되어줄 거다.


물론 그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거다.


하지만 괜찮다. 내게는 아직 파워볼 한 방이 남아 있으니까.


“여기서 네모 안에 blocked와 cleared가 있지? 자, 그럼 앞에 문장하고 조합해서...”


돈 문제는 일단 그렇다 치고,


담임선생의 목소리를 BGM 삼아 현재 내 몸 상태를 복기해보았다.


재활, 이걸 재활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원래 내가 갖고 있던 육체와 기술을 복원시키는 걸 재활이라 한다면 아마도 재활이 맞을 거다.


어쨌든 그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야구와 거리가 멀었던 몸이 느리지만 아주 착실하게 그라운드에 적응해가고 있다.


회귀 초보일 때는 너무 서두르다 실수한 적도 있다. 급한 마음에 훈련량을 늘리다보니 아직 여물지 못한 육체가 버티질 못한 것이다. 100리터가 한계인 그릇에 120, 130리터를 한 번에 들이부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모두 지난 일이다. 나는 지금 이 몸에 어떤 훈련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니 예전 같은 실수는 없다.


“그래, 정답은 1번 blocked야. 자, 왜 그런지 설명해볼 사람? 어이, 백호! 눈 감고 뭐 하는 거야? 선생님은 운동부라고 안 봐준다? 일어나, 일어나서 이 문제 맞춰봐. 그럼 넘어가주지.”


지금 나를 지목한 건가.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산 사람에게 고등학교 1학년 영어문제를 들이밀다니.


“1번이요.”


“땡! 정답은 2번! 내 그럴 줄 알았지. 백호야, 내가 누누이 말했지? 요즘은 운동선수들도 공부해야 해. 특히 영어는 말이야. 정말 필수 중의 필수야. 누가 아니? 너 나중에 메이저리거 돼서 미국 갈지? 그럴 때 영어 한 마디 못하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물론 다른 방법도 있긴 하지. 영어 잘 하는 아나운서랑 결혼을 한다든지, 그래, 그럴 수도 있긴 해. 하지만 기왕이면 영어를 할 수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자, 골라봐라. 벌점 먹을래, 아니면 정신도 차릴 겸 나가서 푸시업 30개 하고 들어올래?”


“...푸시업 하고 오겠습니다.”


“오냐, 후딱 다녀와. 자, 그럼 다음 문제...”


이런 빌어먹을,


내가 틀렸다고?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영어문제를 못 맞췄다고?


황당함을 누르며 복도로 나왔는데 바로 옆 반 복도에 낯익은 얼굴을 한 놈이 먼저 푸시업을 하고 있었다.


최승우였다.


“어? 백호! 너도 걸렸냐? 하, 진짜 말도 안 되지 않냐? 야구부가 야구만 잘 하면 되지. 수학은 대체 왜 해야 하는 건데? 야구하는데 이차함수가 왜 필요하냐고!”


시발,


이건 진짜 좀 쪽팔리네.


남들이 보면 나나 저놈이나 똑같아 보일 거 아냐.


내가 이래봬도 수능만 세 번에...


하, 됐다. 그만두자. 추하다.


**


“저기... 우리 아버, 아니, 아저, 아무튼... 그 사람 만났다며?”


“어, 만났는데.”


“...혹시 이상한 소리 들은 건 아니지?”


“별로,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는데, 왜?”


“아냐, 그럼 됐어. 그리고... 그때 일은 고마워.”


“됐어.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일 아니니까. 너희 아버지한테 선물도 받았고. 어쨌든 내가 좀 바빠서, 더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하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중얼거리는 신재윤을 지나 야구부로 향했다.


처음에는 며칠만 쉬고 온다더니 꽤 오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온 듯하다. 어쨌든 예전보다는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생각해보니 뭔가 좀 억울하다.


내게 저주를 건 놈이 만약 신이라면 이런 선의의 행동에 가산점 같은 거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예를 들면 목표달성 시한을 서른에서 서른한 살로 늘려준다던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며 오후 훈련을 시작했다.


따악


따아악!


“백호야.”


“네, 주장.”


“정진이 스윙 좀 바뀐 거 같지 않아?”


“그런 거 같네요. 떨어지는 공에 배트가 잘 안 나오시네요.”


