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의 주인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가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시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활동을 정지한 골렘ㅡ한때 인간이었던 것 옆에 주저앉아 말이 없었던 것이다.
힐 마법을 걸어주자 시이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류...셀, 하다못해 장례 정도는 치를 수 있을까.”
“그게 네 바람이라면. 시체는 돌아가는 길에 회수하도록 하지.”
시이나를 일으키는 데는 필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골렘을 무력화시키고 지나치니 더 이상 우리를 막아서는 적은 없었다.
최종보스만 남아있을 뿐.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흉내 낸 입구를 열고 최종보스 방에 들어갔다.
방이라고 해봤자 정돈되지 않은 동굴의 일부일 뿐. 광맥의 지배자가 살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잠에서 깨우는 자는 누구인가?”
낮은 목소리에는 인외의, 그리고 동굴을 진동하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스와 시이나는 겁을 먹고 도망칠 정도는 아니어도 바짝 경계심이 올라간 모습을 보였다.
“류, 류셀. 진짜 할 거야? 자이언트 드래곤은 드래곤 중에서 강력한 축에는 못 끼지만... 그래도 드래곤이라고?”
시이나의 늑대귀와 꼬리는 위험을 감지했는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류셀 씨.”
반면 이스는 차분하게 나의 결정을 물어왔다.
“여기까지 와놓고 뭔 소리냐. 그래봤자 고작 드래곤이다.”
“고작...?”
정말 뻔한 걸 묻는 녀석들이다. 나는 조금 망설이는 둘을 지나쳐 입구를 돌았다.
입구도 컸지만 동굴의 실제 내부는 큰 연회장을 방불케 했다.
밖의 빛이 들어오지 않아 완전한 어둠이 짙게 깔렸다.
나의 탐지 마법ㅡ 초ㆍ지각 마법이 아니었다면 넓다는 것도, 드래곤이 동굴의 제일 끝자락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겠지.
잡다한 것들을 쌓아둔 그 보금자리는 둥지처럼 보였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새의 둥지는 아니었다. 밑에 깔려있는 게 짚이나 나뭇조각이 아니고 재화였던 것이다.
다이아몬드나 금과 은 같은 갚진 금속 말고도 값이 높아 보이는 무기나 방어구들이 산더미처럼 모여 작은 언덕을 만들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저건 모험자들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다. 드래곤은 그 위에서 편하듯이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있다.
아마 찾아오는 모험자마다 문지기용 골렘으로 만든 뒤 필요가 없어지면 장비만 빼앗은 거겠지.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골렘이 대신 싸워주니 자신은 하루 종일 농땡이만 피고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게 있다.
사람이... 아니, 난 이제 사람이 아니었지. 마왕이 직접 찾아와주셨다는데 일어날 생각도 안 한다. 이 드래곤은 그것만으로 죽어 마땅했다.
서둘러 나를 따라온 시이나가 4층 건물 크기의 드래곤을 보고 주춤했지만 이스는 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류셀, 제가 불을 밝힐게요. 그 정도 초급 마법은 저도 할 줄 아니까.”
이스가 손으로 삼각형을 만들고 주문을 외우는 동안 드래곤은 개입하지 않았다. 품평하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을 뿐이다.
이 놈, 자신이 패배할 거라고는 한 치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자기보다 약한 놈들만 상대해왔으니 본인은 절대적인 강자라고 생각하겠지.
정말 잘못돼도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이다.
이스가 사방으로 쏘아 보낸 흰 구체 덩어리는 동굴의 양 벽에 박혀 동굴을 밝게 비춰주었다.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드러났다.
짙은 갈색의 비늘. 펼치지 않았음에도 큰 위용을 자랑하는 날개.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드래곤이다. 그 크기로 가져다주는 위압감으로도 보통 모험자들은 기선제압당하고 방심하는 사이에 그대로 골렘 신세가 됐겠지.
“이게... 자이언트 드래곤.”
이스가 중얼거린 혼잣말을 들었는지 드래곤이 크게 웃어재꼈다. 웃었을 뿐인데 동굴의 진동과 함께 광풍이 몰아쳤다.
“크하하하, 멍청한 인간들. 마족도 하나 섞여있는 것 같지만 고작 세 명으로 내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분수를 알아야지.”
“일단... 묻죠.”
시이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사라 씨를 골렘으로 만든 건... 당신인가요?”
“사라? 인간의 이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죽이는 것도 모자라 단순한 인형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흥.”
드래곤은 코웃음 쳤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싶었더니. 애초에 인간 주제에 나를 쓰러뜨리겠다고 찾아온 게 잘못한 것이다. 너희 같은 족속들에게 그렇게 쉽게 쓰러져버리다니, 끝까지 도움 안 되는 인간이었어.”
“당신은ㅡ!”
분노로 전신이 떨리는 시이나.
“억울한가? 그러면 복수를 해내 보여라. 웨어울프 따위가 할 수 있다면 말이ㅡ”
“닥쳐라.”
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뭐라?”
살의가 가득 담긴 내 말에 드래곤이 당황했다.
“잔챙이랑 길게 대화할 여유는 없다. 시이나. 이스. 너희들도 내게 의지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지? 지금이 기회다.”
“그랬지... 나도, 류셀처럼 강해지고 싶으니까.”
“저도 구경할 생각은 없어요.”
시이나가 대검을 붕붕 휘두르고, 이스는 쌍검으로 자세를 잡았다.
드래곤은 녹색 눈을 빛내며 둥지에서 몸을 일으켰다.
“웃긴 놈들이군. 너희는 특히 신경 써서 놀아주마.”
시이나가 먼저 땅을 박차고 뛰어 올렸다. 가뜩이나 무게가 있는 대검에 체중을 실어 드래곤의 목 부위를 세게 강타. 드래곤은 보통 피부가 강철은 가볍게 튕겨내는 성질이지만 연결부위는 취약할 거라고 본 것이겠지.
하지만 드래곤이 데미지를 입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런...!”
시이나의 절망적인 외침. 드래곤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가지고 논 뒤에 골렘으로 만들어주지.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심심했던 참이었다.”
그 꼬리를 가볍게 휘두른 것에 시이나가 날아가 동굴 벽에 큰 균열을 만들었다. 웨어울프의 단단한 몸이 아니었다면 사망했겠지만 지금은 기절해있을 뿐이다.
시이나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지만 이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기합을 넣으며 이스의 쌍검이 노린 건 드래곤의 눈.
저건 정답이다. 목의 피부까지 단단하다곤 해도 눈은 그런 강도를 갖고있지 않다.
물론 그건 맞출 경우의 이야기겠지만.
드래곤의 입에서 거대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이스는 그걸 피하느라 공격하는 자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이어지는 드래곤의 공격을 쌍검으로 막았지만 데미지는 다 경감 시키지 못하고 이스는 바닥에 처박혔다.
역시 둘에게 큰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는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실망했다.
혼자 남아 방관하고 있던 내게 드래곤의 눈이 뒤룩 움직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인간?”
이 놈. 내가 마족인 것도 모르고 있다.
바람의 정령 스키잔에게는 상급 마족들에게만 전해두라고 했었을 텐데.
드래곤 주제에 상급 마족으로 분류되지도 못한 건지, 마왕강림에 대한 건 들었지만 단순히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건지.
다행히 시이나와 이스는 의식이 없다. 숨은 붙어있는 채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들리지 않겠지.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숨길 것도 없다. 나는 거만하게 한쪽 허리에 손을 짚고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내 이름은 류셀. 이번에 강림한 마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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