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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DUMMY

처음 로우힐에 왔을 때, 그때의 어리바리한 누리는 없었다.

핏빛에 물든 공포의 기사만 하나 있을 뿐.


도시의 권력자들과 대화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마치 목숨을 취하러 온 사신 대하듯, 탈레스를 맞이했다.


“일단 제일 좋은 방이랑 목욕물 준비해. 좀 길게 씻으니까 물 좀 넉넉히 퍼와.”

“고기 하나도 통으로 구워서 가지고 와.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음식은 계속 날라.”


탈레스는 이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시했다.

비누, 면도칼, 몸 닦을 수건하고 뭐 좀 읽을거리까지.

조금 노닥거릴 생각이었으니까.


“뒷수습은 알아서 하고, 나 좀 쉬고 이 도시에서 깽판 칠 일이 좀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둬.”


로우힐의 세력가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탈레스의 명에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싸움은커녕, 일방적으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신으로 자신들을 말려 죽이던 적을 격파한 기사였으니까.

이놈이 수틀리면 리자드맨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 기사가 원래 이랬다.

좀 세거나 뭉쳐서 다니면 돈 내놔, 해도 줘야 한다.

물론 범죄자들처럼 협박하지 않는다.

부드럽게 하지.


예를 들어 우린 이런 기사단인데 후원 좀 해주겠소, 하고.

안 들어주면 뭐, 예상과 같이.

범죄자에 비하면 말은 부드럽다.

싸움도 훨씬 더 잘하고.


로우힐 암흑가는 뭣 하면 법으로 혹은 사병을 이용해 개인적으로도 족칠 수 있지만 수준 있는 기사는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법보다 주먹의 가까움을 아는 로우힐의 정치가들은 탈레스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탈레스는 가득 차려진 음식을 실컷 먹고 나서, 한참 씻었다.

물을 퍼다 나르는 건 조그만 아이들이었는데 죄다 못 먹었는지 마르고 힘이 없어 보였다.

탈레스의 원래 계획은 많은 물을 쓰는 거였지만, 괜히 미안해서 그냥 있는 걸 재활용했다.


사람 셋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크고 푹신한 침대에서 하루 푹 잔 탈레스는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식사와 함께 로우힐의 권력가들과 대화도 좀 나눴고.


“너네도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줘야지. 루시드로 지원 갈 병력 좀 추려. 범죄자들도 죄다 징집하고.”

“출발은 이틀 뒤. 최대한 빠르게 출정 준비해.”


탈레스는 협박을 반쯤 담아 로우힐의 병력 차출을 요구했고, 그들은 억지로 따랐다.

그의 말대로 루시드가 무너지면 여기도 금방이니.

애초에 탈레스가 오지 않았으면 그냥 썰렸을 도시였다.

무능한 이 귀족들은 도시의 병사를 성 방어에 투입하고, 중장보병, 그러니까 도시의 병사보다 훨씬 질 좋은 개인 병사들은 그냥 호위로만 썼다.


바깥이 무너지면 끝이란 걸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탈레스의 요구는 이뤄졌다.

로우힐의 권력자들은 사병 조금과 징집병 다수를 파병하기로 약속했다.


‘하여튼 새끼들. 지껀 더럽게 안 줄려고 하네. 도시 공용 자산만 냅다 쓰고.’


탈레스는 조금 아쉬움을 삼켰다.

그냥 봐도 귀족 사병이 훨씬 강해 보였다.

여기 로우힐 군인, 혹은 새로 징집할 사람이라 해봐야 약에 찌들거나 몸 약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혼자 가는 거보다야 당연히 나은 데다, 성이 함락 위기여도 자기 사병은 끝까지 안 쓴 이놈들을 보면 이것도 감지덕지다.

성벽 위, 성문 입구에 허술한 무장으로 죽은 시체가 얼마나 많았던가.


탈레스는 식사와 회담 자리를 마친 후 몸을 움직였다.

예전 딘이 만든 회식 자리를 따라가며 본 적 있는, 이곳 범죄자들의 꿈의 건물로.

브로디의 5층짜리 종합세트 건물 말이다.


쾅 -


탈레스는 입구에 서 있는 둘의 칼잡이를 밀어서 넘어뜨리고 문을 발로 찼다.

당연하지만 브로디 조직원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리자드맨이 공격할 땐 그거 들고 숨었냐. 한심한 놈들.”


탈레스는 달려드는 조직원의 칼날을 맨손으로 잡아 부러뜨리고 그놈을 뭉친 적들에게 던졌다.

그들은 오만 집기를 박살 내며 넘어졌고.


