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금지옥엽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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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면체 아카데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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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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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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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DUMMY



2.




혈수마군의 발걸음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비수를 찾는 손에 땀이 흥건하게 흘러 축축해졌다. 혹시라도 미끄러져 실수라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혈수마군은 내게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동안 날 위해 애써준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넌 정말 내게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애석하게도 이제 너의 도움은 없겠지만, 내 최선을 다해 교를 잘 이끌어 나가도록 하마."


"자, 잠깐! 도움? 그게 무슨 소리냐?"


"아! 내 깜빡할 뻔 했구나. 그래, 마지막 가는 길인데 설명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혹시 무극선령환이라고 하면 기억하겠느냐?"


무극선령환(無極仙靈丸).


백년의 세월을 거쳐 정제한 신비의 영약. 복용한 자는 폭발적인 내공 증진을 경험하며, 심각한 내상도 단숨에 치유되고, 온갖 독을 해독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어 여벌의 목숨이라고도 불리는 천고의 보물.


······지금껏 내가 피안혈교에게 복수하고 있는 원인이었다.


"서, 설마?"


"그래, 맞다. 너의 그 갸륵한 정성이 나에게 닿아 내가 취할 수 있었다."


지난 30년간 찾아다닌 그날의 진실.


"네, 네놈이었구나. 그날의 흉수가! 의형을 죽이고, 고통에 신음하던 날 급류에 던진······."


"그뿐만이 아니다. 가당찮게도 너는 복수를 하겠답시고 우리 교에 기어들어 와 온갖 패악질을 부렸다. 처음 널 발견했을 땐 이걸 어찌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지.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나더구나."


"머, 뭐라고?"


"크크큭, 이상하지 않더냐? 네놈이 이렇게나 교를 헤집고 다니는데, 어찌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누구 하나 너를 의심할 만도 한데 말이다. 넌 몰랐겠지만, 지금껏 네가 한 모든 것들이 내게 득이 되었다. 덕분에 이 자리에도 쉽게 오를 수 있었어."


혈수마군이 내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하고 있었다? 거짓말이다. 지금껏 그랬듯이 나를 농락하고 기만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이, 이 쓰레기 같은 놈이!"


"오늘 일도 마찬가지다. 네놈은 그것도 모르고 교주에게 이를 들이대기 바빴어.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아마도 넌 모를 것이야."


"으드득."


"크하하핫! 아무튼, 고맙다. 내게 영약도 주고, 부귀영화도 주고, 이젠 드높은 지위까지!"


어떤 무공을 배워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몸을 이끌고, 30년 동안 피안혈교에 복수를 꿈꿨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흑음천서라는 치욕적인 별호를 들으며 그들의 비밀을 캐고, 그날의 진실을 쫓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자 하니, 나의 복수는 철저히 혈수마군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단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지막까지 나를 농락하는 거냐!"


"이 늙은 쥐새끼야. 넌 그냥 교주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너를 제자로 들이겠다는 말을 진작에 들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렇게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날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저 드높은 자리에서 내게 명령을 하고 있었겠지."


"거짓말하지 마라. 천한 밑바닥 출신의 내가 어떻게 교주의 제자가 된 말이냐. 날 정치적 도구로 삼으려던 네놈들의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더냐!"


"푸하하핫! 정치적 도구라니? 교주는 진심이었다. 네놈이 교주를 믿었다면 진실로 그렇게 됐겠지."


"네놈이 교주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너는 모른다. 교주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외면당했던 내 심정을. 무공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병신새끼도 제자로 삼겠다고 하면서, 도대체 왜 내게는 기회를 주지 않은 건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를 몰라? 난 바로 알겠는데."


"뭐?"


"너의 그 입에선 구역질이 나는 냄새가 나지 않느냐? 교주도 사람이라면 너 같은 놈을 옆에 두고 싶진 않았겠지. 지금도 봐라, 시궁창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이, 이 새끼가."


"이번 일만 해도 네 놈이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교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옆자리도 내어주지 않았을까. 다들 사대마군이라고 부르지만, 그중 혈수마군이 최약의 병신새끼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얼굴빛을 바로잡은 혈수마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훗. 그래, 마음껏 떠들어라. 뭐,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너의 도움으로 혈교가 내 손아귀에 떨어졌는데. 네가 뭐라고 하든 이제 사대마군은 없다. 오직 나 혈수마군뿐!"


혈수마군은 피로 얼룩진 붉은 손을 들어 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내 별호가 왜 혈수마군인지 이 손으로 직접 알려주마. 내 너를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만천하에 널리 알릴 것이다. 나에게 반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보라고 말이다. 크하하핫!"


조금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30년 동안 쌓아온 복수의 세월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굴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마치 장이 끊어지고, 창자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이 몰려온다. 그리고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이 고통은 몇 배로 더 증폭되었다.


"끄으으윽···."


자랑스럽게 떠드는 혈수마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신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순 없었다.


혈수마군이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얼굴을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내 너를 애처롭게 여기어 이제 곧 아프지 않게 해주마."


"퉷!"


심혈을 기울여 뱉은 침은 비바람에 흩날리며 혈수마군의 발 앞에 떨어졌다.


"하찮은 놈, 마지막까지 참 가상하구나. 과연 그 별호 그대로 흑음천서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혈수마군은 손을 들어, 내 목을 죄기 시작했다.


점혈로 단번에 날 제압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내게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함이었다.


"끄르르륵···."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너의 끝을 함께 할 수 있어 기쁘구나. 흑음천서, 이제는 안녕이다. 잘 가라."


나는 꺼져가는 정신을 똑바로 잡으며 아까부터 조금씩 선천지기를 불태워 모은 힘으로 등 뒤에 숨겨놓았던 비수를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방심하고 있는 혈수마군의 목을 찔렀다.


