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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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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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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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1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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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DUMMY

왕궁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귀족 청년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학자들과의 토론회가 거의 끝나자 자리에 내내 붙어 앉아 있었던 청년들은 지루함을 참지 못한 채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부는 이미 가져온 짐들을 챙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총명함에 눈이 반짝이는 이들도 있었는데, 시릴 또한 그러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의 몸에 귀족의 피가 흐른다고는 하나 아주 먼 방계의 피고, 거기다 반쪽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론회에는 참석할 자격이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으나, 프랜시스 드 블라레트의 도움으로 오늘 하루만 참석하게 된 것이다.


왕궁에서 강연을 하거나 혹은 토른을 하는 학자들은 시릴이 다니던 대학에서도 꽤 보기 힘든 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시릴은 거의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신이 나 있었다. 그 옆에서 지루함을 참고 있던 프랜시스는 괜히 양심에 찔려 시릴의 팔을 쿡쿡 찌르고는 물었다.


“어디, 눈에 들어오는 청년들이 있던가?”


그에 시릴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란의 마음에 들, 충분히 똑똑한 귀족 청년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란이 직접 발품을 팔아 인재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이러한 토론회에 한 번 참석해서 보는 것이 더욱 빠를 것이라는 란의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란이 이러한 토론회에 직접 참석할 수는 없었고, 그나마 이러한 곳에 참석할 수 있는 프랜시스는 사람을 보는 눈이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시릴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시릴은 목을 가라앉힌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그라니언 가의 도련님이 눈에 띄더군요. 아주 어린데 그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왕성 밖에서도 소문이 나서 알고는 있었지만, 저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이야 뭐. 그 그라니언 공의 아들 아닌가? 게다가 인품 또한 남다르지. 아주 훌륭한 재목이야. 그리고 그라니언 공이 우리 쪽 사람인 이상 그 아들 또한 우리 쪽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에 시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에드리안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 좋은, 순수한 소년의 미소를 한 채 주변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상냥한 왕자님의 모습이다.


처음 저 소년을 보았을 때, 시릴은 솔직히 놀랐었다. 다들 그라니언 공의 판박이라서 놀란다고들 했지만 시릴은 다른 사람을 떠올렸으니까. 저건 완전히 샤를리즈 빈트뮐러의 남자 판이 아닌가?


붉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의 이상한 색 조합에 세세하게 보이는 행동 버릇들은 모두 그라니언 공보다는 샤를리즈를 떠오르게 하는 것들이었다. 만약 저 소년의 성격이 상냥하지 않았다면, 분명 시릴은 샤를리즈와 에드리안을 남매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저렇게 상냥한 도련님과 털을 잔뜩 곤두세운 고양이 같은 샤를리즈가 한 배에서 나온 남매라는 건 믿을 수 없는 사실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렇겠지요. 다른 몇몇도 눈에 보이긴 합니다. 나중에 이름을 추려 블라레트 가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아까 펜을 떨어뜨렸는데... 이게 어디로 갔는지.”


“응? 펜? 그냥 새로 하나 사지 그러나? 요즈음 빈트뮐러 상단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는 구입할 수 있지 않나?”


“아, 이게 아끼던 거라서. 블라레트 경 먼저 가시지요. 길이야 아까 외워뒀습니다. 혼자서도 잘 갈 수 있고, 여기 블라레트 경의 추천서도 있으니 경비병들에게도 해코지 당하지 않을 겁니다.”


시릴이 영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프랜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았네.’라고 말한 뒤, 어디가 출구인지를 거듭 확인하고서야 자리를 떴다. 그제야 시릴은 본격적으로 아까 떨어트린 펜을 찾기 위해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주변을 샅샅이 살핀다.


그게 떨어질 때 꽤 멀리 굴러간 것 같아서, 체면 차리는 것을 채 잊은 채 책상 밑을 기기 시작한다. 다행인 것은 책상의 폭이 꽤 넓어서 시릴 그 밑에 기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자리를 뜨는 귀족들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시릴이 자신의 펜을 찾은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다섯 칸이나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을 때였다.


그는 ‘밤 꾀꼬리’가 금박으로 박힌 펜을 집어 자신의 자켓 주머니에 넣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어서려던 찰나, 그 움직임을 멈춘다.


“어이, 그라니언. 소문이 어마어마하던데?”


꽤 지저분한 웃음소리가 섞인 비아냥거림에 시릴은 저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비아냥거림의 상대가 그라니언가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자신이 꽤 좋게 본 사람이 저런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본인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보다 그라니언의 소문이라고? 그렇다면 아마도 요즘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소문을 말하는 것이리라. ‘공작부인의 스캔들’ 때문에 떠들썩해진 것은 사교계뿐만이 아니라 주점도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란의 주변 사람들도 매우 시끄러워졌었다. 프리실라의 자질을 두고 말이다.


뭐, 결론은 어영부영하게 났지만, 적어도 란이 프리실라를 거절할 핑계거리 하나는 생긴 셈이었다. 뭐, 그 하나로 그라니언의 청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만은. 적어도 양심이 있는 여자라면 스스로 왕비 자리를 마다하겠지만, 그 프리실라 양에게 그것을 바랄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은 프랜시스를, 시릴은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 집안의 계보는 어떻게 되는 거냐? 너는 로즈퍼드 가문 여자와 그라니언 공 사이에서 나온 서자이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공작부인과 네 친모의 조카 사이에서 나온 아이 아냐? 나 참, 이렇게 복잡한 집구석도 처음 본다. 삼류 소설가들조차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일들이야.”