“뭐 하는 놈이지? 머피 연합의 부하냐?”


새까만 옷을 걸치고 입에 시가 하나를 문 남자가 2층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저음의 목소리가 카리스마를 풍겼고, 조직원들은 일제히 그자가 가는 길을 비켰다.


“네가 브로디야? 우리 대화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탈레스는 걸어가며 손에 잡히는 사람 족족 던졌다.

그들은 벽에 쳐박히고, 천장과 바닥에도 박혔다.

칼을 들고 덤비려는 자는 이제 없었다.


벌써 열명도 넘게 날아갔으니까.

애초에 맨손으로 칼을 부러뜨리는 사람하고 싸울 용기 있는 자는 여기 없었다.

있으면 진작에 리자드맨하고 싸우러 갔겠지.


탈레스는 거칠게 브로디를 끌어 바닥에 가볍게, 아주 가볍게 세 번 찍었다.

목소리 깔면서 나오는 거 자체가 맘에 안 들었다.

합법적인 깡패한테 어디 불법 따위가.


“잠깐! 잠깐, 말로, 말로 합시다. 돈이라면 충분히 있소. 협상, 협상을 원하오! 달라는 건 다 주겠소!”


브로디는 얼굴이 피멍이 든 채로 외쳤다.

탈레스는 이제야 대화할 맘이 드냐며 의자에 앉혔고.

온순해진 브로디와 그의 부하들은 다소곳하게 무릎 꿇고 앉았다.


탈레스는 질문을 하나씩 던졌다.

브로디는 그거에 따라 대답했는데, 답변이 미흡할 때마다 그의 몸 어딘가가 부서지거나 그의 조직원이 죽었다.


“뭔 홍철 없는 홍철 팀도 아니고. 머피 뒤진 머피 연합군은 뭐야.”

“그레이에 대해 아는 건 그게 다야? 확실해?”

“노예 사냥하는 애들이 그게 전부라고? 나 잡으러 온 놈만 해도 다섯 넘었던 거 같은데.”

“흠, 그리고 너희 조직원 몇이나 되냐?”


탈레스는 맘에 안 들었던 예전 것부터, 지금 할 일까지 모두 캐물었다.

브로디가 모든 걸 아는 건 아녔지만, 중요 인물답게 정보는 많았다.

좀 아니다 싶을 땐, 몇 번 쥐어박으면 제대로 된 대답이 나왔고.


우선 브로디에 의하면 딘이 뿌려놓은 투쟁의 씨앗이 커져 있었다.

브로디와 반 브로디 연합, 이미 뒤진 머피의 이름을 내세운 연합군이 브로디와 피 터지게 싸우고, 귀족 가문들은 그걸 대리전으로 이용했다.

내전 대신.

가문이 직접 부딪치면 피해가 크니, 부리는 범죄 길드로 우위를 점하려는 그런 의도였다.


마약 원료가 주로 유통되는 곳이니 보이는 것뿐 아니라, 암흑가의 힘도 중요했으니.

로우힐은 시그나 연합에서 금하는 건 지키는 척하고, 필요에 따라 불법적인 일도 해줄 인원이 필요했다.


이런 로우힐의 귀족 가문들은 대체로 마약 원료를 재배해 큰돈을 만졌는데, 그래서 이곳의 귀족 가문은 재배하는 원료에 따라 ‘~가든’으로 많이 불렸다.

탈레스가 보기에 마약 원료나 키우면서 ‘가든’이란 이름을 붙이는 게 가당찮았지만.


탈레스는 다음으로 그레이의 과거와 어떻게 굴렸는지, 그리고 그의 지하 격투 매니져, 암흑가 결투 체육관 바지 사장을 끌고 올 것을 명령했다.

명은 재빠르게 이행되었고.


“그러니까 강가에 버려져 있었는데, 물건만 강탈하려다 깨어나서 데리고 오게 되었다 이거지?”


삐죽하게 생긴 바지 사장의 말은 중구난방이었다.

그래도 차분히 정리하자면, 우선 그레이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었다.

그는 이름도, 출신지도, 가족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이었으니까.


삐죽이 놈은 어느 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기사 하나를 보고 갑옷과 검, 그리고 그의 물품을 훔치려 품을 뒤졌다.

근데 그 와중에 그가 깨어나 물을 달라고 외쳤고 얼떨결에 물을 주고 은인이 되었다나.

멋대로 오해한 모양인데 일이 삐죽이 놈은 그걸 잘 이용한 것 같았다.


“야, 시발. 그만큼 벌어다 주면 좀 잘 대접 해줬어야 하는 거 아냐?”


