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천재투수가 메이저리그를 찢음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스포츠, 현대판타지

새글

단팥빵소년
작품등록일 :
2024.08.18 10:03
최근연재일 :
2024.09.17 11:20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308,707
추천수 :
8,020
글자수 :
239,602

작성
24.08.30 11:20
조회
9,495
추천
235
글자
18쪽

014화. 해보려 한다

DUMMY

따아악!


“아웃!”


- 아! 아깝습니다! 백호 선수가 친 타구가 펜스 바로 앞에서 중견수에게 잡혔습니다! 한 점 더 달아날 기회가 무산됩니다!


뭐, 칠 때마다 매번 넘길 수 있다면 내가 이 고생을 안 해도 됐겠지.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되고 덕아웃으로 들어서는데 박정진 선배가 욕망 가득한, 불자답지 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백호야, 나 그 배트 한 번만 빌려 쓰면 안 될까? 혹시 부러지면 새 걸로 갚을게.”


“네, 쓰세요.”


“고맙다.”


내가 쓰는 배트는 860g짜리다. 현역시절, 그러니까 회귀하기 전 빅리그에서 사용하던 920g에 비하면 많이 가볍지만, 현재 이 육체에는 딱 적합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고등학생이 쓰기에는 무겁다. 저 사람만 빼고 말이다.


부웅


“감 좋은데, 진짜 잘 쓸게.”


“별 말씀을.”


“부처님의 자비가 그대 위에 내려앉길.”


합장을 하며 타석으로 향하는 예비 승려 박정진 선배,


9회 초 우리 팀의 공격, 스코어는 여전히 1대 0으로 우리가 한 점을 앞서 있다.


지금 부원들과 감독이 내 눈치를 자꾸 보는 건 오늘까지 두 경기를 치르면서 팀이 낸 득점이라고는 내 홈런 두 방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상관없다.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고,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부우웅


“스트라이크!”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스윙 하나는 진짜 시원하다. 프로에서도 거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스윙이다. 배트 스피드 역시 상당한 편이다.


그런 박정진이 고등학교 투수의 공에 고전하는 건 역시나 선구안 문제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패스트볼과 떨어지는 공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뻐엉


“볼.”


방금 공도 참았다기보다는 그냥 배트를 못 낸 것뿐이다.


뾰족한 방법은 없다. 타자에게 필요한 재능 중 가장 선천적이고, 그렇기에 성장시키기 가장 힘든 게 바로 선구안이다. 타고난 선구안이 없는 선수가 훈련과 경험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옆에서 조언 몇 마디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뻐엉


“스트라이크!”


오늘 내가 기록한 안타는 첫 타석의 홈런 한 방이 전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타석은 자동고의사구로 출루했고, 방금 마지막 타석에서는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 당했다.


아, 자신의 공에 엄청난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상대 선발 오지석은 7회 제한 투구 수에 걸려 교체된 후 덕아웃의 음료수통을 박살내는 추태를 벌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학교 측의 징계를 받아야겠지만, 글쎄, 저 팀이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어쨌든 상대 에이스가 내려갔음에도 우리 팀 타자들의 빈공은 여전하다.


괜찮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건 내 멘탈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딱!


“파울!”


오늘 투구를 복기해본다.


지난 번 경기와 다르게 조금 더 요령을 부려보았다. 투구 수를 아끼기 위해 맞춰 잡기 위주의 투구를 해봤는데 제법 잘 먹혀들었다.


전 이닝까지 내가 던진 공의 개수는 85개, 제한 투구 수까지는 20개나 남았다. 이 정도면 한 이닝을 막아내는데 충분한 숫자다.


하지만 그게 승리를 의미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겨우 1점 차다. 아무리 나라 해도 불의의 일격을 당할 수 있다. 눈 감고 휘두른 배트에 공이 걸리면 넘어가는 거다.


전성기 때의 나라면 그런 사고 역시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했겠지만... 이제 막 시동을 건 이 허접한 몸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어쨌든 만에 하나, 다음 이닝에서 내가 점수를 내줘 동점이 되면...


뭐, 그럼 지는 거지.


“청진고 파이팅! 청진고! 파이이이팅!”


“박정진! 박정진! 박정진!”


