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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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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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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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0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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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샤를리즈의 반응에 괜히 멋쩍어진 것인지 혹은 안도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샤를리즈는 여전히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단지 상단에서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당신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더 중요한 일이요? 상단에서 사는 제가 상단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까?”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말고. 물론, 최종적으로는 상단을 위한 일이지만.”


짜증스럽게 웃으며 샤를리즈가 말했고, 에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말한다.


“란, 그 자와 관련된 일이겠군요.”


“눈치가 제법 늘었네?”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뻔한 거죠. 그 자와 만나고 나자마자 이런 말을 꺼내니까.”


그 말에 샤를리즈는 웃었다. 예전에는 그 쉬운 것조차도 짐작하지 못했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임에도 불구하고 뭐 그리 놀라느냐는 듯 말하는 에단의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일을 맡길 참이야. 그러기 위해서 좀 준비할 게 많거든. 책도 많이 읽어야 할 테고.”


“책이요?”


“응.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하겠지만, 란이 우리 상단의 병사들을 원하고 있어. 그를 위해선 그들을 규합할만한 인재가 필요한데, 당신만한 사람이 없잖아. 우리 상단의 병사들은 당신을 가장 따르니까. 거기다가 쓸데없는 욕심을 가질 만한 사람도 아니고, 나를 배신할 사람도 아니니."


샤를리즈의 염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쓸데없는 욕심을 가져서 선봉에 섰을 때 왕자인 란보다 더 큰 공을 세웠다간 그것 나름대로 피곤해질 것이다. 그리고 란의 편에 서서 공을 세웠다가 쓸데없이 야망이 생겨 그녀를 배신하고 상단의 병사들을 빼돌리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골치 아픈 일인 것이다.


그랬기에 이런 일에는 에단이 적격이었다. 그는 샤를리즈의 말에 무조건 복종했고, 불만을 품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그러한 관계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관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병사들을 이끌기 위해 공부를 해야한다는 뜻이로군요."


"응. 전쟁이 날지도 모르니 어느 정도 그에 관해서도 공부를 해놓는 것이 좋겠지. 물론, 란이 적당하게 시킬 테지만, 아예 몰라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것보다는 당신도 능률적으로 참여하는 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도 다른 마음을 품지는 못하겠지."


샤를리즈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에단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말했다.


"아직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군요."


"그런 건 아냐. 그를 믿어. 하지만 완전히 신뢰할 순 없지. 혈육조차도 배신하는 게 이 세상인데 어떻게 그를 완전히 신뢰하겠어. 만일의 상황은 항상 대비해두는 것이 좋겠지. 그가 만약 내 병사들과 당신을 사지로 몰고 갈 수도 있단 말이야. 애초에 우리는 귀족이 아니니 그렇게 이용당해도 뒤탈은 없겠지. 물론, 그는 그럴 인간이 아니지만."


검지 손톱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샤를리즈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람의 본성보다 그 주변에 의해 사건들이 벌어지곤 하니까. 그의 주변의 모든 귀족들이 그러길 원한다면, 란조차도 모르게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우리 같은 애매모호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해. 그래야 적어도 목이 언제 베이는지는 알 수 있겠지. 뭐, 우리야 그라니언 가문의 비호가 있으니 다행이지. 그래도 거기에만 너무 목을 맬 수는 없으니..."


그 말에 에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내쉰다. 이거야 원, 상단의 일보다 더 복잡한 일을 맡게 된 것 같다.






* * *






막 주점을 끝낸 페트리시아는 와인 잔을 하나하나 깨끗이 닦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돌려본다. 요즈음에는 홍등가에서 조금 벗어난 생활을 하고 있는 탓에 자신의 아이들이 물어다오는 소식들만 들어보곤 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그녀의 나이도 곧 스물 중후반이 넘어갔고, 슬슬 이 일 외에도 다른 일을 생각해봐야 할 나이였기 때문이다. 몇몇은 슬슬 한 남자에게 정착해야 할 때가 아니냐며 슬슬 그녀를 채근했지만, 정작 그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오히려 남자들을 멀리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면 항상 남자들 가운데 있던 그녀가 정작 연애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그것이 페트리시아의 일중독 때문이라고 했고, 그랬기에 몇몇은 그녀의 그러한 성격이 샤를리즈를 꽤 닮아있다고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페트리시아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일중독이 아니었다. 차라리 일중독이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는, 의외로 순정파였다.


"오늘도 로버트 케일리가 마담에게 치근덕거렸다지요? 슬슬 받아주는 게 어때요? 그 정도 남자, 흔치 않다고요. 잘생긴데다가 능력까지 있고, 상냥하기까지 한 걸. 게다가 항상 마담만 바라보잖아요. 벌써 몇 년째 구혼이람? 나라면 덥석 잡았을 텐데."


페트리시아의 옆에서 그녀를 도와 잔을 닦고 있던, 막 일선에서 벗어난 여자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페트리시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말한다.


"내 타입이 아냐."


"나 참, 알고 보면 마담도 엄청 까다롭다니까. 세상에 자기 타입을 딱 맞춘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다들 양보하면서 사는 거지. 거기다 로버트 케일리 정도면 양보도 거의 하지 않아도 되겠구먼. 그렇게 계속 재다가는 늙어서까지 홀로 지내게 된다고요."


"정 그렇다면 내가 로버트 케일리와 너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도 있어."


마담이 귀찮다는 듯, 그리고 선심을 쓴다는 듯 말하자 여자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그러다 이내 됐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수 년 째 한 여자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남자가 나 따위에게 시선이나 주겠어요? 게다가 취향이 마담인데 내가 눈에 찰 리가 없겠죠."