“정진이가 왜 갑자기 좋아졌는지 난 알지.”


주장이 궁금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처럼 반응해주었다.


“비결이 뭔데요?”


“렌즈 맞춘 지가 오래 돼서 왼쪽 눈 초점이 잘 안 맞았었나봐. 미국처럼 여기도 안경 맞추려면 한참 걸릴 줄 알고 대충 참았다네.”


할 말이 많았지만 그냥 넘겼다.


그래, 뭐 해결 됐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내 바로 뒤에 배치되는 저 예비스님에게 변화구와 포심을 구분할 능력이 생기면 그건 나에게도 이득이니까.


박수라도 쳐주자.


짝짝짝


“...?”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정우진을 뒤로 하고 배팅 케이지로 들어섰다.


새것처럼 번들거리는 피칭머신이 날 기다린다. 신재윤의 아버지가 기증한 물건이다.


최고 구속 180km/h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변화구를 구사할 수 있는,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오버스펙인 피칭머신에서 다양한 공들이 랜덤으로 발사되었다.


따악!


따악!


따아악!


본래 짧으면 1학기, 길면 최대 1학년이 끝날 때까지 타격은 자제하려던 계획은 첫 번째 경기에서 내 스스로 봉인을 풀며 물 건너갔다.


다행인 건 예상 외로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도 내가 또 성장한 모양이다. 몸을 관리하고 컨트롤하는 능력이 이제는 절정에 달한 것 같다.


따악!


따악!


“와, 저놈 진짜 배트 스피드가...”


“괜히 그런 홈런을 친 게 아니구나.”


평소보다 조금 더 파워를 실어보았다.


뭐랄까,


얼마 전부터 느꼈지만 이번 삶은 확실히 뭔가 다르다.


같은 힘을 들여도 퍼포먼스가 잘 나온다고 해야 할까?


사실 이 시기라면 구속은 대략 150km/h 정도, 타격은 아예 봉인해 놓았을 상황인데 그보다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면서도 몸에 거의 무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야구의 끝이라 생각했던 곳이 끝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 위에 또 다른 경지가 날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자, 잠시 훈련 중단하고 이쪽으로 모여 봐.”


“네!”


“이번 주말에는 충주성진학교와의 경기가 있다. 코치와 상의해봤는데 그날은 라인업을 조금 다르게 가져가볼 생각이다. 일단 백호.”


“네, 감독님.”


“그날 넌 타자로만 출전한다.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몸으로 너무 많이 던졌어. 약팀하고 붙게 되었을 때 다른 투수들 테스트도 해봐야 하니 그날 네 등판은 없다. 아, 그리고 어느 포지션을 맡겨야 할지 고민해봤는데... 일단 제일 쉬운 좌익수에서 시작해보자. 최 코치, 시간이 많지 않지만 부탁해. 경기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어보자고.”


“걱정마세요, 감독님. 저 녀석 센스가 좋아서 금방 배울 겁니다.”


“내 말 이해했지, 백호?”


“알겠습니다.”


휴식이라...


나쁘지 않지. 안 그래도 두 경기 연속 완투한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했으니까.


그나저나 외야수비 훈련이라고?


내가 유격수 다음으로 많이 섰던 자리가 좌익수다.


일부러 못하는 척 하는 것도 고역인데, 그냥 인터넷 보고 좌익수 수비도 연습해놨다고 할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믿겠지.


“자, 그리고...”


어쨌든 나는 그렇다 치고,


그럼 그 날 마운드에는 누가?


“선발 투수는... 강유찬.”


“네? 저요?”


“그래, 네가 그날 선발이다.”


선발이라는 말에 강유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저놈은 대체 언제쯤되야 자기 재능을 깨달으려나.


조상혁한테 하도 짓눌려서 완전히 기가 죽어버린 건가.


가스라이팅이란 게 이래서 무섭다.


**


“난 너희 엄마가 만드신 장조림이 제일 좋더라.”


“...왜 자꾸 우리 집에서 아침을 먹는 건데.”


“그야 너 깨우려고 일찍 일어나느라 아침을 못 챙겨먹어서?”


