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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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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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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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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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DUMMY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앉아있던 샤를리즈는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조금 빠르게 걸어가며,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급하게 묶었기 때문일까? 머리칼의 일부가 엉켜버렸고, 그에 샤를리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 손으로는 머리칼을 푸는데 집중하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계단에 이르러서도 엉킨 머리칼이 잘 풀리지 않자 샤를리즈의 짜증은 극도로 치달았다. 계속 들고 있었던 터라 팔도 아려왔고, 왜 하필이면 오늘은 구두를 신고 왔는지 발바닥도 아파온다. 조금이라도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해 한쪽 손을 난간에 올린 뒤,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다.


이윽고 엉켜있던 머리칼은 풀렸고, 샤를리즈는 팔을 내렸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발목이 삐끗 하더니 몸이 휘청거린다. 겨우 중심을 잡은 샤를리즈는 이를 으득 갈고는 중얼거린다.


“진짜 가지가지...”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된다는 말이 있던가? 샤를리즈는 그런 날이 오늘인가 싶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앨런이 없다. 그렇다면 자신과 공작의 접견이 끝났다는 것을 마부가 모를 테고, 그 말인즉슨 자신은 이 넓디넓은 저택에서 마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전부터 부글부글 끓고 있던 속이 더욱 끓어올라서 이제는 매스꺼워질 지경이다. 샤를리즈는 그런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내쉰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간다.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분명 이제 날씨가 풀릴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저녁이 되면 산산하기만 하다.


급하게 나오느라 옷차림에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낮에나 입을 법한 얇은 재킷은 산산한 바람을 막기엔 부족했다.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뒤 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그 흔한 하인들도 없다. 하긴, 지금 저택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을 테니...


모르긴 몰라도 이 가문에 오래 속해있던 하인들은 대충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다른 귀족들에게도 이 사실이 퍼지겠지. 그라니언 가문에 사람을 심어둔 것은 샤를리즈 뿐만이 아닐 테니. 그러니 어차피 공작부인이 공작과의 거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뒷소문은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샤를리즈는 그렇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그래, 이까짓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자신은 오늘 이 가문과 선을 긋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그러니 에드리안을 제외하고는 이 집안에는 관심이 끊는 게 맞았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러고 있지 않았던가? 본래부터 자신은 에드리안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난단 말인가? 거기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마음 속 한 구석이 뚫린 것만 같은 휑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땅만 보고 하염없이 걷다가 겨우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자신의 발걸음이 멈춘 곳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상하지. 정말로 싫은 곳인데도 항상 마음이 힘들 때면 이곳으로 오게 된다. 이곳은 그라니우스의 마구간이 아님에도 말이다. 샤를리즈는 다리 힘이 풀렸는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에 제 머리를 파묻는다.


샤를리즈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고, 이내 그녀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 *






앨런은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샤를리즈와 공작의 접견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헐레벌떡 저택을 돌아다녔다. 지나가던 하녀의 말에 의하면, 샤를리즈가 프리실라와도 몇 마디 나누었다고 했다. 그럼 그 아가씨의 기분은 극도로 좋지 않을 것이고, 얼른 이 저택에서 나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미적거리다가 마부를 대령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다. 평소라면 이런 일을 에드리안의 하인에게 맡겨도 되었다. 그 애는 나중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아이이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이 ‘그 손님’이 오는 날인지라 에드리안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그 도련님께서는 외박을 하고 올 것이라 했고. 아무튼 그의 업무를 대신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래서 지금은 저택 밖으로 나와 정원을 샅샅이 뒤지고 있게 되었다.


마부는 오래 전부터 대기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문득 마부에 생각이 미치자 앨런은 혹시 샤를리즈가 마구간에 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토록 싫어한 곳이지만, 가장 익숙한 곳이 아닌가? 그래서 거의 본능적으로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분명 자신을 보면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일을 해야 했다. 그라니언 가문을 위해서 라고는 했지만, 결국 그는 샤를리즈를 희생시켰고, 그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자학한다 싶을 정도로 샤를리즈의 냉대를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회개 아닌 회개가 실패한 듯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가 마구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나무에 기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앨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하?”


앨런의 부름에 란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들어 앨런을 바라본다. 그제야 앨런은 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앨런은 그에게 다가가 염려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각하와의 접견 약속시간이 곧 다가오는데...”


“오늘은 말을 타고 왔거든.”


“예?”


“어째서 여기 있느냐고 묻지 않았나?”


왠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하는 투가 까칠한 걸로 봐서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앨런은 목을 가다듬은 뒤,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말을 타고 오셨다기에...”


