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금지옥엽을 구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정육면체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8.22 18:36
최근연재일 :
2024.09.17 22:20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81,309
추천수 :
1,520
글자수 :
133,319

작성
24.08.23 22:20
조회
7,305
추천
114
글자
12쪽

1화

DUMMY



1.




칠흑같이 어두운 밤.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산속에서 나는 피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풀숲을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백무결, 이 새끼야 정신 차려! 지금 잠들면 죽어."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나 자신을 채근했다. 과다 출혈로 인하여 내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으나,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기 산등성이만 넘으면 미리 준비해 둔 안가(安家)가 나온다. 거기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믐달 밤 그리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일을 벌이고 도망치기엔 최적의 상황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거센 비바람은 채찍처럼 내 몸을 후려쳤고, 계속해서 내린 비로 숲은 순식간에 늪으로 변해 한 걸음 떼기도 힘겨웠다.


다른 건 몰라도 도망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있던 나였지만, 지금은 옆에 있는 토룡조차 이기기 힘들었다.


"이제 곧이야. 조금만 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복수를 끝마치겠다고.


온몸이 빗물과 흙으로 뒤범벅된 채, 나는 가뿐 숨을 내쉬며 기어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기어가길 한참.


내 마음과 달리 주변 풍경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었다.


"······잠시만 쉴까?"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신을 놓기 일보직전. 이대로면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숨을 돌리며 힘을 모아야만 했다.


그 순간.


─번쩍.


뇌전이 하늘을 가르며 눈앞의 거목에 내려꽂혔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목이 갈라지며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세찬 비바람에 이내 불은 꺼졌지만, 거목은 횃불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변을 대낮처럼 밝히고 난 뒤였다.


"젠장할!"


날 절망에 빠뜨리려는 시련인지, 구원하는 손길인지 모르겠다. 이대로면 추격자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으으윽, 움직여. 움직이라고!"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굳었다.


왜 이런가 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찢긴 옷 사이로 드러난 상처가 제법 심각했다.


왼팔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고, 오른쪽 발목은 덜렁거리는 게 마지못해 붙어있는 수준이다. 반쯤 패인 옆구리로 뭔가 흘러내리는 건 아마도 내 착각이겠지.


지금, 이 꼴로 신의를 찾아간다면 '미친놈아, 이건 대라신선이 와도 회생할 수 없다'라며 날 쫓아낼 것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잘 있으려나 모르겠다. 처음 만났을 땐 뭔 사기꾼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의술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사실 지금 내가 아직 살아 움직이는 것도 오로지 그때 배운 의술 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


"정녕 여기까지인 건가······."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봐서 그런 걸까.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촌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졌다.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했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대자로 누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여기서 죽나, 조금 더 가서 죽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을 테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보고 있자니, 후회가 밀려온다.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혈제(血祭).


피안혈교(彼岸血敎)의 힘을 과시하고 신도들의 충성을 재확인하는 가장 신성한 의식 중 하나.


특히, 이번 행사에는 피안혈교의 수뇌부인 교주와 사대마군(四代魔君), 칠대혈사(七代血使)가 모두 참석하였다.


철천지원수에게 복수할 일생일대의 기회.


하지만··· 너무 성급했다.


피안혈교의 수뇌부를 일망타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한 것이 패착이었다. 철저히 계획대로 움직였어야 했거늘. 결코,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일각(一刻, 15분).


단 일각만 더 있었더라면 아마 결과는 달랐으리라. 준비한 벽력탄을 모두 터뜨려 이 세상에서 피안혈교를 지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너무나 아쉬웠다.


물론, 이번 일로 그 악명 높은 마군 셋과 칠대혈사 대부분이 삼도천을 건너갔지만, 내 목표는 고작 마군과 혈사 따위가 아니었다. 피안혈교 전체의 몰락이었지.


그래도 수뇌부 대부분이 죽었으니,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도 있었다. 크게 자축해야 할 만한 일이나, 내 몸이 이래서야······.


눈가에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린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쏟아붓고도 이런 결론이라는 게 조금은 허탈하기까지 했다.


─우르르 쾅쾅.


"그래, 너도 나만큼 슬픈가 보구나."


하늘도 내 심정을 대변하듯 맞장구쳤다. 사위의 모든 것들이 비바람에 휘청거리며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아직이야. 할 일이 남았잖아. 이대로 얌전히 죽을 수는 없지."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진흙을 움켜쥐며 하나 남은 오른팔과 성치 않은 다리로 다시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철퍼덕.


