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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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최근연재일 :
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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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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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746

작성
14.02.0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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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DUMMY

꽤 적절한 시간에 연회에 도착한 시릴은 지인들에게 인사를 한 뒤 음료가 든 잔을 들고 연회장의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연회장에 참석한 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해치필드 가, 블라레트 가, 콘라트 가, 시모어 가 등 내로라하는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참석했다. 가주부터해서 훗날 가문을 이을 장남들과 많게는 차남들까지.


저렇게 줄줄이 제 자식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아무래도 훗날 왕이 될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서 가문에 보탬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자식도 데리고 오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회장에서 란 다음으로 시선을 받고 있는 그라니언 공이었다.


사실 시릴은 몰래 그를 훔쳐보기 위해 구석으로 온 것이었다. 소문으로도 익히 알려진, 귀족으로써는 최고의 재능을 가졌다는 그라니언 공만으로 만 알고 있었다면 굳이 이런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샤를리즈 빈트뮐러와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 그 둘의 아버지라는 점이 더 흥미를 유발했다. ‘그 성질 더러운 두 빨간 머리들의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주제보다 흥미로운 주제는 아마 없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라니언 공을 발견한 시릴은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대왕이네. 빨간 머리 대왕.”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말 걸지 마.’라는 분위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라니언 공은 마치 본래부터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태어난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의 주변에 서 있었다. 모두들 말을 걸고 싶어 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서 말이다.


저게 무슨 마왕도 아니고. 아마도 그의 두 자식이 가진, 더러운 성질은 유전인 모양이다, 라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는 찬찬히 그의 이목구비를 살핀다. 에드리안 드 그라니언은 확실히 제 아버지의 판박이였다. 아마 그 소년은 커서 차세대 빨간 머리 대왕이 될 테지.


그리고 샤를리즈는 붉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의외로 달랐다. 아마도 제 어머니 쪽을 더 닮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신기했다. 샤를리즈와 에드리안은 분명 닮았는데, 그리고 샤를리즈와 공작 또한 닮은 구석이 있었는데도 시릴은 샤를리즈가 제 어머니를 더 닮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공작과 샤를리즈의 어머니도 좀 닮은 편인가? 하긴, 사람은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하니. 그럼 샤를리즈의 어머니는 저 공작의 여자 판이라는 건가? 그건 좀 끔찍한데. 그러한 생각이 시릴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벌하기라도 하는 듯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정강이를 걷어찬다.


“어윽!”


강렬한 통증에 시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였고, 덕분에 누가 가격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구부린 몸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연회장에서 저런 실루엣을 가질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지. 시릴은 겨우 고개를 들어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그 사람을 부른다.


“망할 계집애.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자 샤를리즈는 짜증이 많이 난 표정으로 시릴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무슨 짓을 한 거야?”


“뭐? 내가? 내가 뭔 짓을 했는데?”


“망했어. 너 때문에.”


그렇게 말한 샤를리즈는 갑자기 자신의 잔에 차 있던 포도주를 한 번에 비운다. 그에 시릴은 ‘뭐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샤를리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쳤냐?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술을 벌컥벌컥 마셔? 나중에 취해서 난동부리면 누가 그걸 책임지려고...”


“내버려 둬. 이거 한 잔정도로 취할 것 같아?”


샤를리즈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시릴은 뭔가 자신이 큰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는 샤를리즈를 슬쩍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쉰다.


“뭔데?”


시릴이 묻자 샤를리즈는 입을 꾹 다물고, 어딘가 모르게 초조한 기색을 내다가 이내 입을 연다.


“네가 말했듯이 난 눈치가 빨라. 하지만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모를 수 있었어. 그게 더 좋았을 거라고.”


“아, 진짜. 뜸 그만 들이고 말해. 스무고개 하냐?”


“란 씨 말이야!”


샤를리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을 시릴에게 들이대며 말하자 시릴은 움찔 놀라 뒷걸음친다. 샤를리즈의 행동도 행동이었지만, 혹시나 이 광경을 란이나 공작이 볼까봐. 그랬기에 내용 파악에 늦었고, 시릴의 기준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샤를리즈가 지적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시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 뭐 그런 거 가지고 사람을 걷어 차?”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아, 난 또 뭐라고. 난 내가 뭐 하나 말아먹어서 피해가 엄청난 건 줄 알았네.”


