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최근연재일 :
2014.08.09 22:52
연재수 :
207 회
조회수 :
362,551
추천수 :
4,774
글자수 :
1,024,746

작성
13.12.05 00:19
조회
1,061
추천
29
글자
10쪽

제 15막. 협상 테이블.

DUMMY

“알렉시스 님께서 기어이... 이 사실을 얼른 각하께 알려야 하네.”


머리칼이 반쯤은 빠진 것 같은 중년의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그 옆을 지키고 있던 하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이제 그라니언의 방계는 모두 끝이 난 셈이로군요. 이처럼 위대한 가문의 핏줄이 이렇게 말라버리다니.”


“이번 각하께서도 자식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니, 에드리안 도련님께서 부디 자식을 많이 가지길 바라야겠지.”


의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잘 아는 하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까부터 길길이 날뛰시던 아가씨께서는 2층에 계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참, 귀족 아가씨들의 기분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한 알렉시스 님과 대화를 나누려고 안간힘을 쓰더니.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코빼기도 안 비추는 군요. 저러실 수는 없지. 각하께서 친히 보내셔서 온 분이 저러실 수는 없어요.”


“저 아가씨가 그라니언 가문을 잇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게야. 불행 중 다행히 에드리안 도련님은 모친의 출신은 한미하다고는 하나, 인품은 나무랄 데 없다고 하니.”


의원이 혀를 차며 말하자 하녀 또한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들이 그라니우스에서 온 아가씨에 대해 욕을 하고 있는 동안, 2층의 방에 있는 그 아가씨는 분노에 몸을 떨며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어찌나 물어뜯은 것인지 어느새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고, 기겁을 한 하녀는 손수건을 가져 오기 위해 방을 나갔다. 그제야 혼자가 된 아가씨, 프리실라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먼지 때문에 결코 주저앉지 않았을 바닥에 말이다.


‘내 딸...’


숨이 곧 넘어갈 목소리로, 결코 내뱉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은 그 치의 얼굴이 떠오르자 프리실라는 두 귀를 양손으로 막은 뒤 도리질 쳤다. 왜? 왜 자신의 아버지였던 공작은 그토록 자신을 외면했을까? 그러면서 샤를리즈와 에드리안은 왜 그렇게 애달프게 쳐다보는 것일까?


아무리 어렸어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어렸을 때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려 했었지. 같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보다 못 가졌으니까. 으레 양보하면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낸 동정과 끓어오르는 질투심이 이상하게 균형을 이루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동정심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던 동정심이었다. 자신은 애초부터 가질 수 없었던 것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항상 쫓아갔지만 끝끝내 잡지 못했던 아버지의 망토자락은 애초부터 자신이 잡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자신은 공작의 딸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샤를리즈와 에드리안은 공작의 아이들이었으니까. 태생부터 다른,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가씨! 세상에... 피 좀 봐!”


어느 새 들어온 하녀가 프리실라의 입술에 배어 나오는 피를 닦으려 하자 프리실라는 거칠게 그녀의 손을 쳤다. 그리고는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꺼져!”


프리실라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하녀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아는 하녀는 기겁을 하더니 방을 뛰쳐나갔다. 그를 바라보던 프리실라는 눈을 깜빡이다 이내 사색이 되었다. 만약 이 사실을 저런 하녀들이 알게 되면, 저것들은 자신을 지금처럼 받들어 모실까?


사교계의 공주처럼 군림했던 그녀의 비밀이 밝혀지면, 그녀를 떠받들던 귀족 계집애들은 단숨에 그녀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아니, 등만 돌리면 다행이지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들개 떼들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이다.


란은? 란이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녀를 버리지 못하는 건 그녀가 공작 가문의 영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럼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그녀 자신조차도 몰랐던 비밀이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아는 것은 어쩌면 평생토록 의식하고 있었던 그녀의 숙적. 그 계집애는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지? 공작 때문에? 그럴 리가. 공작 때문이었다면 더욱이 밝혔어야 했다. 그랬으면 자신을 밀어내고, 그 계집애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공작부인 때문이었나? 아, 그건 일리가 있는 가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공주였고, 스니케드 왕이 죽었을 경우, 여왕이 될 수 있는 여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샤를리즈의 어머니를 무참히 살해했지. 그래, 어머니 때문에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럼 어머니가 살아있으니 그 계집애는 쭉 입을 다물고 있는 건가?


“아...”