나는 다시 한번 진창을 굴렀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움직여서 그런지, 진한 탈력감이 몰려온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몸이 훅 가라앉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새카맣던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그때였다.


─타닷.


저 멀리 자그맣게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시야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젠장, 꼬리를 밟힌 건가.'


나는 선천지기를 불태우며 등 뒤로 비수를 갈무리했다. 어차피 도망가기엔 글렀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발악할 작정이었다.


이윽고.


나를 이 꼴로 만든 피안혈교의 장로, 혈수마군(血手魔君)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가볍게 내 앞에 섰다.


'씨발, 하필 걸려도 더럽게 걸렸네.'


피 냄새가 날 것 같은 붉은 손, 그와 대비되는 창백한 얼굴. 반박귀진(返璞歸真)의 경지에 올랐음에도 굳이 사방으로 내뿜는 강대한 존재감.


그 위압감과 섬뜩한 외모에 나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아아, 흑음천서(黑陰賤鼠)야! 도망치는 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놈이 아직도 예까지밖에 못 갔단 말이냐. 어이구, 이건 또 무슨 꼴이람.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니, 내 가슴이 다 미어지는구나."


혈수마군은 잔뜩 비웃음을 머금은 채, 날 내려다보았다.


저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꼴린다. 전생에 무슨 원한을 진건지, 사사건건 내게 참견하던 미친놈.


"어찌 내가 시간을 더 내어주랴?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내 오늘 네놈 덕에 기분이 좋아 크게 은혜를 베풀 터이니, 어서 쥐새끼답게 걸음을 재촉하려무나."


"시끄럽다. 이 살인에 미친 마두야."


심심하면 사람 죽이기로 유명한 혈수마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인에 미친 마두는 네놈이고. 수백 명이 넘는 교인들을 단번에 핏덩이로 만들어놓고선 그런 말이 나오느냐?"


"교인이라는 말로 광신도를 포장하지 마라. 나는 수백 명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혈제라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살해될 수천 명의 선량한 양민들을 구한 것이다!"


"궤변이다, 이놈아. 네놈이 죽인 건 모두 평범한 신도들이었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잘 알기는 개뿔. 어느 평범한 신도들이 하늘을 가르고, 땅을 찢어발긴단 말이냐!"


"크큭, 하긴 그게 뭣이 중요하겠느냐. 아무리 벽력탄을 썼거니와 고작 절정의 경지로 화경의 고수 셋을 격살(擊殺)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지!"


"다 죽어가는 놈들을 죽인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데 절친했던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그렇게 웃는 걸 보면, 넌 정말이지 미친 마두가 맞다. 오늘 일이 그렇게 즐겁더냐?"


내 말에 혈수마군은 더욱 크게 웃었다.


"어찌 즐겁지 않을쏘냐. 네놈이 눈엣가시 같던 놈들을 깡그리 날려줬는데. 다만, 한 가지. 교주가 살아남은 게 아쉽다면 아쉬울까? 뭐, 그것도 조만간 해결될 성싶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놈도 거기에 휘말려 뒈졌어야 했거늘···. 그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리. 너의 그 개똥 같은 소리를 더는 듣고 있기 힘드니, 어서 빨리 죽여라!"


"푸하하하, 왜 벌써 삶을 포기하고 그러시는가. 조금 더 도망쳐보시지. 본좌가 살려준다고 하지 않느냐?"


도망쳐? 이 몸으로?


이 몸뚱어리로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이 기적이다. 아마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미친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겠지.


혈수마군의 말에 나는 이가 갈릴 정도로 분노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은 그의 농락에 반응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입은 달랐다.


"미친 마두야, 허여멀건한 얼굴만큼이나 입도 혐오스럽구나. 남자 새끼인지, 여자 새끼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얼굴에 분칠을 해가지고선."


"뭐?"


"너 같은 놈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조차 역겹다.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깔끔하게 여기서 죽여라."


혈수마존이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본좌가 널 죽이긴 왜 죽인단 말인가. 너의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큰맘 먹고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거늘. 수하들을 이끌고 마을에 내려가 거나하게 한잔하고 돌아올 터이니. 너는 그동안 쥐새끼답게 어서 빨리 도망가거라. 알겠느냐? 이게 날 교주 자리에 올려준 너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은혜라니, 말 같잖은 소리를. 쓸데없는 짓거리로 힘 빼지 마라. 네놈에게 그리 농락당할 바에는 여기서 자진(自盡)하고 말 터이니."