“내가 말을 타는 게 놀랄 만큼 이상한 일인가?”


“평소에는 항상 걸어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학생인 척 해야 하시니까요. 거기다 눈에 띄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 홀로 말을 타고 이 저택에 오셨다고 하시니...”


앨런의 말에는 이상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저택이 있는 곳은 귀족들의 저택들이 빼곡한 곳이었다. 그래서 대개 마차들이 많이 다니고, 말을 타는 이들이 있다 해도 대개 고위 귀족들이 그러한지라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홀로 말을 타고 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이상할 수밖에. 그나마 걸어 다니는 이들은 여느 귀족이 후원하는 학생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란은 뭐가 그렇게 불쾌한 것인지 툴툴거리며 말했다.


“때로는 안 하던 짓도 하고 싶기 마련이지.”


“그럼 가시지요, 각하께서 아마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거 말인데, 좀 미루고 싶군.”


“예?”


“접견 약속 말이네.”


“갑자기 왜... 오셔놓고서 어째서 그러시는 겁니까?”


“그냥, 확인하고 가야 할 것이 있어서. 사람을 좀 시켰는데 여기서 기다리라더군.”


“그럼 제가 나중에 그 사람이 오거든....”


“그냥 약속을 미룰 순 없나? 내가 알고 있기로 그라니언 공은 나와 만나는 것 이후로는 약속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란이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자 앨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란을 바라보았다. 본래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이였음에도 지금은 마치 에드리안보다도 어린 사람처럼 툴툴거리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앨런은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제야 앨런은 짜증 속에서 엿보이는 난처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제야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럼 각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앨런은 란을 지나쳐 마구간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란이 갑자기 길을 막아서는 터에 앨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란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 건가? 그라니언 공에게 말을 전하러 가지 않고?”


“잠깐 누굴 좀 찾아야 해서 마구간에 한 번 가볼 참입니다마는.”


“마, 마구간? 거긴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다고요?”


“그래. 방금 내가 말을 타고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마구간은 내가 들렀었지.’라며, 이상하게 말끝을 흐리는 란이었으나, 앨런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란이 마구간이 들렀다는 사실이었다. 앨런의 표정은 어느 새 사색이 되었다.


“저하께서 직접 그리로 가셨습니까? 이거야 원.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하께서 오시는 날이면 최대한 하인들을 바깥으로 보내는 터라...”


“괜찮네. 그럼 이만 가보게. 자네가 찾는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 곳에는 없는 것이 확실하니.”


그제야 란의 미간이 풀어졌고, 동시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확실했나보다 싶다. 감히 다음 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앨런은 고개를 끄덕인 뒤, ‘각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조금 빠르게 걸어가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한다.


덩그러니 남은 란은 다시 나무에 기댄 채 마치 독을 품은 개구리처럼 인상을 찌푸리고는 한숨을 내쉰다. 말을 타고 왔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아마 자신의 지위덕분에 앨런 또한 속아주는 척을 했을 것이라고, 란은 생각했다.


멍청하게. 이런 곳에 덩그러니 서 있으면 누구든지 이상하게 여기고 궁금해 하여 말을 걸 것이 뻔했는데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다니. 어울리지도 않게 멍청하게 굴어서는. 란은 짜증스럽게 제 검은 머리칼을 헤집고는 마구간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감이 넘치던 여자가 무슨 일 때문에 저 초라한 마구간에서 저러고 있는지는 그로썬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저 여자는 자존심이 강하니까. 그래서 아는 체를 하고 옆에서 달래주는 것보다는 이렇게 모른 척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란은 마치 리듬을 타듯, 발꿈치는 바닥에 붙인 채 한쪽 구두를 땅으로 몇 번 두드린다. 그러고 보면 저 여자는 대개 이 저택에서 나올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는 듯했다. 지난번에는 발목이 퉁퉁 붓더니-거기다 2층에서 떨어졌다고 했던가? 도대체 저 여자가 2층에서 떨어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오늘은 울고 있다.


분명 그라니언 가문과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면서 말이다. 란은 고개를 들어 저택을 바라본다. 적어도 그 여자가 말한 것보다 더한 것이 저 저택에 숨겨져 있음은 확실했다.


작가의말

p.s
란과 샤를리즈가 유독 그라니언 가문의 저택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유는 그들이 방문할 때 저택의 하인들을 최소한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란이나 샤를리즈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좋지 않은 인물들이라(란은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샤를리즈는 사생아이기 때문.) 하인들이 거의 없는 시간에 공작과의 약속을 잡고, 그래서 약속 날짜가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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