프리실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래. 그렇다. 어머니만 있으면 자신은 안전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 란과 결혼을 하고, 자신이 왕비가 되면 그 계집애는 영영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안도하려고 하는데, 불현 듯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금 또 다른 사생아를 품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샤를리즈 그 계집애는 알고 있다. 공작이 그 애를 인정할까? 그럴 리가 없다. 한 번 눈감아준 것도 고마워할 판에 두 번 눈감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 그 애가 사생아임이 밝혀지는 건가? 사교계에? 아니, 왕국 전체에? 그럼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건가?


“아... 안 돼...”


왕국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가, 단 하나의 비밀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왕국 역사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흔히 있는 일 중 하나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프리실라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죽여 버릴 거야...”


프리실라의 닭똥 같은 눈물이 입술에서 배어나온 핏물과 섞여 연붉은 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프리실라의 녹색 눈동자는 눈물에 젖어 일렁였는데, 그것이 마치 가슴 속 깊은 분노로 인해 피어오른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 * *





마치 성격이 발걸음에서라도 드러나듯 시릴의 걸음걸이는 매서웠다. 그는 빠르면서도 거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의 발이 바닥을 칠 때마다 나는 소리는 마치 하인들에게 비키라는 듯 경고하는 것처럼 들려 하인들은 반사적으로 그가 지날 때마다 복도로 길을 비켰다. 그런 괴이쩍은 움직임이 멈춘 것은, 시릴이 어떤 문에 도달하여 노크를 하고 나서였다.


“시릴 슈드레거입니다.”


“아, 들어오게.”


그 말에 시릴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테이블의 가장 주목받는 곳에 위치한 자리에 홀로 앉은 란을 보고 궁정식 절을 한 뒤,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군. 요즘 아주 바쁘다고 들었네.”


“뭐, 상단 일을 갑작스레 하게 되어 그리 되었습니다. 바쁘지만 배우는 것도 많으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예.”


왜 반문하냐는 듯 퉁명스럽게 시릴이 대답하자 란은 어색하게 뺨을 긁는다. 그리고는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고, 시릴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 자리에 앉는다. 하녀가 들어와 시릴의 앞에 찻잔을 놓았고, 이윽고 그 찻잔은 채워졌다. 먼저 와서 다 마시기라도 한 것인지 란의 찻잔도 다시 채워진다. 하녀가 나가자 란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쥐고 있던 책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단에는 별 일이 없고?”


“뭐, 그렇죠. 워낙 큰 상단이라 별 일이 있을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적도 없으니.”


“상단에 자주 가니,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겠군.”


“예. 로버트 케일리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는 꽤 유들유들한 면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는 자 같더군요. 그리고 에단 피데스. 그 사람은 저하께서도 아신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첫 만남이 꽤 좋지 않았고, 그 후도 계속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담 페트리시아 라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는 정말로 대단하더군요. 물론, 여러 가지 의미로요. 비록 직업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쓸 만한 여자였습니다. 어쩌면 대업에도 필요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죠.”


언제 빈트뮐러 상단을 싫어했냐는 듯 시릴이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란은 뭔가 궁금한 것이 더 있는지 반문했다.


“또 없나?”


“예?”


“상단에서 또 무슨 겪은 일이 없냐고 물었네.”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하는 일이라곤 슈드레거를 관리하는 일들뿐인지라. 혹시 더 궁금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네.”


란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시릴은 뭐냐는 듯 곁눈질을 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서류뭉치들과 만년필을 꺼낸다. 란이 그것을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책 쪽으로 눈을 돌린 뒤 물었다.


“그것들은 뭔가?”


“이것들 말입니까?”


“그래.”


“리즈가 숙제를 내준 것들이죠. 빌어먹을 계집애. 보란 듯이 일을 다 끝내 놓으니까 더한 일을 주더란 말입니다.”


시릴이 짜증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란은 책에서 눈을 떼어 시릴을 바라보았다. 그에 시릴은 자신이 조금 거친 단어를 써서 란이 놀랐나 싶어 목소리를 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러나 란 또한 무언가 할 말이 있었는지, 시릴과 란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죄송합니다.”


“리즈라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칠흑의 꽃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7 제 17막. 어떤 음모. +16 14.08.09 817 29 11쪽
206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6 468 20 10쪽
205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2 590 24 10쪽
204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7.31 493 19 10쪽
203 제 17막. 어떤 음모. +6 14.07.20 486 25 9쪽
202 제 17막. 어떤 음모. +13 14.07.13 660 24 10쪽
201 질문과 답변 & If +9 14.03.12 1,266 23 22쪽
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199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6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196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6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194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7 14.01.31 1,061 30 10쪽
193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6 14.01.26 755 33 11쪽
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2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7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9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5 28 12쪽
183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11 739 18 10쪽
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2 29 10쪽
180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10 13.12.01 967 29 10쪽
179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7 795 28 10쪽
178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0 989 27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