급조된 응원단도 꽤나 열심이다. 경기 내내 쉬지 않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이 거지같은 저주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면 누가 시켰든 절대 저런 짓은 안 했을 것 같다. 일요일, 황금 같은 오후에 땀내 풀풀 나는 운동장에서 흙먼지 맡아가며 야구 경기를 응원하는 일 같은 거 말이다.


파란 하늘, 땀 흘리는 청춘, 눈물과 감동의 고교야구,


저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야구를 해온 내게 그런 말랑말랑한 감성은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파앙


“볼.”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떨어지는 공에 약점이 있는 타자가 4번에 기용되었다는 건 풀어서 말하면 빠른 공에는 나름 강점이 있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 기대감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소리쳐줬다.


“박정진 선배님! 파이팅!”


갑작스러운 내 응원에 옆에 있던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특히나 강유찬의 표정은 꽤나 볼만 했다.


“웬 일이래. 야구하는 로봇인줄 알았는데, 감정 기능도 있나봐?”


“자꾸 헛소리하면 커터 수업은 중단이야.”


“넵! 입 닫겠습니다. 음료수라도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그냥 물로.”


“오케이!”


우리 사이 오고가는 만담에 선배들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바람직한 분위기다. 다른 학교 같았으면 1학년이 어디서 건방을 떠냐고 지랄하거나, 혹은 뒤에서 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학교 선배들에게는 그런 권위의식이 전혀 없다. 어차피 직업 야구선수가 될 생각이 없기에 나오는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냥 사람 자체가 좋다. 야구부를 모집할 때 실력이 아니라 인성을 먼저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백호야, 미안하다. 내가 아까 안타를 쳤어야 했는데.”


“아뇨, 주장. 괜찮아요.”


혹은 이 사람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나본 가장 올곧고 정직한 사람, 청진고 야구부 주장 정우진.


쯧,


원래는 이기든 지든 신경 안 쓸 생각이었는데, 이 사람을 보니 갑자기 지기 싫다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박정진 선배님! 파이팅!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두 번째 파이팅을 외친 바로 다음 순간,


슈웅


상대 투수가 던진 141km/h 포심이 존 한복판에 몰렸고,


박정진의 개잡는 스윙이 그 공을 강타했다.


따아아아악!


“우아아아아아-!”


- 갑니다! 갑니다! 넘어갔습니다! 아, 시원한 홈런이 나왔네요! 좌측 외야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커다란 홈런! 박정진 선수의 체격만큼이나 거대한 홈런입니다! 정말 좋아하네요! 배트에 입을 맞추며 펄쩍펄쩍 뛰는 박정진 선수! 청진고가 드디어 두 번째 득점을 올렸습니다! 스코어 2대 0! 중부권역 최약체 청진고가 청주중앙고에 이어 대전대부설고까지 잡아낼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아아! 홈런이다! 백호야! 이 배트 진짜... 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베이스를 도는 내내 온 몸을 비틀며 펄떡거리던 박정진 선배가 상대 포수에게 합장을 하더니 내가 준 배트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음,


아무래도 저 배트 돌려받긴 틀린 것 같은데.


됐다.


배트 한 자루 정도야, 절에 기부한 셈 치지 뭐.


그나저나 날씨 한 번 기가 막히네.


이 빌어먹을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게 너무 아까울 정도로 말이지.


**


<고교야구에 부는 새로운 바람, 청진고 1학년 백호... 두 경기 연속 완봉승, 거기에 결승 홈런까지>


<156km/h를 던지는 고등학교 1학년생의 등장에 프로야구계도 깜짝>


<경기를 지켜본 KBO 스카우트 “정말 멋진 선수가 등장했다. 프로에 입단해 폼을 조금 다듬고 구속보다는 제구력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면 곧바로 1군 주전으로도 뛸 수 있을 것 같다”>


<LA다저스 스카우트 케빈 더글라스 “어쩌면 오랜만에 빅리그에 직행할 한국인 투수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 의미심장한 발언>


<청주중앙고에 이어 대전대부설고까지 연파한 청진고, 다음 상대는 청각장애인 학생들로 구성된 충주성진학교, 조심스레 점쳐보는 청진고의 3연승 가능성>


“흠.”


아마도 제구 어쩌구 저 말을 한 건 부산 스카우트일 거다. 예전에도 그랬다. 탬퍼링이 무섭지도 않은지 불쑥불쑥 찾아와 타이탄즈에 입단하면 최고의 코치를 붙여서 리그 최고의 에이스로 만들어주겠다고 떠들어댔었지. 그 코치는 세상이 다 아는 제구력 우선주의에 포크볼 성애자고.


