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폭
기습을 가하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게 벌써 여섯 번째.
단기간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은 아인부대가 가하는 총격에 벌써 상대측의 희생자가 네 자리 수가 넘었을 터지만 상황은 혹시나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역시... 제국군은 후퇴하지 않는 거네.”
시이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조율된 기습으로 인해 아군의 피해가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제국군은 진로를 변경하지 않았다. 마치 그 덩치면 이 정도 희생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배짱이다. 큰 움직임의 변화가 없다는 건 곧 적의 지휘관은 시이나의 방해가 들어온 걸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걸 뜻했다.
하지만 적도 단순히 나아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소수의 척후병들에게 전방 민가들의 수색을 하게 시켜 기습을 원천 차단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류셀의 작전서가 아니었다면 먼저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하는 단순한 수단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겠지. 수많은 적의 숫자에 결국 발각되어 그대로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숫자의 폭력 앞에선 어떤 기교도 빛을 잃는 법이니까.
하지만 시이나와 그 휘하 아인들은 어느 시점부터는 지상 경로를 통해 이동하지 않고 있었다. 알트레아 왕국의 제일 밑바닥 중 밑바닥의 삶을 살아온 자들만이 아는 길을 이용했다.
악취를 풍기고 어둡고 축축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살아야했던 마족들이 인간들로부터 해코지당하는 일 없이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지하수로다.
“시이나. 정말 이런 작전이 통할까? 대충 논리는 알겠다만 지상과 여기 사이에는 저 단단한 돌이 있잖아.”
제이드가 칙칙한 색의 천장을 가리켰다.
“이거에 걸어볼 수밖에 없어.”
시이나는 그렇게만 답하고 묵묵히 앞을 걸었다. 그녀의 뒤로는 아인들이 탄약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있다. 지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별도로 행동하는 마타고트를 빼면 전원이 여기에 모인 셈이다.
류셀은 이런 지하의 길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지상에서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라는 지령을 내렸을까.
사방이 어두워 자칫 길을 헤매기 쉬울 것 같은 지하 통로지만, 다른 자도 아니고 왕국의 마족이라면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어떻게 파악했던 것일까. 조용히 걷는 그들 전원의 머릿속에 완벽한 지하의 지도가 들어있는 것은 전부 살아남기 위함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는 사실일 터인데.
시이나는 자꾸 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이 전쟁은 그녀의 이기심으로 인해 발발했다. 왕족이라고는 하나 어린 아이를 차마 죽게 놔둘 수 없어 끝까지 류셀의 결정에 반항한 결과가 이거다. 후회가 있냐고 하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없다고는 못하겠지.
하지만 분명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는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불합리하다는 걸 안다고 해도, 분명 같은 실수를 해버린다. 그러니 변명을 할 여지는 없다.
할 수 있는 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할 뿐.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대는 적대 국가에게 그에 상응하는 폭력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지금 시이나 렌이라는 웨어울프에게 놓인 과제다.
“아까 제국군 놈들의 얼굴을 봤는데 말이야. 마족이 섞여있더라고.”
제이드가 던지듯 꺼낸 말에 시이나가 멈칫했다.
“...알고 있어. 제국의 문제아 취급받는 여단이래. 하지만 상대에 마족이 있다고 해도 우리 포함 전원을 죽이러 쳐들어온 적이야. 제이드도 알고 있지?”
“그거야 알지. 알지만 말이다.”
제이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 마족이 마족과 싸운다니 조금 힘없어진다고. 이 놈들을 막아봤자 결국 인간 놈들의 배를 불려주는 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그건... 아니야.”
시이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류셀은 인간들의 목숨에 전혀 가치를 느끼고 있지 않아. 류셀의 방식에 전부 찬성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족을 인간들에게 팔아넘길 일은 전혀 없어.”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강령을 봐왔기에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효율주의로 똘똘 뭉친 그는 가끔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면모를 보였지만, 반대로 비효율적인 배신 같은 행위를 할 거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이나, 너...”
제이드는 말을 고르다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변했네.”
“내가?”
어리둥절해 묻자 십년지기 친구는 시선을 피했다.
“아니... 변한 건 나일지도. 네가 옛날부터 하던 소리는 빈말이 아니었다는 거지.”