“뭔 헛소리야! 너 내 자전거 얻어 타려고 오는 거잖아. 야, 학교가 코앞인데 그냥 걸어가. 걸어가도 충분한데 왜 자꾸 나한테 오는 거야?”


“학교 가는 길 도중에 너희 집이 있는데 굳이?”


“아니면 자전거를 한 대 사든지!”


“너한테 자전거가 있는데 굳이?”


“하, 진짜 이놈이 돌았나...”


4월 둘째 주 토요일, 주말리그 전반기, 청진고등학교의 세 번째 경기가 있는 날,


이른 아침부터 투덕거리던 강유찬과 최승우가 자전거 앞뒤에 올라탄 채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웬일이래? 네가 페달 밟겠다고 자청을 다하고?”


“야, 내가 오늘 선발로 나설 놈을 부려먹을 정도로 막된 사람은 아니야. 편하게 앉아 있어. 학교까지 다이렉트로 모실 테니까.”


“...흠.”


자전거 뒷좌석에 탄 강유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날씨 좋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 경기 있는 날은 항상 날씨가 좋네.”


“다행이지 뭐.”


“컨디션은, 컨디션은 어때? 너 선발로 나서는 게 얼마만이지?”


“한... 1년 정도 됐지? 중3 두 번째 경기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래, 그랬지. 맞네.”


다신 야구 따위 안 하려고 했는데, 얼떨결에 포수 마스크를 쓰게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 경기 선발이다.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느낌 자체는 나쁘지 않다. 마운드에도 금방 익숙해졌고, 체격이 커져서 그런지 중학교 때보다 구속도 살짝 올랐다.


잘 하고 싶다.


내가 그라운드에 복귀했다는 걸 조상혁 그 개자식도 알게 되겠지.


그놈 웃는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잘 던지고 싶다.


“수비나 똑바로 해. 실책하면 죽여 버릴 거다.”


“뭔 소리야. 야, 나 최승우야. 중학 최고 중견수 최승우.”


“중학 최고는 무슨.”


“하, 그리고 에러가 나오면 백호 쪽에서 나오겠지. 설마 나겠냐?”


“그놈 좌익수 수비 연습하는 거는 보고 하는 소리?”


“...보긴 봤지.”


“그놈은 미쳤어.”


“맞아, 미쳤지.”


“이건 그냥 느낌인데 다른 포지션 시켜도 금방 배울 거 같아.”


“내 생각도.”


“어쩌면... 조상혁보다 그놈이 더 천재 아닐까?”


저 멀리 학교 교문, 그리고 그 앞에 대기 중인 야구부 버스가 보인다.


최승우가 중얼거리듯 다짐했다.


“조상혁 그 새끼한테 한 방 먹이려면... 오늘 경기부터 잡아보자고.”


“당연하지.”


**


“지난번에 알려준 대로 해봤어?”


“네? 아, 네, 하는 중이에요. 멀쩡한 제 손 두고 밥 차려 달라, 옷 찾아 달라... 저번에는 일부러 접시도 깨봤어요.”


“그래? 엄마가 뭐라셨는데?”


“화내시던데요. 결혼할 때부터 계속 쓰시던 거라고.”


“...하하, 그건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꾸준히 해봐. 분명 좋아지실 테니까. 아, 아, 접시 하니까 생각났는데, 내가 그 말 했나? 선생님이 말이야, 원래는 배트민턴이 아니라 원반던지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걸 포기한 이유가... 백호야? 선생님이 얘기하는데 이어폰을 끼면 어떻게 하니?”


흠, 이 사람은 주말에 쉬지도 않는 건가?


오늘도 야구부 일정에 동참한 김재덕 선생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잠시 후 있을 경기를 생각해봤다.


충주성진학교와의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강유찬이다. 저 녀석이 어떤 투구를 보이냐에 따라 앞으로 내 등판일과 휴식일이 결정될 것이다.


살짝 궁금해졌다. 강유찬 저 재능덩어리가 언제 만개할지 말이다.


“백호야, 그런데 말이다. 이 원반던지기도 생각해보면 야구랑 비슷한 점이 있어요. 일단 동작부터가 그래. 잘 봐. 사이드암 투수 같지 않니? 아니라고? 에헤, 다시 한 번 보라니까?”