어쨌든 내가 신경쓸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저 다저스 스카우트 쪽이 진짜다.


케빈 더글라스, 다저스 극동 아시아 지역 파트장이 왜 한국 고교야구 경기장에 와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정말 잘 된 일이다. 저 양반이 저런 멘트를 해줬으니 이제 다른 빅리그 구단들도 내게 관심을 갖게 될 거다.


물론 진짜 중요한 건 다른 구단들이 아니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관심이긴 한데...


어디, 걔들은 요즘 어떻게 사는지 한 번 볼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충격의 11연패>


<출구가 안 보이는 타이거즈, 사실상 붕괴된 중심타선>


<대체 언제까지 탱킹만 할 것인가, 타이거즈 팬들 분노>


<미국 금융계에 돌고 있는 타이거즈 파산 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됐다.


그만 보자.


스마트폰을 닫고 집으로 가려는데,


<발신자 : 엄마>


이 시간에 갑자기 전화를 하신 걸 보니 드디어 보신 모양이다.


자, 좁은 빌라에서 벗어나 깨끗한 집으로 이사 갈 시간이다.


**


집에 도착해 손발을 벌벌 떨고 있는 어머니를 진정시켜드리고,


복권 당첨, 그것도 28억이나 되는 돈을 독식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도장 문을 닫고 달려온 아버지에게 상황을 설명 드리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하루 쉰다고 연락하고, 다 같이 농협은행 본점으로 달려가 세금 9억2천... 쯧, 매번 느끼지만 진짜 많이도 떼네. 어쨌든 세금을 뺀 18억8천만 원을 받아 예금으로 전환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이틀 만에 진행되었다. 무술도장을 운영하는 가장과 마트 아르바이트를 하는 부인, 돈 먹는 기계인 고등학교 야구부 아들로 구성된 평범한 서민 가정에 생각지도 못한 거액이 떨어진 것이다.


아마 다른 집 같았으면 이 혼란이 좀 더 오래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확실히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무리 회귀를 반복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당첨금을 수령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시 방에서 쉬고 있는데 그새 생각을 정리한 아버지가 날 부르셨다.


“백호야, 난 솔직히 아직도 이게 꿈이지 싶다.”


“꿈 아니에요.”


“그렇지. 아니지. 이것 참...”


잠시 입맛을 다시던 아버지가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여셨다.


“좋아, 일단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자. 복권 사자고 한 것도 너고, 번호도 네가 골랐고, 심지어 돈도 네 돈이었다고? 엄마는 그냥 대신 사준 것뿐이고?”


“제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어차피 용돈이었으니 엄마가 주신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번 넘어간 돈은 그 사람 돈이야. 어쨌든 정리하자면 그 로또는 네 거고, 당첨금도 모두 네 거다.”


그래, 그러실 줄 알았다. 언제나 이러셨으니까.


“아뇨, 당첨금은 두 분이 알아서 쓰세요.”


“아니, 그건 안 될 말이지. 백호, 대답해봐. 우리 집 가훈이 뭐냐.”


“가족들끼리도 돈 문제는 철저하게, 절대 남의 돈에 탐 내지 말 것.”


“잘 아네. 그러니 이 돈은 네 꺼다.”


“알겠습니다. 이해했어요.”


“그래, 이 돈 없어도 우리는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없다. 그러니까 이건 잘 묻어뒀다가 너 독립할 때, 그리고 결혼할 때 쓰는 걸로 하자. 아이도 낳고 그러려면 넓은 집이 필요할 텐데 정말 잘 됐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제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 마음도 들지를 않아요.


굳이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면 양자라도 들여볼게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마음 속 이야기를 눌러 삼키며 대답했다.


“아뇨, 돈 주인이 됐으니 쓰는 것도 제 마음대로 해야죠. 사실 생각해둔 바가 있거든요.”


“...그래? 고등학생이 이 큰 돈을 어떻게 쓸지 생각해뒀다고?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일단 우리 집 이사부터 가요. 여기 전세 만기 얼마 안 남았잖아요.”


“이사? 그게 무슨 소리냐. 안 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돈은 네 돈...”


“알았다니까요. 누가 아버지 사드린대요? 제 명의로 살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가요. 잠시만요, 제가 어머니 모시고 나올게요.”


