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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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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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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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막 학자들과의 토론을 마치고 나온 에드리안은 자신의 외투를 시종에게 맡긴 채 터벅터벅 궁정을 걷고 있었다. 얼른 저택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나지 않을 정도로 에드리안은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일찍이 눈치 챈 모양인지 시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에드리안의 뒤를 따랐다.


그의 주인이 이렇게 말이 없을 때는 혹시나 어색할까봐 괴상한 주제를 내곤 했던 시종은 요즘 에드리안이 통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굳이 괴상한 주제를 내지는 않았다. 저 마음 여린 도련님이 자신의 괴상한 주제를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모쪼록 마차에 오르기까지 아무 일도 없길 바랐다. 다행이도 에드리안을 괴롭히던 청년들은 오늘 궁정에 나오지 않았으니 별 일이 없다면 아마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불과 그러한 생각을 한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작은 그라니언.”


진한 갈색 머리칼을 가진, 2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에드리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현재 그라니언 가문 만큼이나 현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크산느 가문의 장자로 벌써 의원직을 하나 맡고 있는 자였다. 게다가 그는 몇 안 되게 에드리안에게 관심 없는 귀족 중 하나였다.


친한 척 하라면 충분히 친한 척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을 굳이 바라지는 않는 그 정도 말이다. 그러므로 그가 친히 에드리안을 불러 세운 것은 꽤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드리안은 다가오는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라일 경.”


“그렇지. 피곤해 보이는군. 요즘 떠도는 소문 때문인가?”


“예?”


‘소문 때문’이라는 말에 에드리안은 지레 긴장을 했다. 그리고는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일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

“아네. 이런 건 꽤 민감한 사안이지. 하지만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말이야. 견딜 수가 없었네. 그렇다고 해서 자네에게 적의를 드러낸다거나 뭐, 그런 의미는 아니니 그리 받아들이지는 말게. 그라니언과 척을 지면 꽤 피곤해지거든, 내 입장이. 안 그래도 아버지께서 요즘 꽤 예민하신데 말이야.”


“그렇군요. 그럼 궁금한 게 무엇인지 말씀해보세요. 절 피곤하게 만드는 소문들은 꽤 많아서요.”


에드리안의 말에 라일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곧 죽어도 제 입으로는 제 약점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에드리안도 그러한 자신의 성격 때문에 라일이 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작부인께서 어마어마한 스캔들에 휘말리셨더군.”


그 말에 에드리안은 눈을 깜빡였다. 벌써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공작부인이 임신을 한 것 같다는 소문이야 예전부터 돌기 시작했다. 그 그라니언의 저택에 다른 귀족들의 사람들이 한 명도 없을 것이라는 상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라일은 그 사실을 가지고 ‘스캔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는 것은 공작부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가 공작부인에 대한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자비하게 소문을 낼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셰르먼드 부인이 신이 나셨더군.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가장 먼저 떠들고 다녔어.”


라일의 말에 에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였다.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힌 것처럼. 그 모습을 꽤 흥미롭게 바라보던 라일이 말했다.


“순진하군, 작은 그라니언. 그라니언 공과는 다르게 말이야. 아무튼 그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는 호사가들이 그라니언 공께 슬쩍 물어보았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분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게야.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네. 자네라면 무언가 말을 해줄까 싶어서 말이네. 비록 말을 하진 않았지만, 적절한 답을 내게 준 것 같군.”


“그렇습니까?”


“그런 셈이지. 그럼 이만 가보겠네. 답도 얻었으니.”


라일이 어깨를 으쓱인 뒤, 에드리안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쳤다. 그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에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것을 읽기라도 했던 것일까? 라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딸이길 바라게. 보아하니 갓 태어난 아이의 피를 손에 묻히지는 못할 성정인 것 같으니.”


저것은 비꼼일까? 아니면 진심어린 충고일까? 에드리안은 한숨을 내쉰 뒤 그의 시종에게 말했다.


“가자.”


“스웨어 가문의 저택에 들르실 것이지요?”