“비슷하네요.”


“그렇지? 내 말이 맞지?”


그나저나 오늘 스카우트들은 많이 왔으려나.


디트로이트 그 멍청이들은 언제쯤 나타날까.


**


“뭐야, 선발이 백호가 아니라 강유찬이야?”


“에이... 장비까지 다 들고 왔는데.”


백호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스카우트들이 실망스러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하지만 그 실망이 기대로 바뀌는 건 금방이었다.


뻐엉


“방금 구속 몇 나왔지?”


“137km/h네요. 회전수는 2,150PRM.”


“흠, 나쁘지 않네. 1학년, 거기에 왼손인 점을 감안하면 말이야.”


“그렇네요.”


부웅


“스윙! 아웃!”


- 삼진! 삼진입니다! 오랜만에 마운드에 복귀한 청진고 강유찬이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호오... 공 괜찮은데?”


“마지막 공은 슬라이더였나?”


“음, 구속이나 궤적을 봐서는 고속 슬라이더같기도 하고... 아, 느린 화면으로 보니까 커터네요.”


“강유찬이 중학교 때도 커터를 던졌었나?”


“제가 알기로는 아니요.”


“흠.”


스카우트들의 눈빛이 진지해진 가운데 강유찬이 1번 타자에 이어 2번 타자마저 유격수 땅볼로 돌려세웠다. 중학교 때 이후 첫 마운드 복귀라는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투구 내용이었다.


“괜찮네. 정태양 상대로 어떻게 던지는지 보면 좀 더 확실해지겠지.”


“그렇죠.”


<3번 타자 투수 정태양>


충주성진학교의 선발투수이자 3번 타자로 배치된 정태양이 타석에 들어섰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경기대민고의 주전 선수로 프로팀의 주목을 받은 선수다. 갑자기 청각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프로 입단이 거의 확실했던 재능이다.


저 선수를 포함 후천적 청각장애를 갖게 된 선수들 셋이 합류하며 충주성진고의 전력은 두 단계 상승했다.


뻐엉


“볼.”


초구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커터를 정태양이 잘 걸러냈다.


그리고 비슷한 코스로 들어오는 두 번째 공을 정확하게 밀어 쳤지만 아슬아슬하게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정태양 저놈 확실히 기본기가 좋아. 타구에 힘 실리는 거 봐.”


“귀만 아니면... 하, 아쉽네요. 여러모로.”


“그래, 맞아. 아까운 녀석이지.”


몸 쪽 높은 하이패스트볼을 정태양이 골라내며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던질 데가 없다고 느낀 것인지 강유찬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리고 결국,


따아악!


몸 쪽 낮은 코스로 날아온 포심을 정태양이 정확하게 잡아당겼다.


잘 맞은 타구가 총알 같은 속도로 좌측 펜스를 향해 날아갔다. 최소 2루타는 보장된 그런 타구였다.


“역시 정태양이 잘하긴 잘... 응?”


하지만,


“아웃!”


맞는 순간 2루타라 판단한 타구였다.


하지만 그 타구가 날아간 곳에는 인생 첫 외야수비에 나선 백호가 있었다.


글러브 안에 든 공을 꺼내 심판에게 확인시킨 녀석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덕아웃을 향해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겼다.


“...쟤, 언제 저기 가 있던 거야?”


**


- 쳤습니다! 잘 맞은 타구가! 좌측으로! 좌측... 어? 잡았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백호 선수가 펜스에 등을 기댄 채 타구를 잡아냅니다! 위원님, 제가 뭔가를 놓친 건가요? 왜 백호 선수가 저기 있죠? 분명 정상수비위치에 있던 던 거 같은데요?


- 와...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화면으로 못 보여드리는 게 아쉽네요.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면 말이죠. 정상위치에 서 있던 백호 선수가 투수의 와인드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측으로 스타트를 끊었어요


- 왜요?


- 글쎄요... 저기 청진고 감독의 놀란 표정을 보니 덕아웃에서 사인이 나온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본능적으로 타구가 날아올 방향을 예측한 걸까요?


- 그런 게 가능한가요?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한 선수가?


