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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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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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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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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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DUMMY

“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다.”


시릴이 기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샤를리즈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럴 걸?”


그렇게 말한 샤를리즈는 자신의 빈 잔을 가지러 온 시종이 든 접시에 잔을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주변을 살핀다. 얼굴을 아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모르는 이들이었다.


확실히 현왕의 치세 아래에서는 기를 못 편 귀족들이라 샤를리즈조차도 연줄을 대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것이다.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돈을 먹이고 약점 정도는 잡아둬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따를 액수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기에 있는 이들 가운데 거물인 그라니언 공에게는 뇌물을 먹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거물 중의 거물이니 비쌀 테고, 솔직히 큰 걸 준비한다 한들 받아줄 리는 만무했으니.


그나마 다른 이들은 중앙에서 영 힘을 못 쓰는 형편이니 돈이 필요할 테고, 그러니 자신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입구에 갑자기 귀족들이 몰리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그라니언 공작조차도 흥미롭다는 듯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시선을 끌 이는 란뿐이지만, 그는 아직 등장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럼 누구기에? 샤를리즈도 시릴도 궁금했는지 고개를 살짝 들어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 미지의 인물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잘 볼 수는 없었지만, 꽤 장신인 모양인지 머리칼 정도는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특이하게도 시릴의 머리칼과 비슷한 색이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는지 확인하려고 샤를리즈는 시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시릴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시릴은 샤를리즈보다 키가 컸으니 그 얼굴을 보았고, 또 그 미지의 인물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샤를리즈가 묻는다.


“뭔데?”


그 물음에 시릴은 흠칫 놀라더니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뭐가?”


“뭐 보고 놀랐잖아. 저 사람 누구야?”


“여기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온 사람. 이거, 의외로군.”


“그러니까 누구냐고.”


“피셔. 피셔 드 아스피트.”


그 이름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이고는 되묻는다.


“아스피트? 아스피트가 지금 중앙에 다시 왔단 말이야?”


“그래. 하긴, 남부의 독수리-그라니언-도 왔는데 북부의 표범-아스피트-가 오지 않을 리 없지. 새 세상을 두고 말이야.”


시릴이 빈정거리듯 말했으나, 샤를리즈는 전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시릴은 굳이 따지면 아스피트 가의 사생아였으니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현 왕가와 작년의 일로 틀어진 아스피트가 다시 수도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현왕의 측근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바로 현왕에게 알리러 갔겠지. 샤를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하,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진짜 시작이구나. 선왕의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선왕을 보필하던 귀족들이 모두 수도로 몰려든 셈이다. 이것만큼이나 확실한 위협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샤를리즈는 갑자기 시릴의 팔을 붙잡으며 묻는다.


“그런데 어째서 아스피트 공이나 에녹 드 아스피트가 오지 않고 아스피트의 차남이 온 거야? 그라니언은 그라니언 공이 직접 왔는데.”


“뭐, 자격이 아주 없진 않지. 에녹 드 아스피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잖아. 그 때문에 다음 대 아스피트의 주인은 저 자, 피셔의 것이 될 거라는 게 중론이니까. 게다가 솔직히 에녹보다는 피셔가 북부의 주인으로는 맞지. 저 남자는 진짜 무인이야. 장난 아니라고. 물론, 에녹은 좋은 사람이지만 북부의 주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아.”


에녹 드 아스피트가 결국 그리 되었단 말인가? 샤를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삶이 너무나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약혼녀, 비앙카를 잃고 이제는 자신의 자리마저 잃었으니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야, 근데 넌 몰랐냐? 너, 북부엔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냐?”


“우리의 주둔지는 남부이니까. 거기다... 북부에는 웬만해선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왜? 북부도 나름대로...”


“관심 없어. 그리고 나, 북부 싫어해.”


샤를리즈가 뚱하게 말했다. 그러자 시릴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뭐 그런 거지같은 이유가 다 있냐?”


“남이야 그러든 말든.”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는 샤를리즈를 보고, 시릴은 뭔가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는다. 저렇게 대답하는 걸 보면 굳이 파헤쳐서 좋을 일은 아닐 테니. 시릴은 멋쩍은 듯 머리칼을 쓸어넘기고는 고백하듯이 말한다.


“뭐, 나도 좋아하진 않아.”


“허? 네 고향인데?”


“고향이면 다 좋아해야 하냐?”


시릴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샤를리즈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 때 그들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연갈색 머리칼을 가진, 딱 봐도 30대 중반은 넘어 보이는 남자이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시릴에게 말을 걸었다.


“시릴 슈드레거. 요즈음 바쁘다고 통 모임에 나오질 않더니 이번 모임엔 왔군.”


“아, 알렉시스. 진짜 오랜만이네. 별 일 없었나?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거야? 오늘처럼 중요한 날이 어디 있다고.”


시릴의 동료인가, 샤를리즈는 그를 바라보았다.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시릴의 동료라면 아무래도 자신과 같은 사생아나 혹은 평민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는 꽤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알다시피 우리 입장이 좀. 귀족들이 그다지 좋아하지를 않아서 그런지 다들 갑자기 일이 생겼다더군. 마치 짠 것처럼 말이야. 특히나 우리 동료들 가운데에는 알다시피 여기에 온 집안들의 아이들이 많으니 그 쪽에서 압력을 가했을 지도 모르지. 아무튼 저하께서도 영 불쾌해 하고 계신다네.”


“저하를 미리 만난 겐가?”


“미리 인사를 드렸네. 그런데 옆에 분은?”


알렉시스는 마치 이제야 샤를리즈를 발견했다는 듯 시릴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릴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를 소개한다.


“샤를리즈 빈트뮐러. 요즘 장안의 소문이 바로 빈트뮐러 상단의 작품 아니겠습니까? 이 아가씨는 그 빈트뮐러 상단을 대표해서 오셨습니다. 현 총수와는 친형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각별하고요.”


알려준 대로 설명한 시릴은 샤를리즈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이 쪽은 알렉시스 그레이. 저하께서 만드신 모임의 일원으로 아주 유능하신 분이야.”


“반가워요, 그레이 씨.”


샤를리즈가 먼저 악수를 권했고, 알렉시스는 어색하게 웃은 뒤 그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다짐한 듯 입을 연다.


“아주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왜 아가씨가 오신 겐지.”


뜻밖의 지적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평소라면 사람들이 하는 말 정도는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이상하게 이 말의 뜻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묘하게 가시처럼 박혀왔다. 순간 세상이 모두 어두워지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왔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샤를리즈가 당황한 기색을 알아차린 것인지 시릴은 헛기침을 한 뒤 알렉시스의 시선을 뺏은 뒤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알렉시스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샤를리즈는 입술을 앙 다문 뒤 주변을 둘러본다.


하긴, 이질적이긴 하지. 샤를리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족 아니면 사생아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모두 남자였다. 시녀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녀만 여자였다. 바보같이. 이런 취급, 당연히 당할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빈트뮐러 상단에서 항상 떠받들어 모셔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취급에 익숙해지지 못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 그라니우스에서는 아주 익숙했던 취급이 말이다. 샤를리즈는 다시 채워진 잔을 잡은 뒤 눈을 내리깔고 그것을 바라본다.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와서 고개를 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그곳에 서 있어서 놀란다.


“고작 그런 말 들었다고 기죽은 게냐?”


그 퉁명스러운 말에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따뜻한 말을 해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말이라니. 샤를리즈는 고개를 저으며 그라니언 공을 바라보고 말했다.


“설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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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199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5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196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6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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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5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6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2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6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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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8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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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1 2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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