탈레스는 괜히 한대 걷어차며 말했다.

대충 들어보니, 그 기사는 생각보다 강했고 이놈을 이용하려 했으나 싸움을 잘 도와주진 않았다고.

다만 정식 도전하는 자들은 싸워주었다던데, 그래서 그 성격을 이용한 게 지하 격투장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브로디에 충성하는 바지 사장 놈은 그레이를 이용했다.


그레이에 호기심이 아직 남은 탈레스는 그의 물품들을 모두 가져올 것을 명했으나, 이미 전부 다 팔고 남은 게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나.


탈레스는 얼추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틀 뒤 출병할 인원을 추릴 것을 명했다.

그리고 노예 사냥도 금했고.


“브로디. 범죄자도 영웅이 될 기회야. 내 손에 죽던지, 싫으면 적당히 인원 좀 보내. 머피 연합군보다 적으면...알지?”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곳에 돌아왔을 때, 노예로 팔린 여자가 창관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소매치기로, 남자들이 탄광에 보내진다면 너희들 목숨은 없어.”

“약쟁이 사업은 뭐라 안 할게. 노예 매매는 그만둬.”


탈레스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범죄 자체를 없애기 힘든 건 안다.

근데 노예는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몸으로 직접 보고 겪은 노예 생활은 정말로.


말을 마친 탈레스는 머피 연합군이 모인다는 건물로 향했다.

예전 머피의 투기장 근방이었다.

거기서도 브로디에게 행한 걸 똑같이 되풀이했다.


다만 조직이 연합한 거다 보니, 하나씩 찾아가며 부수어야 하는 경우도 좀 있어 시간이 조금 걸렸다.

브로디 측은 하나만 조지면 되는데 이들은 수뇌부가 여럿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놀랄만한 새로운 정보는 없었지만, 그린가든에 보상을 타 먹을 만한 이야기도 하나 들었다.

딘과 일했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딘과 함께 그린 가든 셋째 아들을 납치하고 죽인 뒤 파묻었다는 것이다.

탈레스는 그놈을 그린 가든에 인계하고 시신 위치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사병 지원을 조금 더 받기로 했다.


‘하여튼 딘 진짜 냉정한 놈이네. 저놈도 운 진짜 좋았네.’


가든에 넘긴 그놈은 일이 끝나는 순간, 목에 칼이 박혔다고 했다.

근데 운이 좋았는지, 칼이 목걸이에 걸려 조금 덜 들어오고 식도도 빗겨나가 살았다나.

딘이 기절한 그가 죽은 줄 알고 떠나갔었다는데, 구조된 것도 그렇고, 깨어났을 때 딘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운을 많이 탄 놈이었다.


‘이제 없겠지만. 보니까 그린 가든에서 이를 지독하게 간 것 같던데. 동정은 안 하마.’


그린 가든은 셋째 아들을 열심히도 찾았던 모양이었다.

잘 생기고 재능도 뛰어나서 기대가 컸던 아들이었다고.

협박하다 수틀리니까 죽인 건지,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지만 목에 칼자국 난 저놈이 곱게 죽긴 글렀을 터였다.


탈레스는 이어서 그레이의 과거를 캤다.

대충 들어보니 암흑가 애들하곤 잘 어울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가 돌봤다는 아이들이 모인 골목으로 향했다.


탈레스는 비릿하고 썩은 내가 풍기는 주택가, 이따금 창문에서 똥물이 뿌려지고 바닥엔 마른 똥이 가득한 길을 지나서 큰 폐건물이 하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창고로 쓰였던 곳 같았는데, 지금은 노숙자나 갈 곳 없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듯했다.


“버니. 버니란 아이가 여기 있나?”


탈레스의 외침에 삐쩍 마른 아이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며 주변을 보니 전부 마르고 퀴퀴한 소녀와 아주 어린 남자아이들뿐이었는데, 아마 리자드맨 침입 때문에 건장한 남자와 소년들은 징집된 탓일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다 죽었을 거고.


탈레스는 삐쩍 마른 아이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며 그레이에 관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마법검에 대해서도.


그 아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아는 걸 이야기했다.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할아버지는 항상 저흴 챙겨주셨어요. 먹을 걸 사와 나눠주곤 하셨죠.”

“저희도 할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진 꽤 잘 지냈어요.”

“말씀은 별로 없으셨어요. 잠꼬대는 좀 하신 적 있지만.”


버니는 질문에 착실히 대답했고 탈레스는 괜히 찔렸다.

버니의 두 손이 날아간 이유가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생계를 위해 소매치기하다 걸려 날아간 거라니까.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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