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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DUMMY

양쪽 다 사슬 갑옷에, 철로 만들어진 투구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기동성 때문인지, 신발은 질긴 가죽으로 된 걸 껴입은 모양새였지만.

확실히 앞에 싸운 애들과 무장부터가 달랐다.


“이스마엘, 네가 훈련 시킨 애가 저기 금발 애야?”


탈레스의 질문에 이스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탈레스는 수중에 있던 동화와 은화를 다 털어 금발에게 걸었다.

베팅 시간이 끝나자, 양 선수가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싸움 전 금발이 환하게 웃으며 경기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격한 응원이 터져 나왔다.

반면 상대인 갈색빛 수염이 가득 난 남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잘 생겨서 인기가 좋다네. 우린 저 아이를 슈퍼스타로 만들 생각이야. 언젠가 아이온에도 출전시킬 거고.”


이스마엘은 장래의 계획을 탈레스에게 말해주었다.

들어보니 아이온이란 축제가 있는데, 시그나 연합의 전 도시 국가가 모여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거기선 현대의 올림픽처럼 도시 국가의 선수들이 나와 겨루는데, 명예와 보상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종목도 우리에게 좋네. 매번 한, 두 종목씩은 변경되는데, 판크라티온, 검투 경기, 전차 경기 등 인기 있는 건 빠진 적이 없거든.”


이스마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금발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인지.

부차적인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날카로운 찌르기와 치고 빠지기가 주특기라고.

지금 연승 중이라고.

이번 도박에서 이길 거라 장담하는 이스마엘과 대화를 나누는 중,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금발이었는데, 이스마엘의 말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며 펜싱처럼 검을 내질렀다.

상대는 크고 둥그스름한, 두꺼운 나무 방패와 플레일, 그러니까 나무 손잡이에 사슬로 연결된 철퇴 머리가 있는 그런 무기였다.

편곤, 도리깨와 같은 원리를 지닌 무기.


상대는 묵직한 방패만큼이나 우직하게 방어했다.

금발은 찌르고 빠졌다가 다시 날아들어 베는 등, 화려하게 움직였다.


갈색 수염 남자가 여기저기 움직이는 금발의 공격을 대부분 잘 방어했지만, 날카로운 찌르기를 모두 막을 순 없었다.

결국 어깨 쪽에서 피가 한 번 튀었고, 관중들은 환호했다.

그럴수록 금발은 더 빠르게 움직였고.


“여기선 생소한 무기라 긴장을 조금 했는데, 별것 없군 그래.”

“저 아이 무장을 갖추고 훈련 시키는 것에 내 전 재산을 다 썼어. 자네와 카이우스도 그렇고 난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네.”

“크게 될 아이야.”


이스마엘은 턱을 주억거리며 말했다.

관중석에선 또 환호가 터졌고.


맞기만 하던 갈색 수염 남자가 화가 났는지, 사슬 철퇴를 크게 휘둘렀고, 금발이 그걸 고개를 숙이며 들어가 다시 팔 쪽에 상처를 입혔다.

갈색 남자의 팔은 붉은 피로 물들었고.


금발은 재빠른 스텝으로 또 한 번 하단 찌르기를 한 후 빠졌다.

갈색 남자의 허벅지에 피가 흐르며 자세가 흔들릴 때, 금발은 관중석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응원을 불러일으켰고.


“저게 스타의 자질일세. 싸움에 집중을 잃지 않으면서도 환호를 끌어내는. 보통은 싸우느라 관중들까지 신경 쓰기가 쉽지 않지.”


이스마엘은 칭찬하기 바빴지만, 탈레스는 눈을 찌푸렸다.

지하 격투장 경험상, 승부가 끝날 때까진 모른다.

한참 투기장에 나가던 시절, 팔이 날아갔던 놈이 이로 사람 목을 물어 죽이는 것도 봤다.


그리고 사슬 철퇴의 무게가 상당해 보였는데, 가볍게 휘두르는 검과 원심력까지 담긴 철퇴의 위력이 같진 않을 터였다.

금발이 유효타를 많이 주긴 했어도 아직 상대가 기절할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린 것도 아니고, 사슬 갑옷 사이에 좀 긁힌 것뿐이다.

죽음을 각오한 투사들 사이에 저 정도 상처야.


물론 이 생각을 말하진 않았다.

이스마엘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실제로 싸움도 계속 금발에게 유리했다.


까 – 깡


경쾌한 충돌음과 갈색 남자의 중심이 무너졌다.

철 투구를 검으로 강하게 내리친 결과, 살짝 무릎이 꿇린 것이다.


금발은 마무리를 준비했다.