어리둥절해하는 부모님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가는 도중에 아버지의 낡은 학원봉고차가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다행이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작은 전원주택단지 입구 앞에 미리 약속 잡아둔 부동산 중개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유, 일가족이 다 같이 오셨네. 보기 좋아요!”


“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백호야. 여긴 어디니? 왜 온 거야?”


“예전부터 봐둔 집이에요. 일단 들어가요. 가서 얘기해요.”


로또를 살 타이밍에 맞춰 미리 부동산 매물을 검색해봤다.


내 몇 번째 삶이었던가, 어머니가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반하신, 저런 아담한 단독주택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구나 했던 집이 마침 매물로 나와 있었다.


그 시절의 난 그 말을 듣고 그냥 흘려 넘겼다. 대신 내가 마음대로 고른, 비싼 아파트에 두 분을 살게 해드렸다.


내 딴에는 제일 비싸고, 화려하고 보안도 좋은 집이기에 고른 곳이지만 부모님은 그 집을 많이 답답해하셨다. 하지만 계속되는 회귀에 지친 내게는 그런 걸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습관처럼 회귀 때마다 그 짓을 반복했다.


“이 집이에요. 딱 단지 중앙이라 너무 외롭지도 않고, 옆에 집 분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거든요. 이쪽에는 대학교수님이 사시고, 저쪽에는... 어머, 사모님. 정원에서 눈을 못 떼시네. 예쁘죠? 여기 전 주인분이 꽃을 좋아하셔서.”


“네, 예쁘네요, 정말로.”


이제는 안다. 그게 정답이 아니었다는 걸.


행복의 기준은 집의 평수, 차의 크기, 가진 돈의 금액이 아니라는 걸.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지지만 그렇다고 돈만 있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인간은 행복해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반복되는 삶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버지, 어머니.”


“응?”


“저 이 집 살게요. 제 명의로 계약해주세요.”


“응? 집을 이런 식으로 산다고?”


“네, 제 돈이니까요. 사장님, 바로 계약금 보내드릴게요. 집은 비어있는 거죠?”


“어휴, 그럼요. 내일이라도 당장 이사 오셔도 돼요. 어머님, 좋으시겠다. 아들이 젊어 보이는데 능력자인가봐요. 이런 멋진 집을 선물해드리고! 행복하시겠어!”


“백호야, 이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집을 이렇게 갑자기 사는 건...”


“아뇨, 제 돈이라고 하셨으니 제 마음대로 쓸 거예요. 아까 한 말씀 뒤집으실 거면 그냥 그 돈 두 분이 가지세요. 대신 이 집 하나만 저 사주세요. 나중에 어른 돼서 독립할 때 여기서 살고 싶거든요.”


“......”


무슨 일인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부동산 중개인을 가운데 두고 한참 동안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아버지는 한 번 자신이 내뱉은 말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또 당첨금은 내 돈이었고, 그 돈에 대한 권리는 내게 있었다.


결국 대화의 승자는 나였다는 뜻이다.


“백호야, 아무리 그래도...”


“됐어, 여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사자고. 어차피 백호 명의로 하는 거니까 아들 돈 뺏는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도 당신 단독주택 한 번 살아보고 싶다며. 너무 크지도 않고, 동네도 좋고, 학교나 도장하고도 멀지 않고, 그래, 좋네. 저 녀석 결혼할 때까지만 여기서 신세 좀 지지, 뭐.”


“잘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


“응? 왜?”


“여기 계약하고 나면 저랑 같이 자동차 대리점 좀 가요.”


“자동차? 차는 왜?”


“차도 한 대 사두려고요.”


“갑자기 뭔 차를 사. 아직 면허도 못 따는 놈이.”


“면허 따기 전에는 아버지가 쓰고 계시면 되겠네요. 어차피 저 봉고, 이제 보내줄 때 됐잖아요.”


“......”


잠깐 넋이 나가있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당황한 얼굴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웃자 아버지도 따라 웃으셨다. 그렇게 두 분의 웃음이 점점 더 커졌다.


저렇게 활짝 웃는 어머니를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인 것 같다.


어쩌면 그 이유 모를 우울증이 다시 도질 수도 있지만... 그때는 담임선생의 조언처럼 철없는 아들을 연기해볼 생각이다.


“그런데 사장님, 이쪽은 뭔가요?”


