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준비
“표정이 안 좋군, 백작. 밥이라도 잘못 먹었나?”
그때 나눈 밀담 이후로 바뀐 게 전혀 없는 소년이었다.
“아, 아닙니다...”
네이아르 백작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허리를 굽혀 예의를 표했다.
류셀 블레이크ㅡ드래곤을 처치한 신참 모험자 소년.
처음 만났던 날 밤, 밀담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남작과 같은 말로였겠지. 무슨 일이냐며 묻던 자신에게 날아든 레이븐의 충고는 저 소년을 겉보기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메이드는 말했다.
[그는 단순한 소년이 아닙니다.]
레이븐이 그렇게 말하는 건 그도 처음 들었기에 이야기나 들어보자며 밀담에 응했지만, 정말 국가 규모로 숙청 작업을 벌일 줄 알았다면 그때 냉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겠지.
지금도 그의 딸, 로자리아를 돌봐주고 있는 메이드의 진언이 네이아르 일가의 목숨을 살린 게 된 것이다.
“그럼 됐어. 그때 한 이야기는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소년은 다시 의자에 앉더니 책상 위에 놓인 철 덩어리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만지작거렸다.
“백작은 오늘부로 내 조력자로 일해 줘야겠다. 내가 한 약속은 어기지 않아. 지위와 부의 탈환도 준비되어 있다.”
“예...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하면 좋겠습니까?”
“공직에서 물러난지 오래라고는 해도 본래 네이아르 가문은 정보를 수집하는데 일가견이었다고 들었다.”
네이아르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와선 빛바랜 추억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의 본업은 원래 국가를 위해 여러 경로로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으니까.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필요하다. 국내에 없다면 타국에서라도 수급해오도록. 질문 있나?”
“예?”
자신도 모르게 반문이 나왔다. 소년이 눈을 찌푸리자 백작의 등골도 서늘해졌다.
“아, 그게 아니라ㅡ”
“너무 이야기가 앞서 나갔나. 일단 서론부터 말하지.”
류셀은 꼰 다리를 풀며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쾅하고 내리쳤다.
“오늘 너를 부른 건 본래 계획에 없었던 상정 외의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디의 강아지귀 씨가 시끄러워서 조금 일이 복잡하게 됐다.”
“강아지귀...? 아, 동료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리시아 폰 지오돌프. 왕위 제7위 계승권자가 제국에 망명했다.”
“망...명?!”
살아남은 왕족이 있다는 소식에 네이아르 백작이 놀랐다.
“왕족 일가는 전부 처리하지 않은 겁니까? 어째서 그녀만...”
“그럴 예정이었다. 방금 말했듯이 시끄러운 녀석이 한 명 있어서 일이 조금 틀어졌다는 말이야.”
“그런...”
네이아르 백작은 미간을 좁혔다. 살아남은 왕족이 있다면 제국에 가서 망명을 요청할지도 모른다는 게 당연하다. 그와 친했던 선대의 가족이 지오돌프에 의해 전부 숙청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제국은 쳐들어오겠지. 그러기 전에 정보전을 벌일지도 모른다.”
제국이 군을 움직일 명분을 주었다. 정의라는 이름하에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는 여기까지 몇 번이나 보아왔다.
“그래서 필요하게 되었다, 단기간에 군사력을 늘릴 방법이. 내가 정면에 나서는 수단도 있지만 그건 가급적이면 아껴두고 싶군.”
속마음을 읽힌 것 같아 백작은 조금 주춤했다. 드래곤을 잡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전장에서 좋은 전력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뒤로 접어두어야겠지.
“왕보다 위에 서신 분이 직접 전장에 나설 수는 없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도 그런가.”
류셀의 얼굴엔 긴장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작은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남은 병력은 얼마나 있습니까?”
“기사단을 제하면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겠지. 몇 없는 상급 모험자라는 놈들도 반란을 들어 전부 소탕할 수밖에 없었다.”
백작의 얼굴에 그늘이 져갔다.
“일반병사라면 지금도 만 정도는 긁어모을 수 있지만 기존에 무리하게 운영하던 병단은 전부 해체했지.”
“... 좋은 상황은 아니군요.”
류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라의 톱이 바뀌었다. 지금처럼 병단을 운용하는 건 반란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부패한 관리들이 빼먹던 돈을 생각하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알트레아 왕국을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제국과 본국의 국력은... 아니, 일단 군사력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백작은 늑대에 대한 것도 잊고 물었다.
“화평을 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무리다.”