"쯧, 자진이라니. 이거 통 재미가 없구나. 흑음천서답지 않게 왜 이리 포기가 빠를꼬. 다 늙어서 그 경지까지 오른 것처럼 이번에도 조금 더 노력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닥쳐라! 그 입을 내가- 커헉, 쿨럭."


소리치는 입에서 피가 한 움큼 뿜어져 나왔다. 내상이 워낙 깊은 터라 핏속에는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워워, 조심하거라.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다 여기서 생을 마감하겠다. 아! 쥐새끼답게 진창에 빠져 죽으려는 너의 큰 그림이더냐? 그것도 그것 나름 잘 어울리긴 하지."


"우웨에엑!!!"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떨면서 피를 토하는 것뿐.


"그놈 참. 오늘 살아남으면 선짓국으로 장사를 해도 되겠어. 하수분(河水盆)처럼 끊임없이 나오니 말이다. 크하하하!"


혈수마군은 자신의 농담이 만족스러운지 앙천대소(仰天大笑)했다.


"······."


"왜 그런 표정이더냐? 아아, 본좌의 손에서 도저히 살아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어허, 그렇다면 이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걸. 토끼도 굴은 세 개나 파놓는다는데, 너는 멍청한 쥐새끼라 도망갈 구멍조차 미리 준비를 안 한 모양이로구나. 고작 절정에 올랐다고 이렇게 게을러서야, 원."


"씨발, 아가리질은. 너야말로 장로 자리는 무공이 아니라 아가리도 딴 모양이로구나."


"그래, 바로 그거다. 흑음천서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더 해보거라. 조금 더! 지난 30년 동안 시궁창에서 구른 것처럼 조금 더 발악을 해보란 말이다. 그래야 내가 여기까지 걸음을 한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 푸하하하."


"그래, 좋다. 해달라고 하는데 내 못할까. 이 애미애비도 없는 버러지 같은 놈아. 내가 토하는 피보다 네놈의 손을 끓여 먹는 게 더 맛있겠다. 내가 오늘날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네놈의 혈수로 만든 족편(足片)을 저잣거리에 걸어두고 장사를 하마. 캬아악- 퉷!"


"후훗, 그래, 흑음천서라면 이래야지. 내가 보고 싶었던 건 네놈의 이런 모습이었다. 좋다! 그렇게 원하니, 내 오늘 자비를 베풀어 고통 없이 죽여주마."


제발 이대로 방심하며 다가오길. 나는 기회를 엿보며 목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런 내 염원이 하늘에 닿았을까.


혈수마군이 무방비한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남궁세가 금지옥엽을 구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평일 22시 20분 + 주말 비정기 연재입니다. 24.08.25 1,775 0 -
24 24화 NEW +2 9시간 전 663 32 13쪽
23 23화 +3 24.09.16 1,637 51 12쪽
22 22화 +4 24.09.13 2,106 43 11쪽
21 21화 +3 24.09.12 2,089 42 13쪽
20 20화 +4 24.09.11 2,111 46 13쪽
19 19화 +6 24.09.10 2,241 45 12쪽
18 18화 +3 24.09.09 2,380 46 12쪽
17 17화 +4 24.09.08 2,587 53 13쪽
16 16화 +5 24.09.07 2,931 55 12쪽
15 15화 +5 24.09.06 3,049 58 11쪽
14 14화 +2 24.09.05 3,188 55 13쪽
13 13화 +3 24.09.04 3,212 60 13쪽
12 12화 +4 24.09.03 3,286 61 12쪽
11 11화 +2 24.09.02 3,378 58 12쪽
10 10화 +4 24.09.01 3,480 67 13쪽
9 9화 +2 24.08.31 3,558 64 11쪽
8 8화 +2 24.08.30 3,698 67 13쪽
7 7화 +3 24.08.29 3,930 65 11쪽
6 6화 +18 24.08.28 4,238 76 12쪽
5 5화 +2 24.08.27 4,311 87 12쪽
4 4화 +4 24.08.26 4,543 84 13쪽
3 3화 +4 24.08.25 5,212 90 13쪽
2 2화 +5 24.08.24 6,163 101 13쪽
» 1화 +6 24.08.23 7,306 11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