시종의 말에 에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홱, 시종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시종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다. 저도 모르게 책망하는 눈빛이라도 보낸 건가 싶어 에드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놀라서 그런 거야. 어떻게 알았어?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그거야 도련님께서 스트레스를 받으시면 항상 스웨어 가문의 저택에 들르지 않으십니까? 방금 크산느 가문의 장자께서 도련님의 성질을 긁어놓으셨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예상이 맞습니까?”


“어. 그런데 좀... 많이 놀랐어. 그렇게 내가 예상하기 쉬운 사람인가 싶어서. 아무튼 그래, 스웨어 가문의 저택으로 갈 거야.”


저택에서조차 공작부인과 프리실라의 등쌀에 밀려 꽤 불편한 에드리안이었다. 수도에서 에드리안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오직 빈트뮐러 상단과 스웨어 가문의 저택뿐이었다. 유일하게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이 아닌 에드리안으로서 숨 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 * *







“오랜만에 왔더니 이런 고급정보나 주고 말이야.”


셰르먼드 부인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하자 클랜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엄청 피곤하다는 듯 나른하게 하품을 한 뒤, 고양이처럼 소파에 누었다.


“말했잖아. 바쁠 거라고. 그래도 옛날 생각이 나서 고급 정보를 줬더니 영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질 못하네.”


클랜디스의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셰르먼드 부인의 오른쪽 뺨이 파르르 떨렸다. 클랜디스의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셰르먼드 부인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말했다.


“그런 소문까지 냈다가 난 죽어. 아무리 그 여자가 이제 지는 해라고는 하지만, 프리실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단 말이야. 서서히 목을 졸라야지. 그러기 위해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어. 우선, 임신을 했고 그게 다른 남자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부터 내는 게 맞지. 그 애의 친부가 누구인지는 그 다음의 문제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마어마한 사건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보다는 조금씩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흘리는 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클랜디스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사실들이 밝혀져 태어날 아기가 가지게 될 권리를 그 또한 나눠가지길 바랐으니까. 그래서였을까? 클랜디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쳤다.


“흥. 오랜만에 주가 좀 올리나 싶었는데.”


그 궁시렁거림을 못 들었을 셰르먼드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


“미쳤어? 공작부인이 가진 아이의 친부가 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게 네 주가를 올려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이건 좀 실망인데?”


“내 깊은 속을 당신이 어떻게 알겠어? 아무튼 당신은 무리라는 거지? 그 소문을 내기엔.”


클랜디스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셰르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만큼은 못 하겠다는 듯.


“물론. 아무리 나라도 바로 밝히는 건 좀 그래. 안 그래도 입을 나불거렸다고 남편이 한 바탕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나도 영 곤란하다고. 하긴, 그 누가 대단하신 그라니언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겠어? 아마 귀족들 가운데 네 부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그러니 기다려. 프리실라나 공작부인께서 내 발밑에 기면 그 때쯤엔 나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일 없어. 그 금발 여자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몰라서 그래? 아무튼 알았어. 나도 그럼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겠네.”


한숨을 폭 내쉰 클랜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표정으로 셰르먼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클랜디스를 바라본 뒤 빙긋 웃었다.


“성공하길 빌게. 나도 그 자존심 강한 것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거든.”


“걱정 마. 이 몸이 워낙에 발이 넓어서 내 부탁을 들어줄 여자들은 천지거든. 조만간 좋은 구경하겠네.”


클랜디스가 예의의 홀리는 미소를 지으며 셰르먼드 부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셰르먼드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데 좀 위험하지 않아? 네가 그 아이의 친부라는 게 밝혀지면 그라니언 공께서 가만 두지 않을 텐데. 공작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도를 용인할 것 같지도 않단 말이지.”


“내가 죽을까봐 걱정은 되나보지?”


“뭐...”


갑작스러운 클랜디스의 물음에 셰르먼드 부인이 입술을 달싹이자 클랜디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셰르먼드 부인을 응시하며 말했다.


“걱정 마. 그는 날 죽이지 못해.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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