상대의 자세가 무너진 순간, 목이 드러난 순간, 바로 칼을 날려 끝내기 위해.


‘시도는 좋았어.’


아쉽게도 상대가 몸을 들이받아 미는 바람에, 마무리가 되진 않았다.

대신 상대는 방패를 바닥에 놔두고 왔다.

지금까지 검날을 막아주던 우직한 방패를.


‘찰나의 순간에 판단 좋았다. 거기서 방패 놔두고 안 밀었으면 목 날아갔을 거야.’


탈레스는 갈색 남자의 순간적인 판단을 감탄하며 경기를 계속 보았다.

금발은 몸이 밀리며 백스텝을 밟았다.

다시 한번 빠졌다 들어오면서 공격할 모양이었던 듯했다.


다만 그때 갈색 남자의 사슬 철퇴가 휘둘러졌는데, 문제는 이게 원심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냥 철퇴면 피했거나 검으로 막았을 것을, 원으로 빙글 한 바퀴 다 돌면서 금발의 옆 머리를 때렸으니까.


깡 -


금속 충돌음이 나면서 금발이 균형감각을 잃었는지 몸을 휘청였다.

사슬 철퇴를 든 놈은 다시 휘둘렀고, 그건 또 원심력과 함께 강하게 금발의 머리를 때렸다.


깡 -

깡 -


몇 번의 충돌음과 함께 금발이 몸 중심을 잃었다.

아마 지금 머리는 진탕이 되었겠지.


갈색 놈은 쇠장갑 낀 손으로 넘어진 금발을 마구 때리며 투구를 벗겼다.

그리고 끝났다.

사슬 철퇴는 벗겨진 금발의 머리로 향했고 바닥은 곧 붉게 물들었다.


“아아...”


이스마엘은 절망에 찬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모르긴 몰라도 돈까지 다 걸었을 테니까.


경기는 끝이 났고, 관중들은 야유와 함께 떠나갔다.

아마 금발의 팬이어서, 혹은 돈을 전부 잃어서 일 것이다.


탈레스는 귀족 객석의 사람들과 예의 있게 인사를 마치고, 좌절한 이스마엘과 카이우스를 데리고 복귀했다.

둘은 침묵과 함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뭘 한 번 가지고 그래. 새로 키우면 되지 않아?”


탈레스 딴엔 달랜다고 한 이야기였지만,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니까 돈까지 빌려서, 진짜 올인했던 모양이니까.


“아우. 그냥 매니지먼트만 해. 뭐 하러 도박까지 해.”


탈레스는 사업의 방향을 다시 정비해 주며 가지고 있는 돈 대부분을 건넸다.

투자라는 명목으로.


“뭐 친구라고 공짜로 빌려주는 건 아냐. 너도 사업가니까, 이건 투자야.”

“꼭 성공해서 갚아라, 친구야.”


아무리 친해도 보증은 서지 말란 말이 있지만, 탈레스는 당장 금화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긴 했다.

올 때야 마차 타고 왔지만, 갈 땐 아닐 테니.


이참에 겸사겸사한 건데, 이스마엘과 카이우스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 감격하며 감사를 표했다.

반드시 더블, 아니 세배, 아니 열배로 갚는다는 말과 함께.


이스마엘은 곧장 투자계약서를 작성했고, 탈레스는 소유자 증명서, 실질 주주 증명서를 받았다.

받자마자 보관해달라고 다시 넘기긴 했지만.


“흠. 그럼 내가 대주주야? 신기하네. 지구에서도 못 해봤는데.”


그래봐야 조그만 매니지먼트지만, 탈레스는 현대에서도 못해본 경험을 하며 즐거워했다.

제도는 현대가 훨씬 났겠지만, 거기선 돈이 없었으니.


지분 변동으로 회사의 주인이 된 탈레스는 우선 사명부터 바꾸었다.


“이스마엘의 루더스는 좀 구려.”


루두스는 검투사 양성소란 말이었는데 앞에 이스마엘이 붙는 게 별로였다.

그래서 생각한 게, 챌린저 루더스였다.


“항상 도전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우위라고 깝죽거리는 거 없도록 훈련 시켜.”

“상대가 죽은 걸 확인하기 전까진 까불지 말라고 해.”


탈레스는 이름을 바꾸고 만족해했고, 카이우스와 이스마엘 역시 좋아했다.

아무래도 그 유명한 아르케 경이 직접 사사한 명칭에다 투자 계약까지 맺었으니.

그의 이름만 팔아먹어도 지원자가 한가득 할 것이었다.

전쟁 영웅이 설립한 검투사 훈련소니.


아마 지금처럼 허접한 육체를 지닌 애들이 오진 않겠지.