‘저게 미쳤나?’라고, 시릴은 생각했다. 아무리 서자라 하더라도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은 그라니언 가문을 이어갈 소년이자 차대 공작이 될 소년이었다. 말 그대로 왕국 남부의 지배자가 될 이란 말이다.


그런 이의 앞에서 저렇게 원색적인 비난을 할 수 있을만한 직위를 가진 인물은, 적어도 시릴이 알고 있는 한없었다. 비슷한 급이라고 해봐야 지금의 태자나 혹은 제 자리를 찾았을 때의 란, 그리고 아스피트 가문의 청년들뿐이겠지. 그나마도 저런 짓을 했다가는 꽤 중대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남부는 왕국의 곡창지대이다. 그런 남부의 지배자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비슷한 급도 아닌 귀족 청년이 저런 식으로 말한다고? 그건 정말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서자라서 만만해 보인다 하더라도 귀족이라면 어느 정도 세력 싸움 같은 것을 알만도 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두 가지로 예측할 수 있었다. 첫째, 저 놈은 정말로 미친놈이다. 그렇다면 시릴은 진심으로 그를 향해 애도를 표할 것이다. 둘째, 여태까지는 열등감으로 깨작거리면서 괴롭혔는데, 저 사람 좋은 에드리안이 계속 봐줘서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맞을 것이다.


시릴은 한숨을 내쉰 뒤 망설인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나선다 하더라도 꽤 괴상한 등장인데다가 그는 귀족이 아니다. 오히려 저 치가 그토록 경멸하는 서자이지. 블라레트의 이름을 쓸 수도 있지만, 블라레트 가는 아직 선왕 시절의 힘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저 청년의 가문이 블라레트 가문보다 더 강력한 세를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에드리안과 묶여서 빈정거림을 받아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에드리안에게 더한 수치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시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준단 말인가? 그와 에드리안의 공통점이라고는 서자라는 것뿐인데. 고작 그런 걸로 이토록 감정이 움직인단 말인가?


같은 서자라 하더라도 출발선 자체가 다른 에드리안을 상대로? 그 때였다. 학자들의 질문에 유하게 대답하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것도 꽤 이질적으로 말이다.


“그게 끝인가?”


“뭐야?”


“지난번부터 깨작거리면서 내 신경을 건드리던 것은 내 출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텃새나 부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봐줬던 것이었어. 비록 그 의도를 착각한 내 아버지가 사이에 끼어들어 꽤 곤란한 상황이 되었지만 그건 자네의 의도가 아니었으니 참을 수 있어. 그런데 오늘은 좀 심한데?”


내용은 오만했고, 목소리에 섞인 웃음기는 그것을 더욱 오만하게 느껴준다. 시릴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그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상기시켜서.


“아무리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라니언을 건드리면 안 되지.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것까지는 내가 어찌할 수 없으니 건드리지 않겠다 이거야. 그런데 내 앞에서 그라니언을 건드리면 그건 좀 곤란하지. 내 아버지가 이끄는 가문이고, 내가 앞으로 이끌 가문이다. 그리고 그 가문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귀족의 수는 네가 앞으로 만들 시시껄렁한 그 친구들의 수보다도 많을 거야. 넌 방금 그들 모두를 모욕한 거야. 그걸 감당할 수 있나? 감당할 수 없으면 좀 더 예의 있게 굴지 그래?”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짐작하건데, 에드리안이 저런 식으로 나온 것은 처음일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조용한 것이겠지. 충격인가? 아니면 여태까지는 쉽게 밟아줄 수 있었던 녀석이 갑자기 대들어서 분노한 것인가? 그 어떠한 감정이건 에드리안이 한 말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없었고, 그랬기에 그 내용은 섬뜩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화가 나도 여기서는 사과를 해야만 한다. 안 그러면 정말로 껄끄러워지니까. 그러나 그러한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기에는 아직 치기가 있는 것인지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 여기서 화를 참는 것도 장하다고, 시릴은 생각했다. 그 때 에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좋게도 시릴이 있는 자리는 상대편 귀족의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에드리안의 얼굴은 볼 수 있었는데, 에드리안이 입을 연 시점에서 지은 표정은 ‘누군가’의 표정을 꼭 닮아 있어서 시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얼굴 붉히지 마. 너도 알다시피 내 출신이 한미해서 말이야. 적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귀족적인 방법은 잘 몰라.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이런 거거든. 잘 참아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을 무기로 밟고 짓이기는 그런 거 말이야. 이런 게 익숙하지 않으면, 앞으로 내 앞에서 조심해야 할 거야. 오늘은 운이 좋아서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내게 당한 거지만, 다음에 네가 오만하게 굴었을 때 주변에 청중이 있을지 누가 알겠어?”


존대와 반말의 차이일 뿐이지 시릴이 아는 '누군가'와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은 명백하게 닮아 있었다. 바로 샤를리즈 빈트뮐러 말이다. 처음에야 에드리안이 워낙에 순해보였기에 결코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갑작스럽게 드러낸 본성은 그 어떤 이보다도 샤를리즈를 닮아 있었다.


드문 채색 조합에 비슷한 외모, 그리고 적을 상대하는 행동 모두가 샤를리즈 빈트뮐러와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은 단순한 지인 사이는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여태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가지고 문제 삼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이 몇 마디를 나누고 토론장에서 나가자 시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본래라면 란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할 그는 빈트뮐러 상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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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7.31 493 1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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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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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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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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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6 14.01.26 755 33 11쪽
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6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2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6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8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4 2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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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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