“아, 거기요? 사모님이 역시 꼼꼼하시네요. 이게요, 원래는 텃밭처럼 쓰던 공간인데 비닐하우스를 씌워서...”


오랜만에 웃음이 돌아온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행복해지긴 틀린 몸이다.


지난 200년 간 겪었던 그 기억들이 남아 있는 한 내가 행복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회귀의 저주에서 벗어나도 마찬가지일 거다. 나는 이 길의 끝에 만족이나 행복이 아닌 처절할 정도로 바싹 말라비틀어진 허무함만이 있다는 걸 이미 경험했다.


그렇기에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아니, 행복이라는 감정의 끄트머리에라도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스스로가 아닌, 내 주변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내 주변이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면,


만약 그렇게 되면,


어쩌면 나도 아주 조금이나마 행복이 뭐였는지 떠올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좀 더 사람에 가까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보! 당신도 여기 좀 와 봐요! 빨리요!”


“응? 왜?”


“여기 너무 예쁘죠? 안 그래요?”


쉬운 일은 아니겠지.


행복이 뭔지조차 모르는 나 같은 놈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애초에 말이나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지금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노력해볼 생각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볼 생각이다.


그것이 내 목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추게 만들더라도,


한 번 해보려 한다.


“아버지, 어머니.”


“응? 왜, 아들?”


“...아니에요, 아무 것도.”


“녀석, 싱겁긴.”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괴물 천재투수가 메이저리그를 찢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3 032화. 청진고 NEW +23 21시간 전 4,053 222 15쪽
32 031화. 그 인터넷이라는 거 나도 좀... +22 24.09.16 5,776 226 18쪽
31 030화.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되거라 +20 24.09.15 6,465 234 14쪽
30 029화. 이대로 돌아가라고? +15 24.09.14 7,131 240 19쪽
29 028화. 못할 일 같은 건 없다 +25 24.09.13 7,432 246 17쪽
28 027화. ...하기 딱 좋은 날씨네 +31 24.09.12 7,645 268 16쪽
27 026화. 피해라 +18 24.09.11 7,792 231 12쪽
26 025화. 애송이들 +24 24.09.10 8,129 236 21쪽
25 024화. 웃고 있는 거 맞지? +20 24.09.09 8,192 252 17쪽
24 023화. 동영상 강의 참조해서... +21 24.09.08 8,378 235 14쪽
23 022화. 구원투수 +12 24.09.07 8,603 217 13쪽
22 021화. 한 번 해보자고 +21 24.09.06 9,009 221 19쪽
21 020화. 박살 +15 24.09.05 9,052 266 16쪽
20 019화. 더! 더! 더! +24 24.09.04 9,124 273 18쪽
19 018화. 약속대로 박살내주지 +23 24.09.03 9,058 242 19쪽
18 017화. 팔꿈치를 붙여야 +16 24.09.02 9,024 259 17쪽
17 016화.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16 24.09.01 9,214 239 17쪽
16 015화. 기대, 그리고 두려움 +25 24.08.31 9,600 245 25쪽
» 014화. 해보려 한다 +23 24.08.30 9,496 235 18쪽
14 013화. 보는 눈의 차이 +26 24.08.29 9,568 244 14쪽
13 012화. 삼대장 +23 24.08.28 9,750 252 17쪽
12 011화. 나는 행복합니다 +24 24.08.27 9,770 247 15쪽
11 010화. 백호 등장 +21 24.08.26 9,768 275 17쪽
10 009화. 그냥 제가 치겠습니다 +27 24.08.25 9,763 234 16쪽
9 008화. 주말리그 개막 +17 24.08.24 9,841 237 14쪽
8 007화. 내가 터트려준다고 +18 24.08.23 9,946 225 13쪽
7 006화. 너 진짜 야구 안 할 거야? +12 24.08.22 10,351 215 13쪽
6 005화. 이번 삶은 흥미롭다 +16 24.08.21 10,914 214 14쪽
5 004화. 청진고 야구부 +15 24.08.20 11,430 229 14쪽
4 003화. 인터넷 보고 배웠는데요 +14 24.08.20 11,823 239 16쪽
3 002화. 분노라는 감정 +15 24.08.19 12,740 248 14쪽
2 001화. 그걸 왜 이제 말해주는 건데! +83 24.08.19 14,275 338 20쪽
1 000화. 프롤로그 +17 24.08.19 15,597 236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