이런 애들 쓸 바엔 돈 안 나가는 노예를 쓰는 게 나으니.


거기에 이스마엘과 카이우스의 목적은 아이온 축제의 참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강력한 노예라면 모를까, 건강하고 명예를 원하는 자유민을 찾는 게 당연했다.


이어서 전술 및 훈련 담당은 카이우스, 관리인 역할은 이스마엘로 최종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이스마엘은 이익에 따른 배당금 항목도 충분히 설명해 주었고, 탈레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는 다음 날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이스마엘은 좀 더 넓은 땅을 샀고, 훈련장 및 숙소 그리고 경비를 비롯한 벽까지 세웠다.

무슨 도적 길드처럼 첩보원 비슷한 애들도 고용했고.


“상대 검투사에 대한 정보를 캐거나, 다치게 만드는 등, 그리고 뭘 중점으로 훈련했는지 알아내서 승리에 큰 역할을 하네.”

“단순히 선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네. 보안도 신경 써야 하고 먹는 것부터 자는 것, 무장과 전술까지.”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움직일 때 비로소 이길 수 있네.”


이스마엘의 설명에 탈레스는 이곳이 현대가 아님을 다시 실감했다.

들어보니까 심판 매수해서 싸움 전에 독을 탄 음료를 주거나, 상대를 다치게 할 목적으로 대기실에 맹수를 풀어놓을 때도 있다고 하니.

툴레는 조금 작은 도시여서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이들은 언젠가 셀레스티얼이나 아테나이 같은 곳을 가려고 하기에 수준도 그곳에 맞추는 모양이었다.


탈레스는 어차피 검투 경기에 대해 잘 모르고, 이익보다 친구에게 투자하는 거라 여사로 듣긴 했지만.

어쨌든 이스마엘을 따라다니며 신기한 구경을 많이 했다.


툴레에서 검투 경기는 제한적이라지만, 투견 경기까진 허용한다고.

그래서인지, 이스마엘은 사나운 개들과 튼튼해 보이는 노예 몇, 그리고 자유민 지원자를 받았다.

자유민 면접은 엄격했는데, 카이우스가 철저하게 잠재력과 현 실력을 고려해서 뽑았다.


탈레스는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 사이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고, 드디어 제논이 찾아왔다.

하늘에서 뭔가 보인다면 항상 그였다.

이번에도 점 하나가 날아오고 있었고, 탈레스는 떠날 때임을 직감했다.


“이스마엘, 오늘 내가 떠나는 날인 것 같아. 블랙 기업이라 연차가 맘대로 안 돼.”

“건강히 지내고. 사업 번창하길 바라.”


탈레스는 짧은 작별 인사를 마치고 제논에게 향했다.

역시나 날아온 점, 제논은 탈레스에게 곧장 착지했고 현 상황 설명과 할 일을 전파했다.


“전황은 나쁘지 않네. 지금 툴레에서 지내봐서 알겠지만, 대부분 도시 국가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중이야.”

“리자드맨 무리는 갑자기 튀어나와 엄청난 위협이었지만, 빠르게 격퇴되고 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2왕자와 3왕자의 전선도 고착되었네, 우리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 것 같아. 백성들은 죽어나겠지만.”


제논은 2왕자 측에서 고대에서나 볼법한 거대 괴수들을 불러와 이형종을 박살 냈다고 말하며, 3왕자가 우위를 점하지 못했음을 알렸다.

이올린은 그 틈을 타 린벡군과 함께 주변에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고.


“이제 1왕손만 확보하면 우리도 제3의 세력으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네.”

“물자도 어느 정도 준비되었고, 시그마 연합의 지원도 일정 부분 약속 받았어.”

“아무래도 이들 역시, 광신자 집단이 옆에 있길 원하지 않을 테니.”


제논은 말을 마치며 허공에 무언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곤 임무를 주었다.


“자네가 할 일은 동부에 보였다는 1왕손을 찾아 확보하는 걸세.”

“우리의 운명이 달린 일이지. 이것에 따라 새로운 왕국의 주인으로 일어서느냐, 아니면 변방에서 휘둘리느냐가 결정될 테니.”


제논은 이렇게 말하며 그림을 마무리했다.

초상화 같은 것이 함께할 사람에 관한 것 같긴 했다.

아니, 사람이 아닌가?


“가능한 임무에 적합한, 수행 능력 위주로 선발했네. 다들 특출난 능력을 지녔어.”

“자네도 좋아할 거야. 전부 여성일세.”

“만나기 전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주고 가겠네. 잘 이끌고 다녀오게.”


제논은 말을 마치며 첫 번째 초상화 그림을 가리켰다.

사람은 사람이었다.

좀 사람 같지 않긴 한데.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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