"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다들 양보하면서 사는 거라고. 그가 양보를 하면 그만이야. 안 그래?"


"말이야 쉽지."


"그럼 내게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난 그와 진지한 관계로 넘어가는 걸 원하지 않아."


페트리시아가 보기 드물게 딱 잘라 말하자 괜히 머쓱해진 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는 다시 잔을 닦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꽤 말이 많은 여자였던 건지 이내 그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누구요? 마담의 타입은. 설마하니 그 빈트뮐러의 말라깽이 검사는 아니겠지요?"


'빈트뮐러의 말라깽이 검사'라는 말에 페트리시아는 눈을 깜빡이다 그것이 누굴 가리키는 지 깨닫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에단 피데스는 아냐. 한 때 재밌을 것 같아서 그에게 추파를 던진 적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뭐, 그것 때문에 로버트 케일리가 에단을 꽤 괴롭힌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그는 아니야."


"잘 생각하셨어요. 그 자는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내심 걱정이었단 말이죠. 게다가 항상 그 빨간 머리 계집애를 쫓아다니잖아요."


"샤를리즈 아가씨를 말하는 거라면,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그녀의 호위무사인걸."


뭘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하냐는 듯 페트리시아가 말했다. 그 둘은 결코 연인사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페트리시아였기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만 보는 샤를리즈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을 지도 모르는, 속은 어쩌면 중늙은이일지도 모르는 에단 사이에 로맨스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페트리시아는 잔을 닦은 뒤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고, 입구와 등을 졌다.


"그럼 도대체 어떤... 어머나!"


여자의 탄성과 함께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고, 페트리시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본래의 형체가 어땠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난 와인 잔을 보며, 페트리시아는 인상을 찌푸렸고, 여자를 노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에 빼앗기고 말았다. 분명 동이 트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 있는 곳이 환해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몇 년 만일까? 확실한 것은 로버트 케일리가 그녀를 쫓아다녔던 햇수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리라.


"오랜만이야, 리샤. 본래 있던 가게에 가봤더니 떠났다고 해서 찾는데 꽤 힘들었어."


"...클랜디스."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던 녀석이 이제는 완연한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더욱 아름다워졌다. 남자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제야 페트리시아는 어째서 여자가 와인 잔을 깨뜨렸는지 알 수 있었다. 두 여자의 시선을 완전히 빼앗은 클랜디스는 자신의 환한 금발을 매만지며 미소 지었다. 그것은 악마와도 같은 미소였다.


"이건 취미로 하는 건가? 아니면 아예 업종을 옮긴 건가? 뭐, 그런 건 상관없겠지. 거기 아가씨, 잠깐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 리샤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서."


"예, 예. 그, 그러지요. 마담, 내일 뵈어요."


대답과는 달리 영 아쉬운 모양이었는지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주점에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랜디스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귀여운 여자네. 재밌겠어, 저런 여자들과 함께 지내면. 사교계의 계집애들은 저런 맛이 없거든. 항상 얌전한 척 빼지."


"어쩐 일이야?"


페트리시아가 잔뜩 경계하는 듯 바라보며 묻자 클랜디스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곧이어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거짓말. 페트리시아는 속으로 외쳤다.


저건 거짓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그 표정의 의미는 절절하게 다가와 페트리시아의 마음을 뒤엉켜놓았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외쳤다. 저건 거짓말이라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하네. 뭐,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너무하긴 했었으니. 하지만 이해해줘. 당신도 알다시피 나와 당신은 이뤄져선 안 되잖아. 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추문은 위험해."


"하! 추문의 주인공인 네가 추문을 두려워한다니 놀랍군. 빙빙 돌려서 말하지 말고 빨리 말해."


"불편한 건가? 이 상황이? 아니면 내가?"


"둘 다."


반사적으로 말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클랜디스의 존재는 페트리시아에게 그랬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그 어렸던 소년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젊은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위해 결코 해서는 안 될 짓들 또한 했었지.


그렇게 그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추악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클랜디스가 떠났을 때 그토록 이용당했음에도 결국에는 그를, 여태까지 그리워하고 있던 지금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가장 문제인 것은 그 모든 것을 저 남자, 클랜디스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지."


클랜디스가 다가왔다. 본능이 외쳤다. 그에게서 벗어나라고. 그럼에도 그녀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벗어나려고 애를 썼는데도 결국 이 자리인 것이다. 그의 찬란한 외모 때문에?


아니다. 많은 귀족 여자들이 클랜디스의 외모에 빠진다고 남자들은 비난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클랜디스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클랜디스가 가진 수많은 매력 가운데 가장 떨어지는 매력.


클랜디스의 손이 마침내 페트리시아의 뺨에 닿았고, 페트리시아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천사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보지 않기 위해. 클랜디스가 속삭였다.


"당신이 필요해. 당신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야."


작가의말

15막 끝입니다.

next :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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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6 468 20 10쪽
205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2 590 24 10쪽
204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7.31 493 19 10쪽
203 제 17막. 어떤 음모. +6 14.07.20 486 25 9쪽
202 제 17막. 어떤 음모. +13 14.07.13 660 24 10쪽
201 질문과 답변 & If +9 14.03.12 1,266 23 22쪽
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199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6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196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6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194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7 14.01.31 1,061 30 10쪽
193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6 14.01.26 755 33 11쪽
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3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7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9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5 28 12쪽
183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11 739 18 10쪽
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2 2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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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7 795 28 10쪽
178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0 989 2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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