─푸욱.


절정과 화경은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서로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방심하는 상대에게 칼침 한방 못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크헉. 이, 이놈!"


혈수마군이 왼손으로 목에 난 자상(刺傷)을 막으며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지혈을 위해 근처 혈도 몇 군데를 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피가 멈추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솟구쳤다.


"천하의 혈수마군도 칼침 앞엔 장사가 없구나. 별호 그대로 정말로 혈수가 되었어. 꼴좋다, 이놈아. 그러니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덕분에 저승길이 외롭진 않겠구나. 우리 함께 손을 잡고 황천길로 가자."


"이, 이 버러지만도 못한 놈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린 혈수마군이 내게로 섬전처럼 짓쳐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빨간 강기가 담긴 오른손으로 내 가슴을 강하게 때렸다.


─퍼엉.


가죽 주머니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내 몸이 종이짝마냥 날아가 근처 나무에 처박혔다.


"커어어헉. 끄으으윽."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실이 모두 끊어진 인형처럼 사지가 흐물거렸다. 경악스러운 일격에 그나마 내 몸을 지탱해 주던 마지막 선천지기마저 모조리 흩어졌다.


"으어어어."


내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온다. 여기가 어딘지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흡사 장님이 된 것처럼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귀에서는 쉴 새 없이 위잉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오늘 여기가···.


내 무덤인 모양이다.


'그래, 이쯤 했으면 충분하지. 30년 동안 했으면 많이 했어.'


기억도 나지 않는 의형(義兄)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그에게 그래도 이 정도면 잘 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복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조금은 편하게 쉬고 싶어졌다.


─툭.


가까스로 들고 있던 고개가 꺾였다.



***



'회귀(回歸), 회귀라······.'


잠시 풀밭에 누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얼굴에 그늘이 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궁연(南宮蓮)이 청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무결아, 뭐해?"


백옥처럼 맑고 고운 피부에 균형 잡힌 얼굴,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오뚝한 코 그리고 선홍색의 입술까지. 마치 이름 높은 화공(畫工)이 그려 놓은 듯 완벽한 얼굴이었다.


비록, 남장(男裝)으로 미모의 대부분을 가려놓긴 했지만, 몇 년만 더 지나면 능히 한 나라를 뒤흔들 만한 외모. 한눈에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 형님!"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다리를 다쳤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어떻게 봐도 남자로 보이진 않는데, 과거의 나는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소녀를 형님이라고 부른 걸까?


"표정이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머리가 좀 아파서······, 요."


혈수마군에게 일격을 당하고 회귀한 지 벌써 이레째, 아직도 이 모든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불혹(不惑,40세)이 훌쩍 넘은 나이에서 다시 지학(志學,15세)으로 어려지다니.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남궁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머리? 왜 자꾸 머리가 아프다는 거야. 내가 약을 잘못 쓴 건가? 분명히 이 약이 맞는데··· 설마, 부작용?"


남궁연의 말에 엉망진창으로 치료된 다리를 바라봤다.


'날 치료한 게 남궁연이었군. 어쩐지···.'


어떤 돌팔이가 이딴 식으로 치료했는지, 찾아가 따지려고 했거늘. 오늘에서야 그 범인을 찾았다.


"안 되겠다. 마을에 도착하면 나와 함께 의원을 찾아가 보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회귀로 인해 정신과 몸이 따로 논다고 해야 할까. 특히 미모의 남궁연을 형님으로 대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강단 있고 멋진 의형이 사실은 여자였다니···. 이런 것도 못 알아보던 과거의 나는 도대체 어떤 놈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뭐?"


"제가 요즘 고민이 있어서······, 요."


"아하! 그거? 고민할 게 뭐가 있어. 아우는 이 우형(愚兄)을 못 믿는 게야?"


못 믿다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난 30년간 피안혈교에 숨어들어 복수만을 생각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궁연에 대한 은혜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 에요."


"이번 표행이 끝나면 그냥 아무런 걱정 말고 날 따라오면 돼. 내가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울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다시 만난 남궁연은 여전히 따스했다.


어머니를 잃고 부평초처럼 여기저기를 떠도는 나에게 생전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자신을 형처럼 생각하라며 무공의 기초를 알려준 사람. 표행 중 다리를 다친 나를 지극히 돌봐준 사람.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서도 자신보다 나를 먼저 챙긴 사람.


그는 아니,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그게······."


"괜찮아. 날 돕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내가 그 정도도 못 할까. 사천성엔 아무런 연고도 없다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너 하나 정도는 챙겨줄 수 있어."


과거 이런 대화를 나눴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30년이나 지난 기억이었으니.


"왜 대답이 없어?"


무슨 이유로 날 남궁세가로 데리고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 날 세심하게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지난 30년 동안 그녀의 복수를 위해 애쓴 것들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좀 더 고민해 볼게······, 요."


"나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너 이런 기회 잘 없다. 진짜 잘 생각해야 해."


"기회라···."


뭐,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남궁세가에서 일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뭐가 됐든, 회귀 전보단 좋지 않을까? 피안혈교의 잡부에서 남궁세가 금지옥엽의 아우라, 비교하기가 민망하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갈게요, 남궁세가."


"어? 정말? 후훗, 알겠어. 그럼 여기서 푹 쉬고 있어.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남궁연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희희낙락 웃으며 떠나갔다.


"그래도 밝아서 좋네. 이때는 형님이 저렇게 밝았구나···."


사실 나도 남궁연의 말처럼 아무런 걱정 없이 푹 쉬고 싶다. 하지만 쉴 수가 있나.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는 내일 밤.


이 표행단의 전멸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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