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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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최근연재일 :
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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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02.2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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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글자
7쪽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DUMMY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치고, 그 내용은 결의에 차 있어서 샤를리즈는 신기한 듯 바라본다. 그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물론, 그는 뛰어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아직까지 자신이 모르는 란의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까?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목숨마저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걸까? 샤를리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건 싫은데. 난 내 동생을 위해서라면 죽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안 죽어.”


“흥. 너 그거 병이다.”


“웃겨.”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샤를리즈가 쏘아 붙인다. 그 말을 끝으로 둘은 한동안 걷기만 한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상당했으므로. 이럴 때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더욱 고되었고, 그래서 저들도 모르게 날이 서게 되는지라. 샤를리즈는 낮, 에단이 마차를 보낼까, 라고 물었던 것을 거절한 걸 후회한다.


이렇게 지칠 줄 알았으면 그냥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인데. 왜 사서 고생을 해서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본다.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다라. 그것도 가족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이유가 궁금했고,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만약 자신도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에드리안조차도 제쳐두고 말이다. 삶의 전부였던 에드리안을 내팽개치고 다른 이를 위해 사는 자신이란 상상하기 힘들었다. 마치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시릴과 그 무리들에게 그러했듯, 란은 자신을 따르도록 설득하기 위해 샤를리즈에게 말할 것이다.


그 때 자신은 설득될까? 평생을 누군가를 위해 살았던 자신이? 샤를리즈는 다시 한 번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승달이 서서히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홀로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서서히 에드리안에게서 손을 놓고, 루타로 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준비 중인 샤를리즈였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살고 싶지는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도 무척이나 부담이 가는 삶이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기에.







* * *








“폐하!”


의회가 끝나자마자 졸래졸래 쫓아다니는 크산느 백작의 모습에 시종들은 기가 질린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때 하필이면 그라니언 공이 자리를 비워서 그 누구도 크산느 백작을 제재할 수 없었다.


시종들이 이렇게 인상을 찌푸림에도 정작 왕은 귀찮지 않은 모양인지 멍하게 의자에 앉아 크산느 백작의 채근을 듣기만 한다. 저 정도면 어느 쪽의 인내심이 더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의회에서도 내내 멍하게 있던 왕의 눈에 그제야 푸른빛의 총기가 돌았다. 그리고는 크산느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애가 돌아온다지.”


드디어 나타난 왕의 반응에 크산느 백작은 기운이 생긴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나의 폐위겠지.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왕위에서도 물러날 때가 된 게야.”


크산느 백작은 당연히 분노를 예상했다. 그리고 그 분노가 나타나야 자신에게도 유리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의 반응은 이처럼 담담하고, 오히려 안도하는 반응이었다.


그제야 어째서 현왕의 측근이나 다름없는 그라니언이 갑자기 그 ‘선왕의 아들’쪽에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썩은 동아줄이란 말인가, 이 동아줄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동아줄을 놓기에는 나머지 동아줄이 자신에게 주어지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크산느 백작에게는 애초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썩은 동아줄을 그대로 잡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랬기에 크산느 백작은 죽을 각오로 그 썩은 동아줄을 새 동아줄로 바꾸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명예를 깎아먹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폐하. 그 자가 왕위에 오르면 폐하는 물론이고, 병상에 누워계신 황후마마나 태자 저하, 그리고 태손 마마까지도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생각해보시옵소서. 그가 과연 폐하의 혈족을 남겨두려 하겠습니까?”


“자비를 바라봐야겠지. 적어도 그 녀석은 피를 바라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래도 피를 묻혀야 한다면, 내 피로 충분할 게야.”


“그 자가 그리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자의 측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것을 모르십니까?”


크산느 백작의 말에 왕은 음침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 그라니언이 그 쪽에 있는 거 아니겠나? 아무리 그놈들이 모두 내 혈육의 피를 원한다 하더라도 그라니언이 있는 이상 함부로 죽이려들지는 못하겠지.”


‘젠장!’


크산느 백작은 왕의 말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최후의 수단마저도 이렇게 간단하게 거부당할 줄이야. 하긴, 왕은 왕비나 태자에게 그리 끈끈한 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니 그들을 볼모로 하여 무언가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태평하다니. 자신의 왕위는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크산느 백작은 한숨을 내쉰 뒤,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돌아서려 했다. 왕이 저런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아직까지 정식으로는 복귀하지 않은 왕자를 죽이는 일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 다짐한 채.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이를 수소문해 죽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자를 호위하고 있을 이들은 또 얼마나 대단할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크산느 백작이 절을 하는데, 왕이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건 단 하나밖에 없었어.”


“예?”


“하나밖에. 딱 하나밖에 없었지. 그런데 그 때문에 이렇게 일이 틀어지게 된 게야. 근 20년을 말이야. 나는 그것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왕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크산느 백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든 걸 잃었다고?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사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은 왕

의 자리 따위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미천한 어미를 두었으며, 지지기반은 그 누구보다도 약했다.


운이 좋아 그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이가 모든 형제들을 죽여 두었기 때문에, 선왕이 그리 되었을 때 왕위에 오른 것이지. 그 정도 운이 있었으면서, 그리고 이제는 왕이고 왕의 업무를 그라니언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에게 맡기고, 젊은 귀족 계집애들에게 놀아나는 주제에 모든 걸 잃었다고?


설령 그것이 모든 것을 잃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 해도 그는 왕이 부러웠다.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크산느 백작의 시기 어린 시선을 느꼈을 리 없는 왕이 말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죽음으로라도

이 시간을 끝 낼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그리 할 테야.”


작가의말

16막. 끝났습니다. 다음 회는 200화 특집 겸 외전입니다. 인물들의 감정이나 가치관 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쓴 외전입니다.

향후 이어질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도록 하게 만들기 위해서 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200화를 기념해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혹시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쪽지로 보내주세요! 최대한 대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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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제 17막. 어떤 음모. +16 14.08.09 817 29 11쪽
206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6 468 20 10쪽
205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8.02 589 24 10쪽
204 제 17막. 어떤 음모. +5 14.07.31 493 19 10쪽
203 제 17막. 어떤 음모. +6 14.07.20 485 25 9쪽
202 제 17막. 어떤 음모. +13 14.07.13 660 24 10쪽
201 질문과 답변 & If +9 14.03.12 1,266 23 22쪽
200 여러 시선. +8 14.03.09 1,007 33 16쪽
»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23 746 26 7쪽
198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2.19 603 21 9쪽
197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8 14.02.15 544 25 9쪽
196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3 14.02.08 786 29 9쪽
195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9 14.02.04 635 28 9쪽
194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7 14.01.31 1,061 30 10쪽
193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6 14.01.26 755 33 11쪽
192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5 14.01.21 1,071 35 12쪽
191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5 786 30 12쪽
190 제 16막. 왕을 위한 촌극. +4 14.01.11 897 25 9쪽
189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4.01.06 822 24 12쪽
188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4.01.01 1,036 25 10쪽
187 제 15막. 협상 테이블. +7 14.01.01 1,081 26 8쪽
186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27 829 24 11쪽
185 제 15막. 협상 테이블. +4 13.12.24 711 25 12쪽
184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16 764 28 12쪽
183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11 739 18 10쪽
182 제 15막. 협상 테이블. +5 13.12.08 974 26 9쪽
181 제 15막. 협상 테이블. +3 13.12.05 1,061 29 10쪽
180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10 13.12.01 967 29 10쪽
179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7 795 28 10쪽
178 제 14막. 돌이킬 수 없는. +4 13.11.10 989 2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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