- 아뇨, 그딴 게 가능하면 왜 힘들게 훈련 같은 걸 하겠습니까. 하,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저 선수가 156km/h를 던졌을 때보다 방금 전 이 플레이가 더 놀랍습니다. 말이 안 돼요. 엄마 뱃속에서부터 야구를 했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


“야! 너 왜, 어떻게 그쪽에 가있던 거야?”


“너도 한 백년 정도 데굴데굴 구르다 보면 나처럼 할 수 있게 될 거다. 그보다 방금 그 공은 너무 어정쩡했어. 낮게 던질 거면 좀 더 과감하게 빼란 말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신세 한 번 졌다!”


부원들은 그렇다 치고, 감독과 코치의 눈을 피하는 건 무리였다.


괜히 변명할 일을 만들기 싫어 슬쩍 배트만 꺼내 나가려고 하는데 입을 쩍 벌리고 있던 감독이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백호야, 너...”


“인터넷에서 보니까 그렇게 나와 있더라고요.”


“응? 인터넷? 인터넷에 뭐가 나왔는데?”


“투수가 던지는 방향과 타자의 습성을 미리 숙지해놓으면 타구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그냥 한 번 해봤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그런 게 인터넷에 나온다고...?”


“그보다 감독님, 저 1번 타자인데요.”


“아, 아, 그렇지. 알았다.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나중에 다시 얘기한다고 해봐야 사실 해줄 말이 없다.


왠지 강유찬 놈의 제구가 흔들릴 거 같았고, 어떻게든 프로에 가고 싶어 눈이 뒤집혀 있는 타자가 마음먹고 잡아당길 것 같아 미리 우측으로 스타트를 끊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됐다. 어차피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잊어버리겠지.


지금은 타격에 집중할 때다.


“플레이!”


마운드 위, 방금 전 내게 2루타를 도둑맞은 놈이 배트 대신 글러브를 끼고 서 있다.


정태양, 잘 아는 녀석이다. 앞으로 몇 년 후면 국내 프로야구 1군 최초의 청각장애 선수로 등록될 놈이니까.


실력도 좋고, 끈기도 있고, 집념도 강한, 모범적인 스포츠맨이다.


청각에 문제가 생겼다 해도 그건 팀플레이에 대한 문제이지 구속과 구위 자체는 예전 그대로다. 한 마디로 말해 좋은 투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를 돋보이게 만들어줄 공 던지는 기계일 뿐이다.


뻐엉


“볼.”


최대구속은 대략 145km/h 정도, 구위도 괜찮고 무엇보다 제구가 좋다.


만약 정말로 계속 야구를 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타자보다는 투수에 올인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뻐엉


“스트라이크!”


궤적을 확인하기 위해 슬라이더를 그냥 흘려보냈다.


역시 좋은 공이다. 프로 레벨이라면 몰라도 고교리그에서 이 공을 쉽게 쳐낼 타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아마 다음 공도 슬라이더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번 타석이 끝날 때까지 슬라이더만 주구장창 날아올 수도 있다.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무엇보다 지난 두 경기에서 내가 때려낸 홈런이 모두 포심을 노려 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노려야할 공은 바로 저 슬라이더다.


스륵


스탠스를 살짝 닫고, 바깥쪽으로 흘러나갈 슬라이더를 때릴 준비를 마쳤다.


다음 순간 정태양의 손끝에서 공이 떠났다.


머릿속, 마치 시뮬레이션처럼 재생되는 슬라이더의 궤적을 따라 배트를 출발시켰다. 밖으로 휘어나가려는 공을 그대로 밀어쳤다.


따악!


- 쳤습니다! 1루수 머리 위를 통과한 타구가 우측 라인을 타고, 네, 우익수가 급하게 달려가지만 멉니다! 멀어요! 그 사이 백호 선수는 1루를 돌아 2루, 아! 3루까지! 3루에서, 3루에서, 세이프! 세이프! 완벽한 세이프입니다! 아, 대단하네요! 저 선수 발이 저렇게 빨랐나요? 엄청나네요! 서광수 감독이 괜히 백호 선수를 1번에 기용한 게 아니군요!