수수께끼 모양의 철 덩어리들을 만지작거리며 류셀이 딱 잘라 말했다.
“백작도 잘 알고 있겠지. 제국은 계급제를 유지하면서도 평등함을 내세우는 이상한 나라다. 제국 수뇌부에만 이 소식이 퍼진 게 아니야. 왕녀의 망명 소식은 단숨에 제국민 전체가 알게 되었으니 전쟁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왕국은 멸망합니다.”
“그것도 잘 알고 있다. 체제가 잡히려면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어. 그래서 준비한 게 이거다.”
류셀이 잘 보라며 들어 올린 철 덩어리를 보고 백작은 어리둥절했다. 위는 둥글게 뾰족하고 밑은 납작한, 엄지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장난감처럼 보였지만 적어도 겉은 강합금으로 되어있었다.
“이건... 뭡니까?”
“고작 만 명으로 백만 대군을 멸할 수 있는 무기다. 쓸 줄만 안다면 말이야. 인간이 얼마나 단련을 해도 이거 하나에는 이기지 못하지.”
“각하께서 발명하신 겁니까?”
“아니...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챌 생각은 없다만. 뭐, 여기에서는 그런 셈이겠지. 앞서 말했듯이 네겐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많이 찾아줘야겠어. 이 책상에 놓인 부품들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말이다.”
소년의 눈이 백작을 훑더니 감겼다.
“같은 설명을 벌써 세 번째 한 것 같으니 나머지는 네게 맡겨도 될까, 이스.”
백작 뒤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백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도 이전에 자택에서 본 적 있는 소녀가 류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작은 손에는 그가 들고 있던 것과 비슷한 철제 도구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백작과 미팅이다. 나대신 잘 설명해주도록. 회의실을 쓰도록 해.”
“알겠어요, 류셀.”
상큼하게 웃는 소녀를 보며 백작은 역시 이전에 만난 것 말고 훨씬 먼 옛날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건 분명...
“아... 이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 되는데.”
나는 백작과 이스가 나란히 회의실에 들어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총을 이 세계에서 재현하는 건 생각보다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전직 마피아라고 해도 고등학생 수준의 공학 지식으로는 무린가. 전문가를 구한다고 해도 기술력을 보면 이 나라에서는 무리일 것 같다만...”
근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알트레아 왕국의 대략적인 것들을 파악했다. 쓸데없는 미사어구들로 채워진 책들을 헤치며 얻은 건 딱 세 가지다.
1. 암흑시대라고도 불리는 중세 초기의 기술력
2. 너무 교역에만 의존하는 경제
3. 60퍼센트가 넘는 문맹률
이런 와중에 대국과 전쟁을 벌이게 생겼다. 내가 전면에 나서서 광역 파괴마법으로 적을 일망타진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래서야 마왕의 신분을 너무 일찍 드러내게 된다.
바람의 정령 스키잔이 열심히 일해 준 결과 군대의 편성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이오크, 서리거인, 다크엘프를 포함한 23개 부족.
아직까지 직접 시찰하지는 않았지만 스키잔이 보내온 사념을 보자면 인간에 쌓인 분노가 워낙 많은지, 재림한 마왕의 명이라고 얘기하기만 하면 무슨 잡일이든 군말 없이 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크엘프가 마련해준 북쪽 산림에서 결집하고 있지만 최종적인 집결지는 이곳, 알트레아 왕국이다.
“왕국의 부흥이라...”
물론 거짓말이다.
백작에겐 일부러 정보를 빼고 말했지만, 소중한 총을 적대 관계에 있는 인족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다. 검과 화살, 그리고 초보자는 영창도 못하는 마법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아직 전보조차 발명되지 않은 세계다. 총기와 폭탄의 도입이 불러올 파장은 무지막지하겠지.
그렇기에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릴 기술을 무턱대고 흘렸다간 적과 같은 조건에서 전쟁을 할 최악의 가능성도 있다.
“뭐, 처음부터 이 전쟁을 이겨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지.”
알트레아 왕국은 제국과의 무리한 전쟁으로 일망타진.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의 시민들은 피난하고, 그 자리에 내 군대가 들어온다는 그림이다.
이스나 네이아르 백작처럼 쓸 만한 인간족이 있다면 등용하겠지만,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으로 인간은 배제해야겠지.
그런 생각도 모르고 새 시대가 찾아온다며 희망을 가득 품은 놈들은 불쌍하지만, 결국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놈들의 잘못이다.
내 합리성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 죽어가면서도 기뻐하지 않아주려나.
“이제 남은 건 대량 생산의 방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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