“직접적인 피해는 없지만, 간접적인 피해는 있거든, 이거? 도대체 뭘 잘했다고 떳떳한 거야? 너 지금 내가 얼마나 애매한 입장인지 알기나 해?”


“아, 뭐가? 미리 알았으면 괜찮은 거 아냐? 마음 주지 않으면 될 걸 뭐 그렇게 툴툴 거리냐? 선 딱 긋고...”


“그게 말처럼 쉬워? 아무리 그와 내가 대등하게 계약을 했다지만 신분상 그는 왕이 될 사람이고 난 일개 상인이야. 알랑방귀를 뀔 수밖에 없는 위치인데 지금 내가 어떻게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얼굴 보는 것도 영 어색하단 말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선 긋고 얼굴 안 보면 될 일이지만 저 사람은 그게 안 되잖아. 너 바보야? 여태까지는 아주 편했는데 이제는 아주 불편해. 그것도 나만!”


“뭐...”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불편함이 터진 셈이었다, 시릴에게는 말이다. 시릴은 눈만 끔뻑이다가 이내 말한다.


“그럼 그... 불쾌한 건가? 저하께서 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뭐? 뭐라는 거야? 이 멍청이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샤를리즈는 답답했는지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말했다.


“불편한 거라고. 불쾌한 게 아니라. 이 차이를 몰라?”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불편한 건 또 뭐냐?”

“아예 기준이 다른 거지. 좋고 싫고 랑 불편한 건.”



샤를리즈가 숨을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그와 나는 지금의 관계가 딱 좋아. 편하다고. 뭐, 신분 차이는 있지만 그가 굳이 신분을 들먹이면서 날 하대한 적도 없고, 대화도 잘 통하고.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네가 경고를 한 것일 수도 있겠지.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똑똑한 사람이니 내가 혹시나 그를 좋아하게 될까봐. 알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는 거. 하지만 너와 날 봐. 우리가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 잘 알잖아. 그리고 우리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도. 그런데 그런 내가 그를 좋아할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이란 모르는 거지.”


시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쥐고 있던 유리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그리로 향하는 게 사람 마음이야.”


“경험담이야?”


“그래.”


그 대답에 샤를리즈는 시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했는데?”


“숨겼지.”


시릴의 그 짧은 대답 속에는 많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이 어떤 것인지 샤를리즈로써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 감정을 아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래서 샤를리즈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설령 그를 좋아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 마음을 죽여 버릴 거야. 네가 그랬듯.”


그 지독한 대답에 시릴은 샤를리즈를 바라본다. 마치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그 눈빛이 싫어 샤를리즈는 고개를 돌린다. 우연이었을까? 샤를리즈의 시선에 그라니언 공작이 잡혔다. 여전히 심통이 난 표정으로 사람들을 멀리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샤를리즈가 말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사랑해서 청승만 떨다가 죽는 여자의 삶은 진저리나도록 봐왔어. 내가 그런 삶을 살게 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그런 무기력한 삶을 살라니.”


이 나라의 그 누구보다도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샤를리즈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남자만을 바라보다가 결국 살해당할, 그런 비극의 여주인공의 삶을 선택할 리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을 좋아해본 적이야 있었고, 그랬기에 그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건 미치도록 싫었기에 샤를리즈는 그런 일이 있을 때 그 마음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정체만큼이나 숨겨야 할 비밀이 될 테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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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4.02.08 21:50
    No. 1

    그렇군요.....
    그러나 흐르는 그 마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샤를이 란을 의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랬는데, 이 글에 주인공 로맨스는 안나오나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암살의천사
    작성일
    14.02.08 23:36
    No. 2

    흐흥 전 믿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가는바람
    작성일
    14.02.10 09:44
    No. 3

    시릴이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하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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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제 17막. 어떤 음모. +6 14.07.20 486 25 9쪽
202 제 17막. 어떤 음모. +13 14.07.13 660 24 10쪽
201 질문과 답변 & If +9 14.03.12 1,266 23 22쪽
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199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6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7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194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7 14.01.31 1,061 3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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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3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7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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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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