시이나는 제이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그를 힐끗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고 그는 짧은 머리칼을 긁적였다.
“마족의 부흥이니 뭐니 어릴 때부터, 이 시궁창에서부터 매일같이 얘기했었잖아. 지금 네 상황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걸 이뤄낼 수도 있을 위치에 올라섰다는 거지?”
“그건...”
시이나는 그 질문에 쉽게 긍정하지 못했다. 알트레아 왕국의 체제를 무너뜨린 건 어디까지나 류셀이 혼자서 이뤄낸 것이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내쳐지지 않고 있는 건 류셀의 동정 때문이 아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도 많았던 요즘,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치켜세우는 말을 듣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아직이야.”
“아직?”
시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최근 내가 느낀 게 있어. 나는 정말 생각만 앞서갔지 현실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었구나, 라고. 동경하는 사람이 엄청난 일을 척척 해나가는 걸 보면서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어.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결국 결론은 하나더라고. 그가 걷는 길을 적어도 같이 걸을 자격은 있다는 걸 내가 직접 증명하지 않으면 안 돼.”
목표지점에 도달해 걸음을 늦추며 시이나는 덧붙였다.
“적어도 걷는 옆모습이라도 보기 위해선 말이야.”
그 손에는 붉은 빛을 내는 작은 돌이 들려있었다.
“피해보고입니다. 연이은 적의 기습으로 선행 척후 1, 2 중대가 전멸. 륀느 중위의 중갑기병대의 5할 이상이 전투 불능, 그리고ㅡ”
“의미 없는 나열은 그 정도로 해줘, 부관. 나도 대충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알고 있어. 중요한 건 여단이야.”
바르포르도는 부관의 피해보고를 끊으며 반쯤 감은 눈을 빛냈다.
“저희 여단의 경우 피해를 입은 자는 극소수입니다.”
“그럼 상관없어.”
이 정도 규모의 피해라면 정규군은 얼마나 죽어나가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얼핏 보면 냉정하게 보일지도 몰랐지만 아직 전체 군의 1퍼센트도 깎여나가지 않았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희생을 내며 왕도에 도달하기만 하면 제국의 승리다.
바르포르도의 여단은 일반 인간 병사의 힘을 가볍게 압도하는 마족들을 거느리고 있다.
단지 우수한 마력으로 폭격마법을 쏴대는 것이 전부인 부대가 아니다. 성인 남자의 몇 배는 되는 몸집의 보병들은 움직임 또한 날렵했다. 개중에는 신체능력을 사용해 하늘을 날 수도 있는 병사도 있다.
항상 승리를 가져다주지만 제국에서도 여단을 쓰는 것을 꺼리는 건 그 결과가 상상 이상으로 참혹하기 때문이다. 제국군 내에서도 같은 편 취급받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도 바르포르도는 잘 알고 있다.
적이라고는 해도 같은 인간이 무자비하게 찢기고 음식이 되는 건 유쾌한 구경이 아니겠지. 그게 보통 사람의 발상이란 것이다. 하지만 악명이 붙으면 어떤가. 달갑지 않은 소문이 조금 떠돌아도 그게 별건가.
전쟁이라는 건 과정이 어떻든 간에 이기기만 하면 전부다. 그게 그녀의 철학이었다. 대륙 각지에서 모인 마족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서 제대로 기능하는 하나의 부대로 만든 시점에서, 그 부대원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미친 자들인지는 이미 상관없었다.
절대 상급자인 그녀에게 복종할 줄만 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지.
그런 부하들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백병전이 되면 이미 이긴 것이다. 류셀이 또 무슨 수를 꾸미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그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가 보일 카드는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겠지.
그와 직접 교섭을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말도 안 될 정도의 힘을 지닌 소년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바르포르도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지면을 보았다.
아무 이상도 없는 가도다. 제국 레벨에는 한참 못 미쳐도 눈에 띄는 큰 균열은 없었고, 단순한 무늬까지 새겨져있다. 어째서 자신이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바르포르도는 뚫어져라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관의 물음에도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바르포르도가 살짝 입을 벌린 순간.
그 일대에 성대한 폭발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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