- 이야, 지금은 발도 발이지만 정말 잘 밀어 쳤어요. 여기 느린 화면을 보세요. 바깥 쪽 공을 따라가면서도 어깨, 허리, 오른발로 이어지는 중심축이 전혀 흔들리지 않죠? 그 상태에서 손목 힘을 이용해 배트를 컨트롤 한 겁니다. 그래서 파울이 아니라 페어가 된 거고요


- 누군가 저한테 그러더군요. 백호가 때린 두 개의 홈런이 혹시 초심자의 행운 같은 거 아니냐고 말이죠


- 만약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방금 전 이 타격을 보여주고 싶네요. 와... 전 이닝에서의 수비도 그렇고, 방금 타격도 그렇고, 이 선수 정말 야구초보 맞나요?


- 이렇게 되면 청진고 감독도, 그리고 프로팀 스카우트들도 머리가 복잡해지겠습니다. 저 재능 넘치는 선수를 투수로 키워야 할지, 야수로 키워야 할지 말이죠


- 혹은 둘 다 할 수도 있겠죠


- 프로에서 투타겸업을? 아무리 재능이 넘쳐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요?


- 농담입니다. 하하


**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내게 변화구를 정확하게 받아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타구를 페어라인 안으로 집어넣을 손목 힘과 1루에서 3루까지 단숨에 내달릴 수 있는 주력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장애를 극복하고 프로의 꿈을 키우고 있는 투수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만들어버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단은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백호! 백호! 백호!”


“청진고 파이팅! 가자! 가즈아아!”


“백호야! 선생님 여기 있다! 경기 이기면 선생님이 고기 사줄게! 고기!”


응원단 맨 앞에서 펄쩍거리고 있는 담임선생을 향해 살짝 손을 들어줬더니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언제봐도 유쾌한 양반이다.


“정우진, 한 방 날려!”


“정우진! 정우진! 정우진!”


“청진고 파이팅!”


어쨌든 우리 팀의 첫 득점 찬스다.


무사 주자 3루, 타석에는 2번 타자 정우진.


우리 팀이 청주중앙고와 대전대부설고를 꺾고 2연승을 올린 후,


나는 봤다.


아무도 없는 야구부실에서 저 사람이 몰래 울고 있는 모습을.


감격의 눈물이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해도 못하겠다.


나처럼 저주가 걸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업 야구선수가 될 것도 아닌 사람이 왜 저렇게 야구에 진심인지, 왜 고작 고교야구 경기결과 따위에 눈물을 흘리는지 말이다.


딱!


“파울!”


- 아! 또 배트가 밀렸습니다! 백호 선수에게 한 방을 맞긴 했지만 역시 정태양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절대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각오로 한 구 한 구 전력을 다해 던지고 있습니다! 볼 카운트 원 볼 투 스트라이크!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입니다


- 여기서는 판단을 잘 해야 해요. 배트에 맞춘다고 능사가 아니거든요. 3루에 있는 백호가 야구초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어정쩡한 타구로는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일 수가 없어요. 확실한 타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사는 목표가 있을 것이다.


내 목표는 이 저주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정말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


그럼 정우진, 저 사람의 목표는 뭘까, 어차피 몇 달 후면 야구를 그만둘 사람이 왜 저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하는 걸까. 야구 따위가 뭐라고.


어쨌든 정우진에게 안타나 희생플라이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정태양의 공이 너무 좋다. 구위만 놓고 보면 지난 번 만난 오지석보다도 위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역시 이것뿐겠지.


스륵


도루의 첫 번째 조건은 타이밍이다. 지금처럼 주자가 3루에 있을 때는 보크를 두려워하는 투수의 심리도 이용해먹을 수 있다.


정태양의 투구가 시작되었다. 그의 동작이 아주 잠깐 멈추는 순간, 그 0.01초의 타이밍,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타트를 끊었다.


투수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지만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전력을 다해 홈으로 공을 던질 수밖에.


당황한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던 그때 이미 나는 홈플레이트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안 돼! 막아!”


상대 덕아웃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바뀌는 건 없다.


상황을 파악한 정우진이 헛스윙을 해줬고, 그것이 상대 포수의 다음 플레이를 방해했다.


뒤늦게 포수의 미트가 날아왔지만 이미 내 손이 홈플레이트를 짚은 후였다.


부웅


“세이프! 세이프!”


“우아아아아!”


- 홈스틸! 홈스틸입니다! 정우진 선수가 삼진을 당했지만, 그 사이 3루 주자가 홈으로 파고들며 1대 0! 1대 0! 청진고가 먼저 한 점을 선취합니다! 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여기서 홈스틸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 와... 이제는 정말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요.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야구를 시작한 선수가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요? 하하, 하하하


전광판의 숫자가 0에서 1로 바뀌고, 경기장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다.


유니폼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대 선수들의 분한 표정, 허탈한 한숨, 관중들의 함성과 동료들의 고함소리가 그라운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 어딘가가 간질거린다.


내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실감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백호! 최고다!”


“백호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내게 걸린 저주가 풀린다면,


그래서 이 빌어먹을 야구를 때려 칠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나는 무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순간이 올까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말

편집을 하다보니 10,000자가 넘어버렸습니다.


두 편에 나가야 할 분량인데 내용상 한 편에 꼭 담고 싶어 그냥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연참이라 생각하고 맛있게 드셔주시길.


아, 참고로 현재 국내 고교야구에서는 선택적 지명타자제도가 시행 중인데 이번 작에서는 독자 여러분들이 헛갈리시지 않도록 지명타자 제도는 없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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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천재투수가 메이저리그를 찢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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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032화. 청진고 NEW +23 21시간 전 4,040 221 15쪽
32 031화. 그 인터넷이라는 거 나도 좀... +22 24.09.16 5,769 226 18쪽
31 030화.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되거라 +20 24.09.15 6,463 234 14쪽
30 029화. 이대로 돌아가라고? +15 24.09.14 7,127 240 19쪽
29 028화. 못할 일 같은 건 없다 +25 24.09.13 7,425 246 17쪽
28 027화. ...하기 딱 좋은 날씨네 +31 24.09.12 7,639 268 16쪽
27 026화. 피해라 +18 24.09.11 7,790 231 12쪽
26 025화. 애송이들 +24 24.09.10 8,119 236 21쪽
25 024화. 웃고 있는 거 맞지? +20 24.09.09 8,185 250 17쪽
24 023화. 동영상 강의 참조해서... +21 24.09.08 8,375 235 14쪽
23 022화. 구원투수 +12 24.09.07 8,597 217 13쪽
22 021화. 한 번 해보자고 +21 24.09.06 9,006 221 19쪽
21 020화. 박살 +15 24.09.05 9,050 266 16쪽
20 019화. 더! 더! 더! +24 24.09.04 9,121 273 18쪽
19 018화. 약속대로 박살내주지 +23 24.09.03 9,055 242 19쪽
18 017화. 팔꿈치를 붙여야 +16 24.09.02 9,016 259 17쪽
17 016화.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16 24.09.01 9,205 239 17쪽
» 015화. 기대, 그리고 두려움 +25 24.08.31 9,593 245 25쪽
15 014화. 해보려 한다 +23 24.08.30 9,492 235 18쪽
14 013화. 보는 눈의 차이 +26 24.08.29 9,562 244 14쪽
13 012화. 삼대장 +23 24.08.28 9,747 252 17쪽
12 011화. 나는 행복합니다 +24 24.08.27 9,766 247 15쪽
11 010화. 백호 등장 +21 24.08.26 9,764 275 17쪽
10 009화. 그냥 제가 치겠습니다 +27 24.08.25 9,757 234 16쪽
9 008화. 주말리그 개막 +17 24.08.24 9,837 237 14쪽
8 007화. 내가 터트려준다고 +18 24.08.23 9,940 225 13쪽
7 006화. 너 진짜 야구 안 할 거야? +12 24.08.22 10,346 215 13쪽
6 005화. 이번 삶은 흥미롭다 +16 24.08.21 10,904 214 14쪽
5 004화. 청진고 야구부 +15 24.08.20 11,423 229 14쪽
4 003화. 인터넷 보고 배웠는데요 +14 24.08.20 11,818 239 16쪽
3 002화. 분노라는 감정 +15 24.08.19 12,734 248 14쪽
2 001화. 그걸 왜 이제 말해주는 건데! +83 24.08.19 14,266 338 20쪽
1 000화. 프롤로그 +17 24.08.19 15,589 236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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